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기다렸을까.
초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옥화무제와는 달리, 묵향은 무표정한 눈길로 호수만을 응시하고 있다. 딱히 경치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시선을 그쪽으로 돌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은 경치이지 않나?』
갑작스럽게 들려온 발해어. 옥화무제는 그게 무슨 소린지 몰랐지만,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묵향은 상대가 뭐라고 말한 것인지 알아들었다. 오래 전에 북명신공을 읽어보겠다는 일념 하에 발해어를 공부한 적이 있었으니까. 물론 발음은 어눌한 그였지만, 상대의 말을 알아듣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었다.
묵향은 멀리 바위 위에 앉아있는 한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그가 거기에 앉아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건 겉보기로는 꽤나 젊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한 20대 후반쯤? 그것도 길게 기른 수염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것일 뿐, 만약 수염이 없었다면 20대 초반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얼굴이었다.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묵향은 만통음제의 대제자 맹파천을 떠올렸다. 얼굴 모습은 달랐지만, 전체적인 생김새는 대략 그와 비슷했던 것이다. 물론 겉모습은 맹파천과 비슷한지 몰라도, 그가 풍기는 기운은 완전히 달랐다. 사내를 노려보는 묵향의 가슴은 언제부터인가 흥분으로 인해 세차게 뛰고 있었다. 아무리 느끼려고 해도 사내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엄청난 고수였다. 옥화무제의 말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사내가 바위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아름답지 않나?』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였지만 그의 목소리의 크기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괜찮군요.』
어눌한 발음이기는 해도, 묵향이 발해어로 대답하자 사내의 얼굴에 잠시 이채가 어렸다. 설마 발해어를 알아들고, 또 말할 거라고는 기대도 안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사내의 눈빛은 마치 놀잇감을 찾아낸 아이의 그것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사내가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멋을 모르는 녀석이로구먼. 많은 댓가를 치루고 나서야 얻은 경치라네. 그렇게 대충 훑어볼 것이 아니지.』
사내가 조금 더 가까워지자, 옥화무제는 날아갈듯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 순간 옥화무제는 커다란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묵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이 바로 교주에요.”
그녀의 말은 곧바로 통역사를 통해 사내에게 전달이 되었다.
『북명신공은?』
“이 사람이 가지고 있어요. 나는 약속을 지켰으니 해혈을 부탁드려요.”
해혈이라는 말에 묵향의 눈썹이 꿈틀했다. 설마 그녀가 제압당해 있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곳은 자신을 잡기 위해 만들어놓은 함정이고?
하지만 묵향은 옥화무제를 향해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았다. 함정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저런 가공할 만한 고수를 맞이하여, 속 시원하게 싸워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만족했다.
옥화무제의 수하가 통역을 마쳤음에도, 사내는 전혀 해혈을 해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내는 차갑게 비웃으며 이죽거렸다.
『살려줄 걸 기대했다니, 정말 되놈들은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저놈이 살려줄 생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태상문주님.”
그 정도는 통역해 주지 않아도, 사내의 표정만 보고도 알 수 있었던 옥화무제다. 하지만 그녀는 감히 발작하지 못했다. 자신을 바라보며 비웃는 사내를 향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원독어린 시선으로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실력 차이가 워낙 심하게 나다보니, 도저히 보복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은 이곳에 남아 있다가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고해 주도록 하세요.”
수하에게 명령을 내린 후, 옥화무제는 미련 없이 뒤로 돌아섰다. 그녀는 교주가 사내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만에 하나 교주가 이길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저 사내놈과 공모하여 이곳으로 끌어들인 자신을 교주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저들에게 자비를 구하느니 한 달도 채 남지 않는 생명이기는 하지만, 그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리라. 무엇보다 자신의 딸과 손녀를 만나 유언이라도 한 마디 남겨 줘야 할 게 아니겠는가.
산 아래쪽을 향해 전력으로 달리는 그녀의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화를 부른다는 말, 그리고 과욕은 언제나 뒤끝이 좋지 못하다는 말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북명신공에 욕심을 부린 자신의 잘못이었다.
