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2화 (678/930)

* * *

“교주님을 뵈옵니다.”

“손님은 안에 계시나?”

“옛, 교주님.”

갑작스럽게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매영인이 당황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묵향이 들어왔다. 그녀가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묵향은 꽤나 난감한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본좌가 없는 동안에 큰 곤욕을 치렀다고 들었는데……?”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뵙습니다, 교주님.”

“아, 그래. 오랜만이야.”

묵향은 매영인의 위아래를 이리저리 쳐다본 후에야 겨우 안심이 된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군.”

매영인은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염려를 해주신 덕분에 별 일은 없었어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런 침묵이 싫었던지 묵향이 급작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본좌가 무영문을 쳤다는 얘기는 들었느냐?”

“예.”

묵향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혼자 이곳으로 올 생각을 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구나. 죽고 싶어서 작정을 한 것도 아니고…….”

“정말 저희 문파를 멸망할 때까지 공격을 하실 생각이신가요?”

“글쎄…, 어디로 숨었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니 공격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긴 하지.”

“그럼 위치를 파악하기만 하면 공격하실 건가요?”

묵향은 일부러 한숨을 푹 내쉰 다음 대답했다.

“후우~~, 어떻게 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 이번처럼 무리를 해서 공격한다고 해봐야 별 소득도 없을게 뻔하니까 말이야. 아마, 더 이상의 전투는 없을 거야. 정파놈들처럼 그냥 평행선을 달려가는 정도로 그치게 되겠지.”

묵향의 대답에 매영인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무영문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의사는 없는 듯 보였으니까.

“어쨌건, 본좌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이 정도로구나.”

그러자 매영인은 간절한 소망을 담아 묵향에게 청했다.

“혹시 할머니를 용서해 주실 수는 없으신가요?”

묵향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용서? 용서고 뭐고, 이제는 갈 데까지 가버린 상태라 원상태로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야.”

“그, 그래도…….”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보지.”

“예, 말씀하세요.”

“본좌는 신뢰를 가지고 대했건만, 옥화무제는 본좌의 뒤통수를 스스럼없이 쳤지. 그것도 본좌가 가장 취약한 때를 노려서 말이야. 하마터면 본좌는 물론이고, 내 수하들까지 떼몰살을 당할 뻔 했지. 그런데, 그런 그녀를 용서해 주라고? 너는 대체 뭘 믿고 나한테 그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는 거지?”

일순 매영인은 할 말을 잊었다. 그녀도 마화를 만나 모든 얘기를 들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영문이, 아니 자신의 할머니인 옥화무제가 어떤 짓을 했는지 말이다. 잠시 어색한 표정으로 고심을 하던 매영인이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인질이 되어 이곳에 머물겠어요. 그럼 저희 문파가 또 다시 교주님께 허튼 짓을 하지 못할 테니까요.”

설마 이런 말까지 듣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묵향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한참동안을 고심하던 묵향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휴우,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그런데 네가 옥화무제라면, 지금 내가 화평을 제의한다고 해서 순순히 받아들일 거 같으냐?”

“…….”

일순, 매영인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둔한 사람이 아니다. 묵향의 질문을 받고 보니, 할머니의 의심 많은 성격이 떠올랐던 것이다. 뭔가 확실한 이유가 있지 않은 한, 할머니는 묵향이 화평을 제의했다는 것 자체를 함정으로 볼 게 뻔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점에서 마교가 화평을 제의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매영인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건 제가 어떻게든 할머니를 설득해 볼게요. 저를 한 번만 믿어주세요.”

애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매영인의 모습에, 묵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설민이 마련해준 해결책을 말해줬다.

“정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조건을 제시하마.”

“예. 말씀하세요.”

“행방불명되신 만통음제 형님을 찾아오너라. 만약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말이다.”

원래는 설민이 조언한 대로 이 한 마디만 하고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왕지사 일을 시켜먹을 생각이면 철저히 시켜먹는 게 좋겠다는 묵향이었다.

“두 번째는…, 이게 무슨 뜻인지 번역해 오너라.”

묵향은 요 근래 언제나 품속에 지니고 있던 비단조각을 꺼냈다. 그 비단에는 북명신공에서 옮겨 적은 해독불가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밑져봐야 본전인 만큼,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고 그녀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좌의 아버지를 찾아오면 된다.”

