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백산의 괴인
옥화무제는 수하들을 거느리고 단숨에 장백산이 있는 요동까지 달려갔다. 그녀는 장백산 인근에서 그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던 고정 첩자 셋과 접선했다. 그 세 명은 총관이 섭외한 인물들로, 셋 다 장백산 인근에서 사용되는 토착어에 능했다.
옥화무제는 그들을 데리고 장백산에 숨어 살고 있는 비밀문파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하지만 고생한 것에 비해 얻은 소득은 거의 없었다. 그저 장백산에 신선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는 것 말고는.
그러던 어느 날, 진척없는 수색 작업에 지친 옥화무제가 차라리 직접 장백산에 올라 부딪쳐볼까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요즘 백두산(白頭山)의 신선에 대해 수소문하며 다니고 있는 자가 바로 자네인가?』
등 뒤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 꽤나 매력적인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옥화무제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화경에 오른 자신이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목소리가 들려온 지금까지도. 과연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는지, 아니면 목소리만 그렇게 들리도록 유도한 것인지 알 수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상대는 그녀보다 월등한 고수라는 사실 말이다.
옥화무제는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그곳에는 신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단아한 인상의 사내가 서 있었다. 중원의 것과는 색다른 이국적인 복색, 더군다나 말도 이곳 토착민들이 사용하는 언어다.
그녀는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부터 건넸다.
“저는 무영문이라는 작은 문파를 이끌고 있는 매향옥이라고 합니다, 대인.”
서로 말이 통하지는 않겠지만, 상큼한 미소와 정중한 인사만으로도 그녀가 원하는 게 싸움 따위는 아니라는 것을 사내가 눈치 챘으리라. 아니,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안 그러면 자신은 말도 꺼내보지 못한 채 목이 날아가야 할 테니까.
“저는 이곳 토착어를 알지 못합니다. 통역사를 불러도 괜찮을런지요?”
사내는 옥화무제의 말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밖에 대기하고 있던 통역을 맡고 있는 수하를 부르는 것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마도 그녀가 하는 그 어떤 행동도, 자신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그녀의 응대에 통역을 맡고 있는 수하가 들어왔다. 그는 방에 옥화무제 외에도 이방인이 한 명 서 있는 것을 보고 흠칫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옥화무제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조아렸다.
“찾으셨습니까? 태상문주님.”
“저분과의 통역을 부탁해요. 최대한 공경을 다하도록 하세요.”
“명심하겠습니다.”
통역사가 준비되자 그녀는 사내를 향해 말했다.
“귀인께서 이곳에 계시다는 소문을 저 멀리 중원에서 듣고, 흠모하는 마음에 잠시라도 뵙는 영광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불원천리하고 찾아왔습니다.”
여인이 하는 말을 통역사가 발해어로 통역하여 전해주는 것을 듣고, 사내는 생각을 바꿔먹었다. 계속 자신을 귀찮게 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생각이었지만, 그렇지 않다면 적당히 대화를 나눠보고 내쫓는 것으로…….
『꽤나 말을 잘하는 여아로구나.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소문을 듣고 알았다고? 혹, 일전에 이곳을 서성이던 녀석들과 한패더냐?』
“그들은 제 수하들이었사온데, 혹여 대인께 무슨 실례라도 범했습니까?”
그러자 사내는 냉정한 어조로 대꾸했다.
『되놈 주제에 나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다닌 것 하나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고 봐야겠지.』
통역사가 말한 되놈, 그것은 이곳의 토착민들이 중원인을 낮춰 부르는 표현이라고 했다. 북명신공을 이어받은 후인들이 어쩌면 중원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대놓고 되놈이라고 칭할 줄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녀다.
원래 옥화무제는 북명신공을 전수받을 수 있는지, 그게 안 되더라도 최소한 자신들과 손을 잡을 수 있는지를 타진해 보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사내의 말투로 미뤄보아, 지금은 그런 말을 꺼낼 단계가 아님이 확실했다. 지금은 저 무뚝뚝한 성격의 사내와 신뢰관계를 쌓아나가야 할 때였다. 그녀가 원하던 것들은 그 이후에나 가능하리라.