옥화무제가 떠난 후, 묵향은 사내에게 정중하게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고인(高人)을 뵙습니다. 저는 천마신교라는 문파를 이끌고 있는 묵향이라고 합니다.』
발해인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대신, 몸을 호수쪽으로 빙글 돌렸다. 자신의 등판이 고스란히 상대에게 드러난 상황임에도, 발해인은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리라. 그는 예의 그 부드러운 저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네가 북명신공이라는 무공을 익혔다는 게 사실이냐?』
『익히지는 못했고, 도움은 받았습니다.』
묵향의 대답에 그는 허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발해가 멸망한 후, 조국이 멸망한 후, 조상들의 혼이 깃든 무공이 이대로 절전되어 버리는 것이 안타까웠던 나는 후인들을 위해 열두 곳에 작은 씨앗을 뿌려뒀었느니라. 그런데 그 흔적을 보고 찾아온 것이 이 검의 주인이었던 놈과 너 뿐이라니. 참으로 허망하구나.』
그 말을 듣고 묵향의 시선은 발해인이 허리에 차고 있는 검쪽으로 움직였다. 저 검의 주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하지만 고풍스런 검의 손잡이와 검집을 보는 것만으로, 검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유추해 낼 수가 없었다. 아니, 검이 어떤 형태의 검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뜬금없는 방법을 쓰실 게 아니라, 직접 제자를 키우시지 그러셨습니까?』
『발해가 멸망당하던 날, 내 제자들은 모두 다 죽임을 당했느니라. 만인적(萬人敵)이 가능한 절정의 무인들이었으나,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적도들을 감당할 수는 없었던 게지.』
『무모했군요. 적의 기세가 그토록 거셌다면, 잠시 후퇴하여 훗날을 도모했으면 될 게 아니겠습니까?』
『주인에게 얽매인 자들에게는, 그런 선택권이 없느니.』
발해인의 대답을 듣고서야 묵향은 그의 제자들이 발해의 장수들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봤다. 그것 외에 다른 해답이 없었다. 왕이 있고, 그 왕을 지켜야만 되는 입장이라면, 적의 기세에 맞대응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을 테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그리 많이 흐른 것도 아니구요. 귀하의 능력이시라면 발해의 유민들을 다시금 끌어 모아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는 것도 꿈은 아닐 듯 싶습니다만…….』
『나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노라. 발해를 멸망시킨 주범이 바로 나였으니까.』
발해인의 대답에 묵향은 대꾸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직접 발해를 멸했다고? 그렇다면 방금 전에 말했던 제자들도 그 자신이 직접 죽였다는 뜻인가? 묵향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발해인의 말이 이어졌다.
발해를 멸망시킨 것이 자신이라는 과거를 떠올리는 순간 발해인의 눈빛이 광기에 물들기 시작했지만, 그의 시선이 호수쪽을 향해 있었기에 묵향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지 않은가?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호수……. 하지만 원래부터 이런 호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네. 예전에는 이곳에 만년설만이 덮여 있었지. 이 호수는 백두산이 대폭발을 일으키며, 요동과 만주일대를 초토화시킨 후에 만들어진 것이지.』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말이 계속될수록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기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발해인. 그의 음성은 분노에 가득 차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수십 척에 달하는 화산재가 쌓인 상황에서는 농사는 물론이고, 가축을 키우는 것조차 불가능했지. 아무리 강대한 제국이라 해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네.』
『그렇다면 그것을 기회로 반란이라도 일으키신 겁니까?』
묵향의 질문에 사내는 갑자기 미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왠지 허탈하면서도 서글픈 느낌의 부자연스런 웃음소리. 그는 한참동안 웃음을 터트리다 갑자기 정색을 하며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구먼. 하지만 그건 아닐세. 내가 발해를 멸했다는 건, 그런 뜻이 아니라 화산을 내가 터뜨렸다는 것이었다네.』
그 말을 묵향은 믿기 힘들었다.
『화산을 터뜨리셨다구요?』
『나는 오랫동안 풀리지 않고 있던 벽을 넘기 위해 이곳에서 매일 목욕재개를 하며 수련에 힘쓰고 있었지. 성산(聖山)으로 추앙받는 이곳이야말로 몸과 마음에 쌓인 묵은 때를 벗어버리기에 최적의 장소가 아니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한순간에 모든 게 이뤄져 버렸다네. 온 몸에 쌓여있던 탁한 기운이 일순간에 빠져나가는 것 같았지.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다네. 그저 내가 기억하는 것은, 눈을 떴을 때 내 눈앞에 화염지옥이 펼쳐져 있었다는 것뿐.』
정말이지 황당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묵향이 아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발해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조국을 멸망시킨 죄인이 무슨 염치로 후인들을 양성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발해의 무공을 12조각으로 나눠 요동 벌판 여기저기에 안배해 놨다네. 혹, 그것이 후배들이 성장함에 있어서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일세.』
『지역을 잘못 선택하셨군요. 동이족이 거주하는 곳은 요동이 아니라, 더 아래쪽인 반도(半島)입니다. 그들은 고려라는 나라를 세우고…….』
하지만 묵향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발해인이 냉소적인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고려 따위가 어찌 내 조국이 될 수 있단 말이냐! 놈들은 되놈들과 야합하여 대고구려 제국을 멸망시킨 역적들의 후손일 뿐이다. 그런 쓰레기들에게 대발해의 정기가 이어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발해인은 싸늘한 눈빛을 묵향에게로 던지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 정기가 되놈 따위에게 이어지는 것은 더더욱 안 될 말이지. 네 자질이 뛰어나다만, 결코 탐해서는 안 될 보물을 지니고 있는 게 네놈의 죄다. 발해의 무공을 익히게 된 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거라.』
묵향으로서는 억울한 노릇이었다. 북명신공은 익히지는 못하고, 겨우 참고만 했을 뿐이다. 비급에 기록된 내용 자체가 워낙에 빠진 부분들이 많았기에, 그것만을 가지고 무공을 익힐 수 있다는 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북명신공의 몇몇 부분만으로 뇌전신공이나 화염신공으로 개악하는 짓까지 저질러야 했을까. 하지만 광기에 이글거리는 발해인의 눈빛을 봤을 때, 자신의 변명이 먹혀 들어갈 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싸우는 수밖에.
