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회의 몰락
무영문에 대한 마교의 공격이 진행되고 있을 때, 황도(皇都) 남경(南京)은 반란군을 맞이하느라 발칵 뒤집혀져 있었다. 반란군 수뇌부를 제거하기 위한 황성사의 작전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묵향이 여문덕 상장군을 돕기 위해 수하들을 파견해 놨던 것이 주효했던 것이다.
전위부대를 이끌고 남경 인근에 도착한 유광세 상장군은, 먼저 주위로 정찰병들부터 파견했다. 양양성에서 남경까지 달려오는 데 꽤나 시간이 지체된 만큼, 어딘가에 적의 증원부대가 숨어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유광세 상장군이 가정하고 있는 최악의 사태는, 금나라와의 국경선에 포진하고 있는 다른 군벌들의 가담이었다. 만약 그들이 황군에 가담했다면 무수한 전투로 단련된 정예병들과 장수들이었기에, 자칫 대업을 이루기도 전에 공멸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몰랐다.
역시, 백전노장인 유광세 상장군의 예상은 틀림이 없었다. 정찰병이 적의 구원군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것도 무려 15만에 가까운 엄청난 대군을 말이다. 그들은 안휘성(安徽省), 절강성(浙江省), 강소성(江蘇省)의 성주(省主)들이 거느리고 온 병사들이었다.
정찰병의 보고를 들은 유광세 상장군은 적이 15만이나 되는 대군이라는 말에 오히려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전방에 배치된 정예부대들을 끌어 모았다면, 결코 그렇게 많은 숫자가 될 수 없었다. 숫자가 많다는 말은, 여기저기에서 어중이떠중이까지 몽땅 다 끌어 모았다는 것이 된다. 정예 5만과 오합지졸 10만을 섞어서 싸우는 것보다는, 정예 5만을 거느리고 싸우는 편히 훨씬 더 쉽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그렇기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압군 쪽의 형편은 유광세 상장군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좋지 못했다. 상장군은 전방의 정예부대가 가세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전방의 병사는 단 한 명도 가세하지 않은 상황이다. 제국의 최정예 부대와 싸워야 한다는 말에 전방의 군벌들이 황성으로부터의 구원 요청을 무시해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구원군으로 모여 있는 15만 명의 대군은, 3개 성의 성주들이 급히 여기저기에서 긁어모은 오합지졸들이었다. 군복은 말할 것도 없고, 포졸복조차 제대로 입고 있는 병사들을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다. 성에 남아있던 얼마 안 되는 병사들과 포졸들을 주축으로, 남경으로 진군해 오는 과정에서 농민들을 대대적으로 징집하여 숫자만을 늘려놨던 것이다.
“우선, 후방부터 튼튼히 해놓고 황성을 공략하기로 하자.”
유광세 상장군은 여문덕 상장군이 거느리고 있는 후속부대를 기다릴 것도 없이,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5만 명의 전위부대를 이끌고 적의 구원군을 상대하기 위해 달려갔다.
구원군은 남경에서 30리나 떨어진 거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은 반란군이 황성을 공격할 때, 그 뒤를 치려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반란군이 예상 외로 황성으로 가지 않고, 갑자기 자신들의 코앞에 나타나자 모두들 깜짝 놀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구원군을 이끄는 장수들은 모두 각 성(省)을 책임지고 있는 성주들이다. 그 중에는 황족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콧대 높은 인물들이다 보니 유광세 상장군의 병력을 봤음에도, 3배나 차이 나는 병사들의 수의 우위만을 믿고 공을 세우기 위해 서둘러 달려들었다.
뿌우우! 뿌우우!
둥! 둥! 둥! 둥!
귀청을 찢을 듯한 나팔소리와 함께 심장을 두드리는 전고(戰鼓) 소리가 벌판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소리만 요란했지, 진형은 일사분란하지 못하고 개판 일보직전이었다. 성주들의 능력에 비해 너무 많은 병력이 모여 있는 것도 문제였지만, 훈련도 제대로 안된 오합지졸이 태반 이상이다. 더군다나 성주들은 협력해서 싸우려 하지 않고, 먼저 공을 세우기 위해 따로 놀고 있는 형국이다.
