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0화 (676/930)

* * *

묵향의 생각과 달리 무영문과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해결책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게 되려 묵향의 골치를 아프게 했다.

묵향이 무사들을 이끌고 십만대산으로 돌아오자, 설민이 급하게 달려 나왔다.

“무영문의 부문주가 교주님을 뵙기를 청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뭣! 영인이가 이곳에 와 있다고?”

“예, 교주님.”

설민의 말을 옆에서 함께 들은 한중평 장로가 반색하며 외쳤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군요. 이건 기회입니다, 교주님!”

한중평 장로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뻔한 것이었다. 하지만 묵향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심약한 설민이었기에 상대방의 감정 변화를 살피는데 있어서는 꽤나 예민했다. 급격히 어두워진 교주의 표정을 보자 뭔가 일이 있다는 걸 느끼고는 한중평 장로에게 슬쩍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십니까? 한 장로님.”

한중평 장로는 십만대산으로 돌아오기 전에 교주와 협의했던 계책에 대해서 설민에게 설명해줬다. 그 계책을 생각해 낸 게 자신이었기에, 그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 했다.

교주가 그의 계책에 찬성했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그 계책을 써먹기 위한 상대로 매영인은 적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매영인은 교주가 꽤나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모질지 못한 교주의 성격상, 이대로 한 장로의 계책을 밀어붙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설민이었기에 급히 입을 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생각해 보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군사.”

노회하기 짝이 없는 장로들은 모두 다 설민을 밥으로 보고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이곳은 교주의 앞이었다. 공식 서열상 자신보다 윗줄에 놓여있는 설민에게 반말을 할 수는 없었다.

“뼈대만 대충 잡혀있는 계책이잖습니까. 그러니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세심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전까지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사료되는군요. 일단, 무영문의 부문주에 대한 건은 교주님께서 그분과 만나보신 후, 그쪽에서 원하는 것을 들어본 다음에 결정하는 게 순서일 듯 합니다.”

“흠…, 군사의 말이 옳은 듯 하구먼.”

하지만 설민이 주위의 눈치를 슬쩍 보니 부교주나 다른 장로들은 그 말에 납득을 하는 기세가 아니었다. 교주의 체통을 운운하며 반대를 했음에도, 오히려 면박에 가까운 비웃음을 당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런 면박을 준 사람이 바로 교주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좋은 기회가 제 발로 찾아왔는데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말인가. 그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더군다나 교주에게 망신을 당한 철영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설민이 조금 더 빨랐다. 그는 철영 부교주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급히 묵향에게 말을 건넸던 것이다.

“주모(主母)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문주에 관한 얘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시고, 먼저 주모님부터 만나시는 게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신혼인 교주가 마교를 비운 채 몇 달씩이나 밖에 있다가 모처럼 돌아왔다. 그래서 우선 신부를 만나러 가는 게 좋겠다고 군사가 조언하는데, 그걸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도 급히 교주에게 찬성의 뜻을 비쳤다.

“군사의 말이 옳습니다. 주모님께서 교주님이 돌아오시기를 얼마나 기다리고 계셨겠습니까.”

묵향은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왠지 부하들한테 자신의 속내를 보이는 듯해 민망했던 것이다.

“그…, 그럴까?”

3가지 조건

“다녀왔어.”

쑥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는 묵향을 향해 마화는 활짝 웃으며 반겼다.

“잘 다녀오셨어요?”

“미안해. 예상보다 좀 오래 걸렸어.”

원래 무뚝뚝한 성격의 묵향인 만큼,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쪽은 언제나 마화였다. 마화는 묵향이 자리에 앉자마자 옆에 달라붙어서 그동안 교내에서 있었던 자잘한 얘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건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닌, 마치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돌아온 낭군에게 하는 듯한 그런 편안함이었다.

어디서 그 많은 이야기들을 주워들었는지 마화는 쉴 새 없이 조잘거렸고, 묵향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미소로서 받아들였다.

“그런데 참, 저 영인이하고 만났어요. 그 왜 있잖아요? 지금은 무영문의 부문주가 되어있는 아이 말이에요.”

매영인은 현재 묵향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고 있는 당사자였다. 물론 마화와 대화의 주제로 삼고 싶지 않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녀가 여자라는 것도 한 가지 이유이기도 했고.

그래서 묵향은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듯 슬쩍 받아넘겼다.

“그랬어?”

“어머, 반응이 왜 그래요? 제가 보기엔 정말 미인이던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꺼내는지 알 수가 없었던 묵향이었기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글쎄……?”

“이제는 제법 나이를 먹었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예쁜지 모르겠어요. 몸매도 좋고, 피부도 깨끗한 걸 보면 세상은 참 불공평해.”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말도 안 된다며 따지고 들었을 정도로 마화 역시 상당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마화조차 가벼운 질투를 느끼게 할 정도로 매영인의 미모는 탁월했다. 무림에 소속된 수많은 여고수들 중에서 그 미모와 재능이 특출난 4봉 중 한 명으로 꼽힐 만큼 말이다.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무영문을 살려보겠다며 단신으로 이곳까지 달려온 걸 보니, 좀 안되어 보여서요. 어떻게 좋은 방향으로…….”

