* * *
무영문 총단에서 외부로 연결되어 있는 땅굴은 20개가 넘는다. 그리고 그중에 4개는 손수레도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그 폭이 넓었다. 물론 경사도가 가팔랐기에 손수레를 이용하지는 못했고 등짐을 져서 옮겨야 했지만, 부피가 큰 짐이라도 옮기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땅굴을 그렇게 많이 파놓은 이유는 평상시에 한 곳으로 너무 많은 인원이 들락거리다 보면 외부에 발각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유사시에 탈출하기에도 용이했다. 그리고 총관이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가고 있는 이 땅굴은 무영문의 간부급 요인들의 탈출을 위해 특별히 조성해 놓은 곳이었다.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멍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던 추밀단주가 문득 총관에게 물었다.
“도대체 총단 위치를 어떻게 알아냈을까?”
“단주님께서 모르시는 일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건 그렇구먼.”
추밀단주씩이나 되는 인물이었기에 총관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이리라.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네놈이 나를 기망하려는 것이냐?’ 하고 화를 벌컥 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진짜로 적이 오기는 온 건가?”
그건 총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간부급 요인들을 호위하여 이곳으로 내려온 무사들 또한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들은 옥화무제의 특급대피령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태상문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사실일 겁니다.”
“그럴까?”
그 말을 끝으로 추밀단주는 또다시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초점 없는 눈으로 그저 습관적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동굴이 울리며 뭔가가 부셔지는 듯한 요란한 굉음이 뒤에서 들려왔다.
“뭐, 뭔가?”
모두들 두 눈이 동그래졌을 때, 무사들을 이끄는 지휘자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지나온 통로를 파괴하는 소리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미리 통보를 해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네.”
총관 일행이 들어간 땅굴은 아주 길었기에 통과하는 것만으로도 꽤나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무사들은 3번에 걸쳐 통로를 파괴해, 혹시 뒤쫓아 올지도 모를 추격을 미연에 방지했다.
인위적으로 뚫은 땅굴에는 무너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상판과 기둥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시설물들이 보이지 않았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에 들어선 것이다.
동굴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반각(7.5분) 정도 걸어가자, 동굴 안이 넓어지며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시설과 집기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다 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누, 누구냐?”
무사가 외치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총관이 앞으로 달려 나가며 외쳤다.
“태상문주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십니까?”
총관이 경악할 만도 했다. 옥화무제의 꼴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헤어질 때만 해도 아름다웠던 비단옷이 지금은 여기저기 찢어져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호신강기로 보호되고 있었던 그녀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이, 이것이라도 급한 대로…….”
총관이 자신의 겉옷을 벗으려고 했지만, 옥화무제는 그것을 막으며 말했다.
“이럴 시간이 없어요. 지금 당장 탈출해야 해요.”
“지금 당장 말입니까?”
“조만간에 그들은 땅굴의 존재를 눈치 챌 거예요. 그 전에 여기에서 탈출해야만 해요.”
옥화무제의 예상은 적중했다.
“저쪽에 관도(官道)가 있습니다.”
산 뒤쪽으로 정찰을 나갔던 수하들의 보고에 철영은 아연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깊은 산골짜기에 관도가 뚫려 있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그럴 리가…….”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철영이 달려가 보니, 험준한 산맥을 뚫고 꾸불꾸불 연결되어 있는 길이 보였다. 우마차(牛馬車)가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제법 폭넓게 뚫어 놓은 관도 위를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 중이었다. 알고 보니 이 산길은 복건성과 강소성을 연결하기 위해 관에서 뚫어 놓은 도로였다.
이때, 철영의 눈에 도로에 접해 있는 커다란 객잔이 보였다. 아마도 산길을 통과하는 객들이 쉬어 가는 곳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뭔가 수상쩍었다. 동굴이 이쪽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출구가 위치하기 딱 좋은 곳에 건물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에 접해 있는 모든 건물들을 샅샅이 뒤져라!”
“존명!”
수하들을 먼저 탈출시킨 후, 옥화무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숨어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적들이 자신의 예상보다 빨리 이 도로를 찾아낼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자신은 수하들이 도망칠 만한 시간을 벌어 줘야 했다.
다행이 마교도들이 산길을 알아낸 것은 수뇌부들이 다 탈출하고 난 다음이었다.
“제법 눈치가 빠르군. 하지만 너무 늦었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수뇌부는 여기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절대다수의 무영문도들은 아직까지도 이곳 여기저기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발 눈치 채지 못해야 할 텐데…….”
하지만 그녀의 바램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젠장!”
마교도들이 뭔가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예상보다 마교쪽 지휘자의 감각이 예민했던 것이다.
마교도들은 즉각 관도를 틀어막았다. 몇몇 도주하는 인물들이 보였지만 마교도들의 손길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모두들 굴비 엮듯 줄줄이 붙잡혀 버렸다.
그 다음 마교도들이 행한 것은 관도 상에 위치한 건물들을 뒤지는 것이었다. 그것까지 보고 그녀는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은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이것들을…….”
옥화무제는 분노를 감추기 힘들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수하들을 구하러 가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화경을 깨달았다고는 하지만, 저 안에 들어가서 포위당하는 날에는 그날로 끝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서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이게 도대체 사람이 내뿜을 수 있는 기세란 말인가?”
화경을 깨달은 그녀에게조차 공포감을 안겨 줄 정도의 강력한 존재감이었다. 그리고 그 존재감은 급속도로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교주로군.”
묵향이 흑풍대를 거느리고 그녀가 만들어 놓은 미끼를 덮친 게 3일 전이었다. 아마 그곳을 박살낸 다음, 곧바로 이쪽으로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곳에서 여기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먼데…….
옥화무제는 경악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거리를 3일 만에 달려올 수 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돼!”
