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이 끝난 후, 아르티어스의 몸 여기저기는 크고 작은 상처들로 가득했다. 아마 브로마네스가 자신을 봤다면, 에이션트급 드래곤과 사생결단을 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만큼 놈이 안긴 상처는 깊은 것이었다.
“허어…….”
겨우 승리를 쟁취하기는 했지만, 이번 싸움으로 인해 아르티어스는 호비트라는 존재에 대한 평가를 전면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련이라는 것을 통해 드래곤인 자신을 이토록 힘들게 만들 수 있다니. 그것도 타이탄 같은 마법병기를 동원한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수련으로 이룩한 힘만으로…….
“육체라는 것이 단련하기에 따라서 얼마나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수 있는지 한수 배운 것 같군.”
하지만 감탄이나 하고 있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의 몸 상태는 이미 엉망진창이라, 어딘가 처박혀서 잠이나 자며 몸부터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는 죽어버린 생명체를 되살려 보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 아르티엔이 죽었을 때도, 크게 슬프기는 했지만 그를 되살리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다크를 되살리고 싶었다. 그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일단 사체의 일부는 물론이고, 영혼까지도 확보해 놨다. 하지만 그것들을 이용해서 어떻게 아들을 되살릴 수 있는지 그는 몰랐다. 영혼과 육체를 우선적으로 확보해 둔 것은 예전부터 주워들은 풍문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드래곤은 본질적으로 삶을 연장하는 것에 대해 무관심했다. 아버지 아르티엔도 만약 자신의 마법력을 잘만 이용했다면 죽음에 이르지 않았을지도 몰랐고, 어쩌면 되살아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는 겸허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지겨울 정도로 긴 삶을 사는 드래곤에게 있어서 삶을 연장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아르티어스는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로 돌아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여기 있어봐야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 마법이 고도로 발달해 있는 그 세계가 아니라면 이미 죽어버린 다크를 되살릴 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우선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거대한 마법진을 그렸다. 몇 번씩이나 되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여기까지 넘어온 만큼, 이미 시공을 초월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요령을 터득한 상태였다. 시간이 촉박한 만큼,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마법진을 다 그린다음, 아르티어스는 인간의 몸체로 변신했다. 드래곤인 상태로 시공간을 초월하려면 너무나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 가급적이면 덩치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다가 사라지는 순간, 그 자리에는 인간으로 변한 아르티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으로 변한 그의 몰골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몸 여기저기에 난 크고 작은 상처들. 아르티어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회복마법을 시전했지만, 쉽게 낫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상처는 본체가 입은 것이었기에, 호비트를 치료하듯 그리 간단하게 치료될 성질의 상처가 아니었던 것이다.
트랜스포메이션 마법을 통해 모습을 바꾼다고 해서 상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즉,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서 다른 생명체로 모습을 바꾼다고 해서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는 말이다.
아르티어스는 마법진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다음 공간의 빈틈을 열어 속에 보관해 뒀던 술병과 묵향의 육편 조각을 꺼냈다. 이 세계의 공간의 빈틈에 저장해 둔 물건을 저쪽 세계에서 꺼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공간이동 마법진을 구동시키기에 앞서, 새삼 주변을 한 바퀴 둘러봤다. 백두산 정상에서 아래쪽으로 보이는 광활한 경치. 예전에 살던 세계에 비해 경치가 그리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자신의 생명까지 위협했을 정도의 존재가 이곳에 살고 있었다는 것만 해도 경이롭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브로마네스가 이 얘기를 들으면 부러워서 죽으려고 하겠지? 흐흐흣.”
곧이어 마법진에 새겨진 룬 문자들이 빛을 내뿜기 시작하더니, 마법진의 중앙이 밝은 광휘에 휩싸여갔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졌을 때, 그곳에서 아르티어스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 * *
아르티어스에 의해 납치된 만통음제는 오늘도 진세의 끝자락이라고 생각되는 담벼락 앞에 앉아있었다. 그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은 거의 습관처럼 굳어져 버린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탈출 방도들은 다 실행해 봤지만 단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매일 이 자리에 앉아 멍하니 하늘과 땅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점심을 밖에서 먹겠다며 나간 대인이라는 놈은 그날 이후 행방이 묘연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어딘가 다녀올 데가 있어서 갔나?’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한 달째 돌아오지 않자, ‘그가 어딘가에서 죽어버린 거라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에 잠을 설칠 지경이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걱정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인 자신을 제압할 정도로 강한 놈이, 어딘가에서 객사를 했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 아닌가. 그렇게 내심 위안하면서도, 은근히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그가 죽어버렸다면, 자신은 계속 이 저택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만통음제가 그렇게 생각하며 대인이라는 놈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품삯을 받지 못한 하인 놈들이 몽땅 다 도망쳐 버린 것이다.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장원 안의 분위기가 뭔가 뒤숭숭한 것을 그도 느끼기는 했었다. 하지만 장원을 탈출하는데 온 정신이 팔려있었던 만통음제였기에, 그런 어수선한 움직임을 아예 외면해 버렸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만통음제는 겨우 오늘 아침에야 알 수 있었다. 아침 식사를 가지고 왔어야 할 하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장원 안을 뒤져보니 하인들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하인들이 도망을 치면서 품삯을 대신해, 돈이 될 만한 것들과 그들이 들고 갈 수 있는 것들은 몽땅 다 들고 가버렸다. 당연히 창고 안에는 쌀 한 톨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허어, 이렇게 죽게 될 줄이야.”