이때, 화려한 갑주를 갖춰 입은 성주들 중 한 명이 전열이 정비되는 것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말에 박차를 가하며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는 오만한 표정으로 유광세 상장군 쪽의 진영을 쓰윽 둘러보더니, 거만한 어조로 외쳤다.
“듣거라! 지금이라도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임지로 복귀한다면, 네놈들의 죄를 묻지 않겠다. 하지만 계속 황상께 패역(悖逆)을 꾀한다면, 본관이 절대 용서치 않으리라!”
그는 한껏 자신의 위엄을 뽐내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조소뿐이었다.
“흥!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먼.”
유광세 상장군이 거느린 정예들은 북이나 나팔 따위를 불지 않았음에도 이미 오래전에 전투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유광세 상장군은 기다리기 지겨운지 크게 하품을 터뜨리며 투덜거렸다. 15만이나 되는 적군이 코앞에 진을 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는 긴장감은커녕 짜증만이 어려 있었다.
“저런 놈들을 믿고 지금껏 전장에서 싸워왔다니……. 내 자신이 한심하구먼.”
돌진하면 곧바로 무너져 버릴 듯한 구원병들. 아무리 오랜 세월 전란이 진행되었다고는 하지만, 저런 쓰레기밖에 동원할 수 없을 정도로 황실이 몰락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무리 기다려줘도 상대방의 전투 준비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는 더 이상은 기다려 주지 못하겠다는 듯 따분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명령했다.
“전군 돌격!”
그와 동시에 각 장수들이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돌격하라!”
“와!”
우렁찬 함성과 함께 반란군이 거친 폭풍과도 같이 밀려들어갔다.
챙챙챙.
“으아아악!”
전투가 벌어지자 곧 병기들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짙은 비릿한 혈향이 전장을 휘감았다.
구원군의 진형은 채 반각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앞쪽에 서있던 병사들이 순식간에 죽임을 당하자, 그 뒤편에 서있던 농민병들이 공포에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한 것이다. 대열 뒤쪽에 서서 병사들의 동요를 막고, 이탈을 방지하던 성주의 직속 병사들이 고함을 치며 전열을 유지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한 사기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구원군을 휩쓴 죽음의 공포는 빠르게 확산돼 성주의 직속 병사들이 몇몇 이탈자들의 목을 베며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지만 소용없었다. 전세가 급격히 기울어지자 농민병들의 이탈을 막아야 할 사병들까지 슬슬 눈치를 보다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 둑이 터지자 그 다음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창을 버리며 사방으로 달아나는 병사들 사이로 성주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당황한 것은 성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번쩍번쩍 빛나는 화려한 갑주를 입고, 더군다나 말까지 타고 있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재빨리 안전한 후방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온 사방이 병사들로 미어터져 말을 달릴 수가 없었다.
병사들의 머리 위로 불쑥 솟아올라 있는 화려한 모습의 그들을 반란군들이 가만 놔둘 리가 만무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우왕좌왕하는 성주들 중 한 명의 등판에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하나가 깊숙이 박혔다. 겉모습만 화려할 뿐, 전투용이 아닌 예식용인 그들의 갑옷이 화살을 막아낼 리가 없다.
“크억!”
처참한 비명과 함께 말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나뒹구는 성주. 그 모습을 훔쳐본 다른 성주들은 황급히 말에서 내려 갑옷부터 벗어던진 뒤, 도망치는 병사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따분한 듯한 표정으로 전장을 바라보던 유광세 상장군이 부관에게 명령했다.
“징을 울려라.”
나팔과 북소리가 전진을 의미한다면, 징소리는 후퇴를 의미한다. 그는 더 이상 싸울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이다.
구원병을 박살낸 유광세 상장군은 수하들을 이끌고 다시금 남경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만큼, 제대로 전투를 전개할 작정이었다. 우선 그는 여문덕 상장군이 거느리고 있는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포위망부터 갖추라고 휘하 장수들에게 명령했다.