* * *
관도 뒤쪽으로는 마치 산불이라도 난 것처럼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하지만 관도를 걷던 사람들은 그쪽을 힐끔 바라봤을 뿐, 더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아니, 발걸음을 옮기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을 뿐이다. 그들은 산불이 난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랬기에 혹여 산불이 이쪽까지 번져오기 전에 산을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멈춰서야 했다.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풍기는 험악한 자들이 길을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가만히 서 있어라. 검사에 협조한다면 아무 일도 없을 거다. 하지만 반항하거나 도망친다면 그 뒤에 일어나는 사태에 대해서는 각자가 책임져야 할 거다.”
곧이어 검문검색이 시작되었다. 그 순간 칼을 차고 있던 2명의 장한이 쏜살같이 도망쳤다. 그들은 도저히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달아났다.
“무, 무림인?!”
사실 무림인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일반인들이 보는 앞에서 무공을 사용한 결투를 벌이는 것을 가급적이면 자제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반인들의 시선으로는 마치 신선처럼 생각되는 그런 인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곧바로 붙잡혀 왔다. 마치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몰골이 엉망으로 변한 채.
그 광경을 본 행인들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지금 자신들을 겁박하고 있는 저 괴이한 자들은 단순한 산적 나부랭이가 아니라 무림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 이후, 행인들은 짐을 수색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협조적으로 나왔다. 품속에 가지고 있던 것은 몽땅 다 꺼내 보였으며, 질문에 대해서는 즉각 대답했다.
이때,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대는 인물이 다가왔다. 동방뇌무 장로였다.
“어떻게 됐느냐?”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동방뇌무 장로는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는 인물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놈들은?”
“무영문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품속에서 나온 소지품으로 미뤄 봤을 때, 비월문(飛月門)이라는 방파에 소속된 인물들인 것 같은데…….”
“일단 잡아 둬. 나중에 심문해 보면 알 수 있겠지.”
“존명!”
이때, 멀리서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과시하며 묵향이 달려왔다. 처음에는 엄청난 고수의 등장에 바짝 긴장하는 듯했지만, 상대가 교주라는 것을 알게 되자 모두들 자신이 맡은 일에 열중했다.
동방뇌무 장로가 제일 먼저 묵향에게로 달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교주님.”
곧이어 철영 부교주도 도착했다. 그는 교주의 갑작스런 등장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아직까지 뭔가 보여 줄 만한 실적을 올린 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는 진짜던가?”
“옥화무제와 맞닥트린 것으로 보아, 진짜인 듯합니다.”
“무슨 대답이 그런가? 진짜면 진짜고, 가짜면 가짜지.”
철영은 묵향에게 지금까지 자신이 겪었던 상황을 자세히 보고했다. 무영문의 전각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했고, 도착해보니 이미 불타고 있었다고 말이다.
“내가 간 쪽과 비슷한 상황이군. 그렇다면 이쪽도 가짜인가?”
이때, 주변의 가옥들을 뒤지러 간 마교도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눈에 봐도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을 굴비 엮듯 끌고 왔다. 책임자인 듯한 무사가 달려와 철영에게 보고했다.
“무영문도들이 확실합니다.”
“오오, 드디어 잡아냈군. 철저하게 심문해서 새로운 정보들을 파악해 내.”
묵향과 철영은 꽤나 고무되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들이 잡아들인 무영문도들 중에서 쓸 만한 고위급 인물들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그들을 심문해 본 결과, 무영문이 지독할 정도로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을 뿐, 더 이상의 소득은 없었다. 비영단은 예외였지만, 그 외 집단들의 경우 소속된 지점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전출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던 탓이다.
“고위급의 인물은 없던가?”
“그들은 따로 움직인 모양입니다.”
묵향의 질문에 철영이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완전히 헛물만 켠 게 확실했다. 그야말로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 버린 형국이었다. 결국 총단 건물을 파괴한 것 외에, 그 어떤 실리도 얻은 게 없었다.
“참, 그게 있었지.”
뭔가 생각난 듯 묵향은 철영에게 지시했다.
“총단으로 전서를 보내 주는 중계지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곳을 쑤셔 봐.”
총단을 점령하고, 또 잔당들을 잡아내기 위해 정신이 없었던 철영은 미처 그것까지는 신경 쓰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는 천진악 장로를 불러 그곳으로 대원들을 급파하라고 지시했다.
“전서구들 확보에 최선을 다해라. 여기서 키운 전서구도 있겠지만, 각 분타에서 키운 것도 있을 게야. 그것들만 확보할 수만 있다면 분타들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곧이어 철영은 자신이 왜 진작에 그곳을 생각하지 못했는가 하는 한탄을 해야만 했다. 그들이 총단을 치고 있는 동안, 전서구를 중계하던 지단은 폐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독약을 살포했는지 수없이 많은 비둘기들의 사체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곳에서 건진 게 있다면, 아직 총단에서 변고가 일어나기 전에 각 분타들에서 띄운 전서구들이 여기저기에서 계속 날아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천진악 장로는 수하들을 시켜 전서구들의 발에 묶여 있는 전서들을 모두 수거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모두 암호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약이 바짝 오른 묵향은 무려 한 달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 총단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도로에 접해 있는 건물들 속에서 찾은 무영문도들을 제외한다면, 더 이상의 수확은 없었다. 모두들 땅굴을 파고 들어앉아 있다 보니, 그들을 찾아낼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묵향은 결단을 내렸다는 듯 외쳤다.
“더 이상은 시간낭비다. 철수하도록 한다.”
“원통합니다, 교주님. 그토록 커다란 피해를 감수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물론 이것은 연극이었다. 철수하는 척하면, 혹시 숨어 있던 놈들이 기어 나올까 하는 기대감에서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