그 전에는 잘 몰랐는데, 되놈 어쩌구 할 때 발해인의 표정이 너무나 섬뜩하여 소름까지 쭉 끼친 옥화무제였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고수치고는 감정의 기복이 너무 심하다고 할까? 중원에서는 ‘소살(笑殺)’이라고 하여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불시에 손을 쓰는 사람을 가장 까다로운 상대로 생각했다. 그만큼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리라. 물론, 옥화무제처럼 손꼽히는 고수들의 경우 그런 얄팍한 수단 따위는 쓸 필요 없이 자신의 감정을 다 드러냈다.
하지만 발해인은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
그걸 느낀 순간 옥화무제의 마음속에는 요란한 경종이 울려 퍼졌다. 오랫동안 말을 섞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상대다. 이런 상대의 경우, 요점만 간단히 얘기를 나누면서, 최대한 이쪽의 인상을 좋게 유지시키는 게 중요했다.
옥화무제는 사내를 향해 표정을 최대한 온화하면서도 밝게 꾸미려고 애쓰며 말을 걸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대인께 한 가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뭐냐?』
“대인께서 북명신공과 관련이 있으신지, 그것을 묻고 싶었습니다.”
사내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북명신공? 글쎄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로구나.』
“북명신공은 중원에서 천하제일대협으로 추앙받았던 구휘라는 고수가 요동지역을 떠돌며 그 지역에서 찾아낸 발해의 무공이라고 들었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대략 12가지 정도의 무공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하나같이 상승의 무공이라고…….”
옥화무제는 여기에서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사내가 북명신공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12가지의 무공이라는 말에 온화하던 사내의 눈빛이 마치 불이라도 뿜듯 무섭게 번쩍였던 것이다.
『허어~, 발해의 후예들에게 이어지기를 간절히 원하며 안배해 뒀던 것이건만, 그걸 되놈이 도둑질해 가다니…….』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하는 발해인. 감정의 기복만으로 봤을 때는 전혀 고인(高人)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가 화를 내자 옥화무제는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감정을 드러낼 때마다 그에게서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망연자실 잠시 말없이 서있던 사내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에서 진득한 살기가 느껴졌다. 마치 손에 잡힐 듯 그런 끈적끈적하기 그지없는 짙은 살기가.
『그걸 북명신공이라고 부른다고?』
“예.”
『내 노력을 헛되게 만든, 그 구휘라는 놈이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혹시 알고 있느냐?』
대화의 방향이 자신이 원하는 것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옥화무제로서는 사내의 질문에 즉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경의 그녀로서도 감당하기 힘들 만큼, 사내가 일으키는 위압감과 살기가 엄청났던 것이다.
“오래 전에 행방불명되었습니다, 대인.”
『행방불명되었다고? 그자가 행방불명된 것이 언제쯤이더냐.』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인.”
옥화무제의 대답에 사내는 한동안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러던 그는 잠시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따라서 옥화무제의 시선도 그 검쪽으로 쏠렸다.
뭘 생각하는지 살기등등하던 사내의 기세가 순식간에 차갑게 굳는 것을 느끼며, 옥화무제는 저 검에 뭔가 사연이 있음을 직감했다. 구휘에 대한 얘기를 하던 도중이었던 만큼, 저 검이 혹시 구휘의 것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저 검으로 구휘를 벴다는 것일까? 전해지기로는 구휘가 만년에 사용했던 검은 10대 기병 중 서열 1위에 꼽히던 흑묵검(黑墨劍)이다.
사내의 허리에 걸려있는 검을 바라보는 옥화무제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검신을 직접 보기 전에는 저 검이 흑묵검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검집에 새겨진 아름다우면서도 고상한 문양만 봐도 범상치 않은 장인이 제작했음에 틀림없다. 당연히 그 속에 감춰져 있을 검신 또한 범상한 물건은 아니리라.
‘저게 흑묵검일까? 아닐까?’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그녀의 귀에 사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혹, 구휘라는 자 말고, 북명신공을 익힌 자가 또 있느냐?』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현재 마교의 교주가 그것을 익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북명신공이 기록된 비급을 마교가 가지고 있다고 들었으니까요.”