황성이 위치하고 있는 남경은 수비전을 치루기에 그다지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평지에 자리 잡고 있어 지리적인 잇점이 전혀 없을 뿐더러, 도시 외곽을 튼튼한 성벽이 감싸고 있지도 않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길목에 몇 개의 토성(土城)을 쌓아놨을 뿐이다. 문제는 그런 곳임에도 무려 100만이 넘어가는 인구가 북적거리며 살고 있는 초거대 도시였다는 점이다. 남경은 결코 적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도시가 아니었다.
그런 초거대 도시로 들어가는 모든 진입로를 반란군이 차단해 버리자, 곧바로 난리가 일어났다. 전란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가 없는 만큼, 식량 가격은 폭등하는 것을 넘어서서 돈을 아무리 줘도 살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외의 각종 생필품들도 구입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민심이 더없이 흉흉해지고 있을 무렵, 여문덕 상장군이 거느린 30만 대군이 도착했다. 그리고 그제야 황군들은 반란군들이 굳이 전쟁을 벌일 필요도 없이, 포위를 하는 것만으로도 이쪽을 아예 말려 죽여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지금이라도 저들의 요구를 들어줘야만 합니다.”
섭평의 주장에 재상 진회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옆에 앉아있던 참지정사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버럭 외쳤다. 그는 예전에 섭평의 아래에 있었지만, 섭평이 추밀사로 좌천된 후 참지정사로 올라선 사람이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외다. 어찌 저런 무식하기 짝이 없는 무부(武夫)들의 허황된 요구를 들어준단 말이오?”
“지금은 황군이라도 남아있기에 협상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황군마저 무너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저들에게 철저히 끌려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고 싶으십니까?”
섭평의 말에 다른 신하들은 이리저리 눈치를 본 뒤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지지 의사를 밝혔다. 참지정사는 그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노려봤지만, 뭐라 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섭평의 말에 반박할 만한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추밀사는 그들과 제대로 된 협상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협상이 안 될 이유가 있습니까? 악비 대장군의 복권이야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요. 두 번째 조건인 황상의 이목을 가리고 있는 부패한 관료의 척결이라는 부분이 조금 문제가 되긴 합니다만, 그 부분도 협상을 통해 적당한 수준에서 마무리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이번 난리가 벌어지자마자 잽싸게 짐 싸들고 도망가 버린 관료들을 잡아들여 목을 베야 할 터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제서야 참지정사는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이 약간 풀리며 말했다.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지 않소. 부패한 관료라는 표현은 그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인 말도 안 되는 조항이란 말이오.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표현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본관은 협상 자체를 허락할 수 없소이다.”
에둘러 말했지만 참지정사의 속뜻은 자신들의 안위를 확실히 보장받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섭정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참지정사에게 물었다.
“그렇다고 협상을 안 하면 어쩌실 겁니까. 겨우 황군 5만으로 저들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계신 건 아니시겠지요?”
“…….”
“더군다나 남경은 결코 수비하기에 좋은 도시가 아닙니다. 만약 황군이 무너지고, 저들의 손에 황성이 점령되고 나면 협상 자체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아니, 협상은 고사하고 새로운 황조가 탄생할 수도 있음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참지정사 대인.”
“허허, 그 무슨 무도한 말을…….”
참다못한 참지정사가 버럭 언성을 높이기는 했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섭평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만약 반란군의 손에 황성이 점령당하게 되면, 그 뒷일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진회가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들 하시게.”
그는 섭평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다른 대안이 없는 듯 하군. 그래, 귀관이 생각하기에 반란군의 수뇌부와 접촉하기 위해 누굴 보냈으면 좋겠는가?”
진회의 말에 섭평이 냉큼 대답했다.
“소관이 의견을 낸 것인 만큼, 소관이 책임지겠습니다.”
진회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그것도 괜찮겠지. 그렇게 하게.”
진회는 섭평의 농간을 빤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섭평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더 이상 이 썩어빠진 제국을 억지로 끌고 나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을 뿐더러, 그 외에 다른 대안도 없었다. 반란군이 남경을 포위한 시점부터, 칼자루는 이미 섭평에게로 넘어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