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무영문으로부터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교주님.”
설민이 건네주는 봉서를 받아들며 묵향은 희희낙락했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응답이 왔기 때문이다.
“오오, 굉장히 빠르군. 과연 무영문이야. 처음부터 이 일을 무영문에 부탁했어야 했는데…….”
두툼한 봉서를 개봉하니, 묵향이 매영인에게 제시했던 3가지 조건들 중 만통음제와 아르티어스의 수색 작업에 관한 진행 상황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봉서의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는 글은 놀랍게도 옥화무제가 묵향과의 대면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2번째 조건에 대한 단서를 잡았는데, 그걸 알고 싶다면 북명신공이 기록되어 있는 비급을 지참하고 나오라며 말이다.
‘이게 미쳤나?’
자신하고 만나는 바로 그날이 제삿날이 될 것을 뻔히 알 텐데, 이따위 주문을 해오다니. 간덩이가 커진 건지, 아니면 총단이 박살난 것 때문에 영활하던 그녀의 머리통이 살짝 맛이 가버린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설민은 묵향이 건네주는 봉서 안의 내용을 황급히 읽었다. 일단 뭔 내용인지 알아야 교주의 물음에 제대로 된 조언을 해줄 수 있을 테니까.
“혹, 함정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설민의 말에 묵향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흥! 함정? 자네 제법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무영문이 전력을 다 기울인다 해서 본좌의 옷깃 하나 건드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 그건 그렇지만 아무래도 조심을 하시는 게…….”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슬쩍 눈쌀을 찌푸리던 묵향이 다시 물었다.
“하여튼 자네는 이게 함정이라고 생각한다, 이거지?”
“만약 그게 아니라면 저쪽에서 뭔가 확실한 열쇠를 쥔 게 틀림없다고 사료됩니다, 교주님.”
의외의 대답에 묵향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물었다.
“열쇠라고?”
“예. 교주님의 앞에 나선다고 하더라도 목이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확실한 자신감을 그분에게 안겨준 뭔가가 있다는 말이지요.”
“호오, 그게 바로 열쇠라는 말이로군.”
설민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교주님.”
묵향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글쎄, 그런 게 있을 수가 있을까? 내가 만약 듣고자 하는 대답을 다 듣고 난 뒤 약속을 지키고 않고, 그대로 그녀의 목을 뎅겅 잘라버릴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속하의 말은, 교주님께 2번째 조건에 대한 대답을 드린 후에도 목이 안 잘릴 자신이 있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흠, 과연 그런 게 있을 수가 있을까?”
묵향은 한동안 이리저리 머리를 쥐어짜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모든 열쇠는 북명신공 비급 서문에 적혀있던 발해어가 쥐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건 어딘가에 보물이 묻혀있다는 것 같은 그런 간단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만약 그런 거였다면 그녀가 벌써 꿀꺽해 버렸지, 구태여 자신에게 알려주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북명신공의 원본이 보관되어 있는 위치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군.’
한참을 고심하던 묵향은 설민에게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잠시 다녀와야겠어.”
“만나실 생각이십니까?”
“대답을 들으려면 그럴 수밖에. 일단 여우의 말을 들어보고 나서, 결정하는 게 빠르겠어. 목을 칠건지, 아니면 그쪽의 제안을 들어줄 건지…….”
* * *
묵향이 약속 장소로 나가보니, 놀랍게도 그곳에는 옥화무제 혼자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녀가 앉아있는 탁자 위에는 맛있어 보이는 안주 3접시와 술병이 하나 놓여 있었다. 자신을 만나기에 앞서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니, 지금까지 이런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묵향이다. 어쩌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술을 한잔 하고 싶었던 것일까?
묵향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그녀의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점소이 한 놈이 쪼르르 달려와, 그의 앞에 수저와 술잔을 놓으며 주문을 더 하시겠느냐고 물었다.
“됐어.”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묵향을 향해, 옥화무제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이네요.”
할망구라고 불릴 나이임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그 사실이 얼토당토않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아직 앳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새하얗고도 긴 목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목을 바라보는 순간, 묵향은 문득 심한 갈증을 느꼈다. 군침을 꿀꺽 삼키는 묵향. 불문곡직하고 저 목을 그대로 비틀어 버리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만큼 그녀에게 호되게 당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인사조차 안 받아 주는 건가요?”
옥화무제의 가벼운 질책에 묵향은 그제야 겨우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아, 정말 반갑군. 총단에 쳐들어갔을 때 만났으면, 더 반가웠을 텐데…….”
삐딱한 묵향의 대답에 옥화무제는 새침한 어조로 대꾸했다.
“흥! 뚫린 입이라고…, 허세는.”
“본좌가 무영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뻔히 알 텐데, 그쪽에서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하다니. 솔직히 이번만큼은 그대의 배포에 놀랐다고나 할까?”