외출을 하고 싶다면 뒷처리는 깔끔하게 해놓고 떠나야 할 게 아닌가. 남은 사람이 굶어죽게 만들다니.
“으아아아! 이 썩을 놈의 새끼. 나타나기만 해봐라. 죽여버릴 테다!”
분노에 찬 비명성을 터뜨리는 만통음제.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이미 아르티어스가 쳐놨던 마법진은 해제되어 버렸다는 것을.
대자연은 한 곳에 기(氣)가 집중되는 것을 싫어한다. 그렇기에 인위적으로 한 곳에 기를 집중시켜 놓는 것은 매우 힘들었고, 그 양이 많을수록 난이도 역시 더욱 올라갔다.
마법진 또한 그 법칙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 때문에 단시간만 구동하고 소멸되는 마법진에 비해, 영구적으로 구동되는 마법진을 만드는 게 훨씬 더 힘든 것이다. 영구적으로 가동되는 마법진의 경우, 그 마법진이 유지되기 위한 마나를 공급해주는 또 다른 마법진이 존재해야 했기에 그 두 가지 마법진이 얽혀 더욱 복잡한 문양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가 만통음제를 가둬두는데 사용한 마법진은 영구 마법진이 아니었다. 언제 장원을 버리고 떠날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호비트 한 마리 가두기 위해 영구 마법진까지 설치한다는 것은 굉장히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만통음제야 환장을 하겠지만. 아르티어스가 생각했을 때, 그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 * *
장백산에 무시무시한 고수가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준 옥화무제. 놀랍게도 장백산에 살고 있다는 고수는 그녀에게 치명상을 가했을 뿐 아니라, 중원 최고의 고수로 추앙받던 묵향마저도 해치워 버렸다고 한다. 무림맹은 처음에는 그녀의 말을 믿지 못했지만, 옥화무제가 혈도의 파열로 인해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죽자 그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 이후, 무림은 발칵 뒤집혔다. 마교에서는 부교주를 중심으로 최정예 무사 집단이 장백산을 향해 달려갔고, 중원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장백산을 찾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들이 본 것은 천지가 개벽한 듯 처참하게 뭉개져 있는 격전의 흔적뿐이었다. 그 어디에도 교주나 발해인의 흔적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옥화무제의 말대로 교주가 죽은 것은 확실해 보였다. 발해인이라면 몰라도, 교주가 몸을 숨길 이유는 없었으니까.
1년여 정도를 기다리며 사태의 추이를 관찰하던 맹주는, 이윽고 교주의 죽음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황궁에도 알렸다. 교주를 원수같이 여기던 해공공에게 보낸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대륙의 정세가 뒤흔들려 버렸다. 그 정보가 황궁에서 돌고 돌다가 몽골 쪽으로 새나갔던 것이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몽골과 송나라의 관계는 그리 나쁜 상태는 아니었다. 북진하던 유광세 대장군의 군세와 남하하던 몽골의 군세가 만난 후, 그들은 그쯤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유광세 대장군으로서도 금나라를 멸하고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몽골군과의 전면전은 커다란 부담이었던 것이다.
평화조약을 체결한 후, 테무진은 군세를 돌려 서역 원정을 단행했다. 중원인인 아버지의 안다가 살아있는데, 구태여 그의 조국인 송나라와 충돌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복할 땅이 없는 것도 아니고.
테무진이 송나라를 향해 정벌대를 파견한 것은, 마교 교주인 묵향이 죽었다는 소문을 접한 그 다음이었다고 전해진다.
키메라를 만드는 최고의 재료
드래곤이 아무리 전능에 가까운 존재라고는 하지만, 죽은 생명체를 다시금 되살릴 능력은 지니고 있지 못했다. 그렇기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아들놈을 되살리려면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아르티어스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 아들놈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을 크게 나눈다면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었다.
