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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짜고 치는 투전판이다 보니, 협상은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하지만 재상 일파가 반란군에게 지극히 유리한 협상안을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 그걸 잘 알고 있었던 섭평은, 협상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진회에게 가는 대신 곧바로 황제에게로 향했다.
“저들이 원하는 대로 해준다면, 남경 안에는 절대로 병사를 투입하지 않겠다는 확약을 받았사옵니다.”
반란군이 황권을 넘볼 생각은 전혀 없으며, 썩어빠진 관료들의 목만을 원한다는 섭평의 보고에 황제는 크게 만족했다. 아니, 만족하지 못했다고 해도 이미 황제에게는 협상안을 거부할 만한 힘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경의 협상 결과를 윤허하겠노라. 그들 또한 짐에 대한 충성심에서 거병한 것일 지니…….”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섭평이 중신들 간의 협의도 거치지 않은 채, 곧바로 황제의 윤허를 받아버렸기에 신하들은 크게 분노했다. 하지만 그들의 분노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부패한 관료들의 숙청을 반란군들이 직접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협상하러 나온 섭평에게 위임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면식도 없는 무식한 무부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겨야만 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게 된 것에 내심 안도했다. 어쨌건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문신(文臣)인 섭평이라면 공평하게 일을 처리해 줄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거기에는 섭평이 지금까지 쌓아놓은 원만한 인간관계도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바로 그날, 섭평은 부패한 관료들을 일소하는 전권을 황제로부터 위임받았다. 그리고 며칠 동안은 평온한 나날들이 흘러갔다. 섭평이 장악한 형부에서 여러 관리들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남경에 떠돌았다.
중신들은 혹여 자신도 숙청의 대상에 포함될까봐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형부에서 관리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그 대상의 대부분이 말단관료들이라는 점에 그들은 안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관들이 안도하는 반면, 백성들은 환호했다.
평생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든 중신들에 대한 원한보다, 직간접적으로 백성들을 통제하고 수탈했던 말단관리들에 대한 원한이 더 깊었던 것이다. 그러니 포박당해 끌려가는 말단관리들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속이 시원하지 않을 리 없었다.
시간이 제법 흘러 중신들이 차츰 마음을 놓을 무렵, 갑자기 재상 진회가 형부에 압송되어 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진회와 가깝게 지냈던 수백 명의 고관대작들도 한꺼번에 체포되었다. 그들 중에는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던 사람들도 많았기에 대신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찌 이럴 수가 있소? 재상께서 무슨 못된 짓을 하셨다고……?”
“허~, 아직 듣지 못하신 모양이구려. 글쎄 재상이 금나라와 내통을 하고 있었다지 뭡니까.”
“내통이라구요?”
“예. 그래서 북벌을 주장하던 악비 대장군을 황성으로 불러들여 참살해 버렸다고 하더군요.”
“허어~, 금나라의 대군이 호시탐탐 국경선을 넘보고 있는 와중에 왜 갑자기 군벌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죄를 뒤집어씌워 대장군을 죽여버렸는가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구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더니……. 허~ 참! 옛말이 하나도 그른 게 없구려.”
“그러게 말이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재상을 따르던 관료들도 무사하기는 힘들겠구려.”
“아마 그렇게 되지 싶소이다.”
말은 이렇게 하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알고 있었다. 권력을 거머쥔 섭평이 재상 일파를 숙청하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이유는 대세를 거스르다가는 자신의 안위 역시 보장받을 수 없다는 위기감에서였다.
또한 금나라와 내통했다는 반역 혐의가 붙었기에, 중신들은 진회의 구명운동을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몇몇 중신들이 진회의 구명을 하려고 목소리를 높였다가, 곧바로 반역 혐의에 연루되어 형부에 붙잡혀 들어가자 아예 입도 벙긋하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결국 며칠 지나지도 않아 진회와 그의 추종자들은 모두 다 목이 잘려 저잣거리에 효수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섭평은 절대적인 권력을 쥐게 되었다. 재상 진회마저 그의 손에 목이 날아갔는데, 누가 감히 그에게 대적할 수 있겠는가.
재상 진회의 머리가 저잣거리에 효수되던 바로 그날, 추밀사 섭평은 반란군 진영을 방문했다. 유광세와 여문덕 상장군은 약속을 지킨 섭평을 반갑게 맞이했다.
“내 귀관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오.”
“원통하게 돌아가신 대장군의 원혼도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추밀사 대인.”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도 막사 밖의 장졸들은 모두들 짐을 꾸리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장군의 복수를 마무리 지은 이상, 남경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섭평은 고개를 돌려 여문덕 상장군에게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병영의 분위기를 보니, 조만간 국경으로 회군하려는 듯 하구먼.”