“걱정하지 말아요. 죽으려고 온 건 절대로 아니니까요.”
“호오, 그래? 그럼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일단 본좌에게 북명신공을 가지고 오라 한 이유부터 듣고 싶구먼.”
이때, 옥화무제는 교주에게 자신의 혈도에 심어져 있는 발해인의 내공을 해소할 수 있을지 물어볼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그 유혹을 억눌렀다. 상대는 구휘를 죽였을지도 모르는 인물이다. 교주가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고 하지만, 절대로 그를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그녀는 판단했다.
어쨌거나 자신이 살려면, 교주를 그가 있는 곳으로 끌고 가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혈도 얘기를 꺼낸다면, 교주가 아무리 둔감하다고 해도 의심할 게 뻔했다. 그녀로서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일부러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가 그렇게 급해요? 그나저나 검이 바뀌었군요. 전에는 짤막한 걸 차고 다니더니…….”
“아, 어찌 하다 보니 부서져서 이걸로 바꿨지. 피차 바쁜 사이니까, 쓸데없는 잡담으로 시간 낭비는 하지 말자고.”
“아차, 그러고 보니 십만대산에는 당신이 오기만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부인이 있었지요? 신혼이라 한참 깨가 쏟아지고 있었을 텐데, 불러냈으니 이거 미안해서 어쩌죠?”
“본좌의 인내심을 시험하겠다는 건가?”
묵향의 인상이 왈칵 일그러지기 시작한 후에야 옥화무제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노린 것은 상대가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그 때문에 그녀는 일부러 묵향의 성질을 건드리는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이게 당신이 영인이에게 전해준 게 맞나요?”
옥화무제가 품속에서 꺼내 든 것은, 발해어가 적혀있는 비단 조각이었다.
“맞아. 그걸 가지고 온 걸 보면, 거기에 적혀있는 문자의 뜻을 알아냈다는 것이겠지?”
“물론이에요.”
“흐음…….”
3가지 조건 중 하나이지만, 문자의 뜻을 알아냈으면 그냥 인편으로 알려줬어도 충분했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옥화무제가 직접 나와서 자신과의 대화를 청한 것을 보면, 뭔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게 뭘까?
“원하는 게 뭐지?”
“이걸 알려주면 나한테 뭘 줄 것인지 그걸 알고 싶어요. 설마, 날로 꿀꺽할 생각은 아니겠죠?”
잠시 옥화무제의 아름다운 눈을 지그시 노려보는 묵향.
‘저 능구렁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꺼낸 것일까?’
그때, 묵향의 뇌리를 번쩍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미 그곳에 가봤군?”
마치 따지기라도 하듯 묵향의 어조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만, 그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뻔뻔스럽게 대꾸했다.
“그래요. 가봤어요. 설마 내가 얌전히 그쪽에 정보를 넘겨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겠지요?”
“그곳에서 뭘 본거지?”
“비단에 적혀있었던 문자는 ‘천하제일을 논하고 싶다면 백두산으로 오라’라는 뜻이었죠.”
“백두산?”
“예, 발해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던 성산(聖山)이지요. 그리고 그곳에는 북명신공을 만든 발해인의 후예들이 살고 있었어요.”
묵향은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손가락을 탁 튕기며 물었다.
“이제야 알겠군. 그들이 북명신공을 원하던가?”
“눈치가 정말 빠르군요. 맞아요. 그들은 다짜고짜 북명신공을 원했어요. 그걸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과는 대화조차 거부하겠다고 하더군요. 힘으로 누를 수 있었다면 좋겠지만…….”
옥화무제의 말에서 묵향은 자신에게 왜 북명신공의 비급을 가지고 오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자가 나보다도 고수던가? 그렇지 않다면 구태여 비급까지 가지고 올 필요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맞아요. 제대로 겨뤄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분위기로 봤을 때 최소한 당신에 버금가는 고수처럼 느껴졌어요. 그렇기에 순순히 물러난 거죠.”
공공대사에 이어 또 다른 현경급 고수를 만날 수 있다는 말에 묵향의 가슴은 세차게 두근거렸다. 중원의 무학과는 또 다른 방향의 무학. 북명신공 자체가 워낙에 손실된 부분이 많아 제대로 익힐 수가 없었지만, 그자와 겨뤄볼 수만 있다면 자신의 무공 증진에 커다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좋아, 당신 말이 맞다면 지금까지 무영문과 있었던 안 좋은 일들은 모두 잊어주지. 그럼 되겠지?”
“받아드리죠. 당신 말을 믿겠어요.”
“결론이 났으니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서 일어서지! 백두산이라고? 흐흐흣.”
새로운 무공을 접할 수 있을 거라는 흥분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인지 묵향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밖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교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옥화무제는 몰래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쪽이 이기든, 내가 살 길이 겨우 열린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