하지만 그녀의 말은 묵향의 무뚝뚝한 말투에 가로막혔다.

“그건 당신이 참견할 사안이 아니야.”

묵향이 이렇게 단호하게 말할 때는, 이미 무영문을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이 난 상태이리라. 이럴 때 누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한 번 결정한 것을 번복하는 사람이 아님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화는 황급히 화제를 바꿨다.

“그건 그렇죠. 참, 당신 아직 식사를 안 하셨죠?”

* * *

오랜만에 다정하게 잠자리를 함께 한 두 사람. 마화는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하지만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 것은, 눈을 떴을 때 남편이 곁에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인지 언제나처럼 그녀의 옆자리는 온기 한 점 없이 싸늘하기만 했다.

“쳇! 좀 옆에 누워있어 주면 누가 잡아먹나? 달콤한 말로 사랑을 속삭여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누워만 있어 달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힘드나?”

입으로는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잠자리를 정돈하는 마화의 손길은 재빨랐다. 깔끔하게 잠자리 정돈을 끝낸 뒤, 가볍게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이미 반복 숙달이 되다 보니 예전처럼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지도 않았다.

밖으로 나가보니, 묵향은 아침 식사를 앞에 두고 마화가 일어나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잘 잤어?”

부드러운 묵향의 목소리에 마화는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 활짝 웃으며 조잘거렸다.

“예. 기다리지 마시고, 그냥 절 깨우시지 그러셨어요?”

“곤히 자고 있는 걸 왜 깨워. 난 괜찮으니까 자, 이리와 앉아.”

지존의 아침식사였지만, 음식은 매우 간소했다. 마교라는 단체 자체가 허례허식에 물들어 있는 곳이 아니었던 데다, 묵향 자신이 그런 걸 별로 따지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화와 결혼을 하고 난 뒤, 예전에 비해 음식의 질과 양이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식사를 마친 마화는 차를 마시며, 왠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뒤 질문을 툭 던졌다.

“당신은 아들이 좋아요? 아니면 딸이 좋아요?”

“푸우~!”

마화의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느긋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던 묵향은 입안의 내용물을 내뿜고 말았다. 묵향은 빠르게 마화의 배 쪽을 살펴보며 급하게 물었다.

“서, 설마 아기를 가졌다는 거야?”

당황스러워 하는 듯한 묵향의 반응에 마화의 표정이 일순 새침하게 바뀌었다.

“설마, 우리들의 아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겠죠?”

“무, 물론 아니지. 그냥 당황했을 뿐이야.”

묵향은 힐끔 마화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임신한 게 확실해?”

처음 질문을 던졌을 때의 따사롭던 마화의 표정이 언제부터인가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아니, 어쩌면 냉기가 풀풀 날리는 싸늘함보다, 서러워 보인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아뇨,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아, 그래?”

왠지 안심했다는 듯한 묵향의 표정이 마화의 기분을 더욱 언짢게 만들었다. 그럴 리는 없다. 양녀인 소연을 그렇게 살뜰하게 아끼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 온 마화였지 않은가. 그렇다면 임신을 했느냐며 왜 저렇게까지 깜짝 놀라는 것일까? 혹시 자신과의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건가? 그것도 아닐 것이다. 묵향의 성격상 싫어하는 여인과 억지로 결혼했을 리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대체 이유가 뭘까?

“아기를 싫어해요?”

“글쎄…, 싫어하고 자시고는 없어. 단지 내 자식이 태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살아왔기에 조금 당황했을 뿐이야.”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생각을 해보도록 하세요. 당신은 이제 독신이 아니라구요.”

“그렇게 하지.”

대답은 쉽게 했지만, 묵향의 표정은 그다지 밝아지지 않았다.

내 피를 이어받은 아기? 물론 예전에 소연이를 키웠던 경험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웬만큼 자란 소녀였을 때였고, 자신이 소연이를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다르다. 뱃속에서 태어나는 자식을 선택할 권한 따위는 없다. 그냥 태어나는 대로 사랑하며, 키워줘야만 한다. 그 자식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아르티어스는 정말 대단한 아버지라고 할 수 있었다. 종(種)을 초월해서 자신을 사랑해 줬지 않은가. 자신이 별로 살갑게 대해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변함없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쏟아 부어 주었으니…….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행방이 묘연해진 아르티어스가 은근히 보고 싶었다. 드래곤인 만큼 무슨 큰일이야 있겠느냐 싶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오래 아무런 소식이 없다 보니 슬슬 걱정이 되는 것이다.

‘다음에 만나면 제발 한 달에 한 번은 꼭 연락을 하며 살자고 얘기를 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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