묵향은 천천히 발해인과 자신과의 거리를 쟀다. 그때까지 묵향의 얼굴에는 전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억지가 너무 심하십니다. 저는 오랑캐 따위가 만든 무공은 익힌 적이 없습니다.』
『오, 오랑캐 따위?』
묵향의 도발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발해인이 분노를 터뜨린 그 순간, 묵향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너무나도 빨리 움직였기에, 잠시 잔상이 그 자리에 남아있어 상대가 방어하기에 곤란하게 만드는 절정에 달한 이형환위의 수법이었다. 묵향의 허리에서 뽑힌 검이 무시무시한 파동을 일으키며 발해인을 휩쓸어갔다.
『허허, 역시 되놈들의 속은 음흉하기 짝이 없구나. 혹시나 하여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려고 했던 게 내 잘못이로다. 하기야,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입맛이 씁쓸하구나.』
검의 궤적에서 벗어난, 먼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묵향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발해인이 어떻게 자신의 공격권에서 빠져나갔는지 보지도 못했다. 검이 허공을 벤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처음에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공격권을 넓혔음에도 발해인의 옷깃조차 베지 못한 것이다.
『헛소리하지 마라. 처음부터 대화 따위는 할 생각도 없었으면서. 어차피 나와 싸울 생각이었잖아? 점잖은 척, 개소리하지 말고 칼을 뽑아라.』
자신을 다잡기 위해 오히려 더욱 강경한 어조로 상대를 도발하는 묵향. 발해인이 감정 조절을 제대로 못하는 것을 잘만 이용한다면, 어쩌면 기회가 올지 모르기에 계속 도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이!』
순간 무시무시한 분노를 표출하는 발해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너무나도 강했기에, 묵향 같은 초고수도 마음 한편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그럴수록 묵향은 검을 꽉 움켜쥐었다. 묵혼검이 부서진 후, 새롭게 장만한 검이다. 보검 축에 들어가는 좋은 검이기는 했지만, 과거 그가 쓰던 묵혼검에 비한다면 훨씬 뒤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교주의 위신에 어울릴 정도의 보검이라는 소리를 들을만한 검이기는 해도, 알맹이보다는 껍데기에 좀 더 신경을 쓴 검이라는 게 문제였다.
묵향은 차라리 교주의 신물인 화룡도(火龍刀)를 차고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마저 들었다. 실력 차가 존재하는 만큼, 무기로라도 덕을 볼 수 있는 방법도 괜찮았으니까.
비록 묵혼검에 비한다면 허접한 검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검을 쥐고 적을 겨누고 있자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끈적끈적하게 솟아오르고 있던 공포감이 서서히 사라져간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이 정도의 공포감을 느끼게 했던 인물이 과연 누가 있었던가? 묵향은 검의 손잡이를 꽉 움켜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 나는 할 수 있어. 꿈속에서조차도 이런 기회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렸었잖아.’
더 높은 경지로 올라설 수 있는 깨달음. 그 깨달음은 대부분 생(生)과 사(死)가 갈리는 찰나의 순간에 찾아온다. 발해인은 생사결을 나누기에 충분하고도, 넘치는 인물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너무 넘치는 게 문제였지만…….
묵향은 온 몸의 기를 끌어올렸다. 전신이 터져나갈 듯 팽창했다. 그의 검은 마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듯 검강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모습이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발해인의 표정에는 그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저 두 눈만이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을 뿐.
『죽어랏!』
번쩍 하는 순간, 묵향의 몸은 이미 발해인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그의 검은 엄청난 강기를 흩뿌리며 적의 요혈을 향해 치고 들어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최강의 고수들끼리의 결전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