묵향으로부터 받은 비단조각에 써진 괴상한 기호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매영인. 물론 여기에 적혀있는 문장은 무영문에서 이미 해독이 끝난 상태였지만, 그녀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매영인은 어떻게든 묵향이 제시한 조건을 완수하고 싶었다. 그래야 자신의 무영문이 무사할 수 있을 테니까.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요.”

“말해보거라.”

“우선, 행방이 묘연하다는 그 두 분 말이에요. 어디에 계신지만 알려드리면 되는 건가요? 아니면, 십만대산까지 모시고 와야 한다는 건가요?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두 분께서 자의적으로 모습을 감추신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사실, 만통음제 같은 분이 이리로 안 오시겠다고 버티신다면, 저희들로서는 어떻게 할 방도가 없는 게 사실이거든요.”

“일리가 있는 말이군. 그럼 조건을 바꾸기로 하지. 그 두 사람의 행방만 알려줘도 무방하다. 이러면 되겠느냐?”

“예. 그리고 이 비단에 써져있는 문장이 교주님께서 본문에 조건으로 내걸 정도라면 해독하기가 결코 쉽지만은 않으리라 생각되네요. 그러니 알고 계신 것을 뭐라도 말씀해 주신다면 커다란 도움이 되겠어요.”

매영인의 요청에 묵향은 망설임 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다 얘기해줬다.

“이 문장은 북명신공이라는 비급에 적혀있던 것이야. 그런 만큼 어쩌면 발해의 옛 문자일지도 모른다는 게 본좌의 생각이다.”

북명신공(北溟神功).

과거 사람들이 천하제일고수로 첫손가락에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신검대협(神劍大俠) 구휘(區揮)가 남긴 희대의 무공비급이었다. 당연히 매영인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북명…, 신공이 여기에 있었나요?”

“비급의 내용까지 네게 알려줄 수는 없다. 본좌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다. 어떠냐, 이 정도면 도움이 되겠느냐?”

“예, 교주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희대의 보물인 북명신공이 마교에 있다는 것을 밝혔다는 것만으로도 매영인은 묵향이 제시한 조건이 정말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3가지 조건만 해결할 수 있다면, 무영문은 예전처럼 마교와 친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그리고 묵향하고도…….

다시 시작된 옥화무제의 탐욕

십만대산을 나선 매영인은 남경으로 달려갔다. 남경분타에 있는 문주 즉,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서 교주와의 협상 결과를 알릴 생각에 그녀의 머릿속은 가득 차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할머니에게 직접 소식을 전했으면 좋겠지만, 지금의 그녀로서는 할머니는 물론이고 어머니조차 어디에 잠적해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상태다. 그녀가 남경으로 달려가는 이유는 자신이 십만대산으로 갔다는 것을 잘 아는 자신의 어머니가 먼저 접촉해 올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몸에 밴 습관대로 매영인은 혹, 누군가 자신의 뒤를 미행하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며 객잔으로 들어갔다.

매영인의 미모에 점소이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점소이를 향해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깨끗한 방 하나 주세요.”

“어, 어떤 방을 드릴깝쇼?”

점소이는 객잔에 남아있는 방들의 형태와 그에 따른 가격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더듬더듬 끊기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미모의 여성과 말을 하려고 하다 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매화방으로 주세요.”

손님이 그 중에서 가장 비싼 방으로 안내해 달라고 하자, 점소이는 고개가 땅에 닿을 정도로 굽신댔다.

“이, 이쪽으로 오십시오, 손님.”

매영인은 그 객잔에서 잠을 잤지만 식사는 아침만 그곳에서 먹고, 점심과 저녁은 밖에 나가서 해결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고는 있었지만, 딱히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애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매영인은 자신의 모습을 노출시켜, 무영문쪽에서 찾아오기를 바랬던 것이다.

무영문과의 접촉은 5일 만에 이뤄졌다. 5일째 되던 날 밤, 그녀의 방으로 자그마한 암기 한 개가 날아와 박혔다. 암기에 새겨져 있는 섬세하고 독특한 문양. 그것은 분타주급 이상의 무영문도들만이 지니는 것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매영인은 흑록색의 야행복으로 갈아입었다. 두건까지 써 두 눈동자만을 드러낸 얼굴. 그녀는 혹시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인물이 있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본 다음,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곧이어 그녀의 몸은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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