첫째, 백마법의 도움을 받는 방법이다.
몇몇 신들의 경우, 부활의 권능을 자신의 사제에게 베푼다고 알려져 있었다. 물론 그건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영웅담에서나 존재하는 말일 뿐, 그만한 권능을 행사할 수 있는 사제가 실존했던 적은 아직 단 한 번도 없었다.
둘째는 흑마법이다.
흑마법에는 죽은 자의 능력에 맞춰 그를 소생시키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했다. 문제는 그게 백마법에서 말하는 완벽한 부활이 아니라, 죽은 자와 산 자의 중간쯤 단계인 언데드(Undead)로 소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마법생명체인 키메라를 통한 재탄생이다. 사실, 아르티어스는 키메라 쪽에 대해서는 완전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오랜 용생(龍生)을 보내는 동안 이리저리 주워들은 것이 있어, 사체의 일부만으로도 완벽한 몸체로 재구성해 낼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따라서 키메라의 몸에 영혼을 집어넣을 수만 있다면, 아들을 완벽하게 되살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도 다 그의 희망사항이었지만 말이다.
일단, 첫 번째 방법은 전혀 현실성이 없었다. 죽은 사람을 부활시켰다는 말이야 영웅담에서 많이 보긴 했지만, 막상 찾아보니 단 한 번도 현실에서 일어난 적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리고 부활이 아닌 팔다리를 재생시키는 정도의 권능을 가진 사제조차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그렇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 방법이 남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뼈다귀밖에 남지 않는 언데드는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귀여웠던 아들놈을 보는 게 소망인 아르티어스는 뼈다귀만 남은 해골이 덜그럭 거리며 다가와 ‘아빠!’ 라고 부르는 장면이 떠오르자 온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다면 남는 방법은 세 번째밖에 없었다.
“흠, 머리가 나쁜 호비트놈들 중에 있는가 알아보는 것은 아마 헛고생일 테고, 드래곤들 중에서 키메라를 연구하는 놈이 있었던가?”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드래곤들 중에는 지루한 용생(龍生)을 견디지 못하고, 생각지도 못한 기발한 방법으로 유희를 즐기는 괴짜 드래곤이 꽤 있었다. 중간계의 균형을 조율해야 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흑마법사로 변해 대륙을 정벌하겠노라고 지랄을 떠는 놈들까지 있을 정도니, 키메라를 연구하는 놈도 있을 게 분명했다.
문제는 마법을 통한 합성생물인 키메라를 만든답시고 레어 구석에 처박혀 궁상이나 떨고 있는 변태 드래곤이 어떤 놈인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드래곤의 숫자가 그리 많은 게 아니어서, 찾고자 마음만 먹으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게 아르티어스의 생각이었다.
어느 놈부터 찾아갈까 이리저리 궁리하던 아르티어스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손가락을 딱 튕기며 중얼거렸다.
“그렇지! 브로마네스를 찾아가면 되겠군. 그 녀석은 그래도 나보다는 발이 넓으니 도움이 꽤 될 거야.”
브로마네스는 어린 시절 온갖 말썽을 같이 저질러왔던 아르티어스의 단짝 친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지랖이 넓어 쓸데없이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기에, 놈에게 물어보면 변태 드래곤이 누구인지 금방 나올게 분명했다.
브로마네스의 둥지가 어디에 있는지는 뻔히 알고 있는 아르티어스다. 그의 둥지 옆에 있던 크루마의 수도 엘프리안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 게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아르티어스는 엘프리안을 향해 공간이동을 했다. 엘프리안에 도착한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엘프리안에 브레스를 뿜어 박살을 낸 게 40년 전이었는데, 아직까지도 잡초만 무성한 폐허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수도라는 것이 그 나라에서 지정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는 게 상식이 아니던가. 그런 알짜배기 땅을 아직까지도 잡초만 그득한 폐허 그대로 놔두고 있다니, 아르티어스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황폐한 엘프리안 위에 내려선 후에야 아르티어스는 그제야 어찌된 영문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잡초 사이로 드문드문 모습이 보이는 용암덩어리. 이건 절대로 자신이 남긴 브레스의 흔적이 아니었다. 강력한 화기(火氣)를 내포하고 있는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 흔적.
“호오, 이 녀석. 둥지 아랫쪽이 시끄럽다고 투덜거리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군. 쯧쯧,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려러니 하고 참고 있으면 해마다 보물을 상납 받을 수 있을 텐데. 하여간에 그놈의 성질머리 하고는……”
자신이 예전에 성질났다고 저질렀던 일은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린 편한 성격의 아르티어스 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