“예, 추밀사 대인. 대인의 도움으로 대장군의 복수를 이루었으니, 이제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갑자기 이런 제의를 듣게 되어 당황스럽겠지만, 나를 좀 도와주지 않겠는가?”
두 상장군들은 섭평이 말하는 진의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지금까지 섭평이 원하는 대로 도와줬지 않은가? 더군다나 모든 일이 마무리된 이 시점에 자신들이 도와줄 일이 뭐가 있겠는가. 설마 이번에는 남경으로 병력을 밀어 넣어 달라는 것일까?
어리둥절해 하는 여문덕의 손을 덥썩 움켜잡으며 섭평이 말했다.
“조만간 나는 재상에 임명될 걸세. 그런데 문제는 나를 대신해서 추밀원을 맡아줄 만한 인재가 없다는 것이지. 부탁일세. 귀관이 추밀원을 좀 맡아주면 안되겠는가?”
자신을 후임으로 맞이하고 싶다는 얘기가 아닌가. 설마 섭평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신임하고 있었을 줄 몰랐기에 여문덕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장, 대인의 믿음에 보답하도록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나이다.”
“허헛, 나는 귀관이 거절하면 어쩌나 하고 노심초사 했었는데, 이렇게 시원하게 응해주어 기쁘기 한량이 없구먼. 우리 함께 강한 나라를 만들어 보세. 다시는 오랑캐 따위가 넘볼 수 없는 그런 강대한 나라를 말이야.”
그렇게 말한 후, 섭평은 이번에는 유광세 상장군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유광세 대장군.”
상장군인 자신을 섭평이 갑자기 대장군이라 부르자, 유광세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예?”
“조만간 황상께서 귀관에게 첩지를 내릴 걸세. 제국의 북방을 책임질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고 말이야.”
전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섭평의 말에 유광세 상장군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총사령관이라구요?”
“그래, 조만간 나는 황상께 주청을 올려 북벌을 단행할 생각일세. 나와 함께 악비 대장군의 못다 이룬 꿈을 이어나가지 않겠는가?”
작달막한 키의 섭평에 비해 유광세 상장군은 8척이 넘는 장신을 자랑하는 맹장이다. 마주 서있으면 어른과 아이처럼 덩치 차이가 났다. 하지만 유광세 상장군은 섭평의 덩치가 작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니, 마치 거인의 앞에라도 선 듯 압도되는 자신을 느꼈다. 유광세 상장군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외쳤다.
“대인의 꿈에 소장이 동참할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대인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허헛, 본인은 귀관이 죽는 걸 결코 원하지 않네.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게. 그리고 잃어버렸던 제국의 대지를 꼭 되찾아 주게.”
우직한 두 장수를 혓바닥으로 흐물흐물하게 녹여 놓은 뒤에야 섭평은 막사를 떠났다. 사실, 섭평이 제아무리 여우같이 교활하다고 해도, 유광세처럼 자신이 신뢰하지도 않는 인물에게 북방의 군권을 떠안길 생각을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자신을 무영문의 부문주라고 소개했던 매영인이라는 한 계집 덕분이었다.
“본관이 천하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상대의 능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꺼내본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코앞의 반란을 성공시키는 것만 해도 버거워하고 있었던 섭평의 눈이 번쩍 뜨이게 해줬다. 그녀는 반란이 성공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 것은, 반란이 성공한 뒤의 일이었다.
반란군의 양대 축인 유광세와 여문덕을 따로 떨어지게 만들려면, 그 두 사람에게 그럴듯한 직위를 안겨주는 게 최선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여문덕에게는 추밀사라는 허울뿐인 직책을 안겨줌으로서 그를 황성에 붙잡아 둘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대신들에게는 자신이 그만큼 반란군과 친밀한 사이임을 과시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사실상 제국의 군권을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유광세 상장군을, 대장군으로 승진시킨 뒤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라고 그녀는 제안했다.
그 말에 섭평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단호하게 외쳤다.
“그건 말도 안 돼! 지금도 도저히 대적하기 힘들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손에 쥐고 있는 자인데, 총사령관으로 삼으라니. 그렇게 해놓고 그 뒷감당을 어찌 하라는 말이더냐?”
그러자 매영인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강직한 장수입니다. 제대로 된 임무만 맡겨준다면 결코 딴생각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제대로 된 임무?”
“예. 그에게 북벌을 명하십시오.”
북벌이라는 말에 섭평은 무릎을 탁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그렇다. 단순무식한 그놈에게 대의명분이 확실한 먹이감만 던져준다면, 그자는 딴생각 안하고 그것에만 매달릴 게 분명했다.