『호오, 비급이 존재한다는 말이지? 그 비급이란 것도 구휘라는 녀석이 만든 것이겠구나.』
“예, 대인.”
『비급이 존재한다면, 더 많은 인물이 그 무공을 익혔을 수도 있겠구먼.』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북명신공은 오로지 교주만이 익힐 수 있다고 들었으니까요.”
잠시 말없이 서 있던 사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을 이리로 데리고 오너라. 북명신공이라는 비급과 함께.』
사내의 말에 옥화무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교주가 뉘 집 똥개도 아니고, 오란다고 올 사람인가. 게다가 마교의 보물이라는 비급까지 가지고 말이다. 또한 자신 역시 무영문의 태상문주였다. 그런데 자신을 언제 봤다고, 저런 시건방진 명령을 내린다는 말인가.
하지만 옥화무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감추며 입을 열었다. 오랜 세월 무림에서 쌓아온 그녀의 직감에 사내의 말에 반했다가는 위험해질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송구한 말씀이지만, 그는 현재 중원제일의 고수입니다. 저로서는 그를 이리로 데리고 올 능력이 없습니다, 대인.”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놈을 이리로 데리고 와야 할 게다. 안 그러면 네가 죽을 테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사내. 하지만 그 말 속에 숨어있는 엄청난 살기에 옥화무제의 안색이 일순 창백하게 질렸다.
“예? 그, 그건 무슨 말씀…….”
하지만 그녀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사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녀를 덮쳐왔기 때문이다.
휘휘휙!
그녀는 황급히 사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건 아예 불가능했다. 상대가 너무나도 빨랐던 것이다.
퍽퍽퍽퍽!
몸의 몇 군데에선가 강한 압력이 느껴진다. 옥화무제가 소스라치게 놀라 내력을 운용해 봤더니, 심장을 중심으로 몇 군데의 혈에서 강한 이질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어느 샌가 원래 자리로 되돌아간 사내가 무감정한 어조로 말했다.
『네 몸에 두 달의 시간을 새겼다. 그 사이에 이리로 놈을 데리고 온다면 금제(禁制)를 해제해 주마. 하지만 내 말을 어기고 돌아오지 않는다거나, 시간이 지체된다면 너는 심장이 터져 죽게 될 것이니라.』
다짜고짜 손을 쓰고는 저런 말도 안 되는 주문을 하다니, 이건 교주보다 더한 놈이었다. 저런 놈을 회유해 보겠다고 불원천리 이곳까지 달려온 자신이 너무나도 멍청하게 느껴지는 옥화무제였다.
“두, 두 달은 너무 짧습니다, 대인.”
하지만 사내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단호하고 차디차기만 했다.
『잊지 마라. 두 달이다. 두 달 내로 백두산 정상으로 오너라.』
그 말을 끝으로 사내는 창밖으로 날아오르더니,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순간에 긴장이 풀려버린 그녀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바탕 악몽을 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몇몇 혈도에서 느껴지는 강한 이질감이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더 이상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급히 가부좌를 틀며 수하에게 명령했다.
“호법을 부탁해요.”
“예, 태상문주님.”
지금은 저 망할 발해놈의 행방을 찾는다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옥화무제는 운기조식을 통해 상대방의 금제를 해제해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혈도에 자리잡고 있는 상대방의 내공은 너무나도 강력하고 오묘해서, 그녀로서는 도저히 해소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금제를 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옥화무제는 허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주와 같이 엄청난 실력을 가진 인물이 여기에 있을 줄이야.’
화경에 오르면 더 이상 적이 없을 줄 알았다. 비록 문파의 힘은 약하더라도, 일대일로 그녀를 핍박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그녀의 기대는 무참히도 꺾였다. 세상에 이렇게 손쉽게 그녀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칠 인물이 있을 줄이야. 옥화무제는 참담한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운기조식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있었던 옥화무제가 힘없이 일어섰다.
“중원으로 돌아가야겠어.”
힘을 얻으려고 온 길이었지만, 오히려 목숨만 날리게 생겼다. 살고 싶다면 교주를 이리로 끌고 오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것도 2개월 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