“그가 북벌에 정신이 없는 동안, 지금까지 그의 터전이 되어왔던 양양성에서 무한에 이르는 방어선에 대인의 사람들을 집어넣으십시오.”
하지만 그때, 섭평의 뇌리에 최악의 상황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활짝 펴져있던 그의 안색이 급격히 흐려졌다.
“흐음, 그러다가 북벌이 성공하면 제2의 악비가 탄생하게 될 텐데, 그때는 어떻게 하지?”
섭평으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별것 아니라는 듯 쉽게 대답했다.
“호홋, 그런 사소한 일을 가지고 걱정하시다니……. 양양성에서부터 저 북방의 장성(長城)까지 얼마나 먼지 모르시옵니까? 연운18주까지 몽땅 다 수복하려면, 아마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전투를 벌여도 모자랄 것이옵니다. 아니, 어쩌면 그 전에 끝날지도 모르지요. 격전을 벌이던 와중에 그의 병사들이 다 소모되고 나면, 패전의 책임을 물어 목을 베어버리면 될 게 아니겠사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이 백번 옳았다. 놈에게는 총사령관의 직위를 줘서 끝없는 전쟁터로 내몰면 그만이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전사하겠지. 그리고 병사들과 떨어져 버린 여문덕은 언제든지 암살해 버릴 수 있지 않겠는가.
“흠, 좋은 계책이군. 하지만 너는 너무 먼 미래만을 본관에게 고하는구나.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본관에게 말이다.”
침울한 표정으로 섭평이 말하자, 매영인은 얼른 활달한 어조로 대꾸했다.
“조만간 대인께서는 천하를 쥐게 되실 것이니, 그런 사소한 것은 심려치 마시옵소서.”
“허허, 말이라도 고맙구나.”
그날 이후 섭평은 매영인을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반란이 이런 식으로 결말이 날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크흐흣, 그 계집을 만난 것은 정말 천운이었어.”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섭평은 갑자기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 계집은 왜 이렇게 소식이 없지? 진회를 처형했던 바로 그날 밤에 나를 다시 찾아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거참, 이해할 수가 없군.”
하지만 매영인은 섭평을 만날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저 머나먼 십만대산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니까.
여우와 너구리의 지략 대결
무영문 총단이 마교의 기습공격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급보는 최창 분타주를 통해 무림맹에 전해졌다. 이에 무림맹의 수뇌부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큰소리를 칠 만도 하군요.”
“지금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외다. 마교에게 무영문을 공격하는 것을 허락한 것은, 설마 그들이 그걸 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소.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지금이라도 무영문을 보호해야만 하오이다.”
“그건 그렇소이다만……. 하지만 보호하고 싶어도 뭘 알아야 보호할 게 아니오. 최창 분타주도 무영문의 총단이 공격당했다는 사실만 알려줬지, 그곳이 어딘지는 알려주지 않았소이다.”
무림맹의 장로들은 이 뜻밖의 사태에 급히 대책회의를 열었지만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공격을 당한 무영문의 총단이 어딘지를 알아야 뭘 도와주든, 지원군을 보내든 하지 않겠는가.
갑작스럽게 총단으로부터 무림맹 분타로 황색인장이 날아온 후 모든 연락이 두절되었다. 최창 분타주는 무림맹에 지원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분타주인 그조차도 총단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림맹 분타가 외부에 너무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외부와의 접촉이 잦아지면 그만큼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무림맹을 완벽하게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칫 무영문과 무림맹의 사이가 악화되었을 때 분타주가 포로로 잡히게 될 상황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고문에 장사는 없다. 또 고문이 아니더라도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약물이라던지, 정신을 굴복시키는 무공들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철저히 총단의 위치를 숨겨온 무영문의 비밀주의가 가장 큰 이유였다. 무영문의 문도라 하더라도 총단의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창 분타주가 무림맹에 도움을 청하고 싶어도, 청할 수가 없는 모순점이 드러난 것이다.
“설사 총단의 위치를 안다고 해도, 대체 어떤 명분으로 그들을 돕겠다는 말이오? 우리는 이미 저들에게 무영문에 대한 공격을 허락했다는 것을 벌써 잊으신 게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무림맹이 무사들을 동원한다고 해서 마교가 순순히 물러날 리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자칫하면 또 다른 분쟁의 시작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닙니까?”
“일단은 습격을 받았다는 총단 위치부터 찾는 게 먼저인 듯 싶소이다.”
“찾고 난 다음에는 어쩌실 요량이십니까?”
“무사들을 파견해 마교의 대응을 살피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물론, 마교와의 충돌은 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으로 하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