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3화 (689/930)

* * *

“여어, 친구. 잘 있었나?”

갑자기 찾아온 아르티어스를 보자, 브로마네스는 활짝 웃으며 반색을 했다.

“우와, 정말 오랜만이로구먼. 듣자하니 이계로 떠났…….”

여기까지 말하던 브로마네스의 뇌리에 아르티어스의 레어에 처박혀 벌을 받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망각이라는 축복을 받지 못한 드래곤이었기에 마치 며칠 전에 일어난 것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브로마네스는 사납게 콧김을 내뿜으며 으르렁거렸다.

“너, 이 누렁이 새끼. 마침 잘 만났다! 어르신께서 마나의 품으로 돌아가셨으면, 그 즉시 내게 와서 알려줘야 할 거 아냐. 그것도 모르고 네놈 둥지에서 20년씩이나 처박혀 벌을 받은 생각을 하면, 네놈을 아주 그냥…….”

오랜만에 만났으니 서로 반갑게 웃으며 대하면 좋으련만, 떠나기 전에 저질러 놓은 게 있으니 그게 문제였다. 아르티어스는 황급히 변명했다.

“아, 아니, 친구. 그건 자네의 오해일세. 내가 자네를 물 먹이려고 일부러 안 알려줬겠는가. 워낙 다급히 떠나게 돼서, 자네가 내 레어에 있다는 걸 깜박 잊었던 게야. 정말 미안해.”

“말도 안 되는 변명하지 마, 새꺄!”

미안하다고 해도 계속 화를 내자, 짜증을 내며 버럭 소리치는 아르티어스였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한테 계속 화만 낼래? 우리가 그동안 쌓아온 우정이 서글프다고 울겠다, 짜식아!”

“얼라리요~, 고개를 팍 조아리고 싹싹 빌어도 시원찮을 마당에 오히려 짜증을 내?”

인상을 확 구기며 소리를 지르는 브로마네스의 모습에 아르티어스는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얼른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쉬워서 찾아온 건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어허~, 짜증을 내긴 누가 낸다고 그래. 내가 이계 물을 좀 먹었더니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자자,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가지고 따지고 그러나.”

“우~리~사~이? 그 무슨 오크 풀 뜯어 먹는 소리야! 하여간에 이놈의 짜식, 잘 만났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며 화재를 바꾸었다.

“오호, 오랜만에 찾아왔더니 레어가 더욱 삐까번쩍해졌구먼. 우와, 저기에 세워진 동상은 정말 멋진데. 나도 드워프놈들을 붙잡아 네놈처럼 내부 공사 좀 해야 할려나……?”

한동안 아르티어스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했던 브로마네스는 넘치는 울화를 드워프들을 붙잡아 달달 볶으며 풀었다. 덕분에 레어가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기에, 안 그래도 어디 자랑할 만한 데가 없나 입이 근질거리던 참이었다.

그렇기에 아르티어스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미끼를 덥썩 물었다. 마치 내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단순하기 짝이 없는 놈.

“호오, 자네 안목이 훌륭하구먼. 내가 애 좀 썼지.”

덕분에 아르티어스는 한참동안 브로마네스의 자화자찬을 억지웃음을 지어가며 들어줘야만 했다. 평상시 같으면 그냥 맞받아치고 끝내버렸겠지만, 지금은 브로마네스가 필요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형편이니 적당히 비위를 맞춰줘야만 했다.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느 정도 브로마네스의 기분이 풀렸다고 판단한 아르티어스는 슬쩍 이곳까지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너 혹시 키메라를 연구하는 드래곤이 누군지 아냐?”

그러자 브로마네스는 얘기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히 대꾸했다.

“키메라? 그런 걸 연구하는 쓰레기 같은 놈을 내가 알 게 뭐야.”

“쓰레기라고 폄하할 것까지는 없지 않나, 친구. 그것도 엄연히 마법의 한 갈래인데…….”

“마법의 한 갈래라고?”

브로마네스는 잠시 아르티어스를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키메라에 관해 잘 모르는 모양이군. 그런 얘기를 하는 걸 보면 말이야. 키메라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최고의 재료가 뭔 줄 아냐?”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르티어스가 대답했다.

“글쎄…, 오우거인가?”

“땡! 최고의 재료는 드래곤이지.”

“드, 드래곤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아르티어스의 두 눈이 일순 휘둥그레졌다. 드래곤이 연구 재료로 쓰일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해봤기 때문이다.

“그래. 즉, 키메라 연구에 빠진 놈은 결국 동족을 살해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을 자해해야 연구의 끝을 볼 수 있거든. 그런데 그걸 대놓고 연구할 수 있을 리 없지 않겠나.”

브로마네스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키메라를 연구하는 드래곤을 찾기가 쉽지 않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방면에는 그래도 네가 나보다는 낫구나. 그렇다면 한 가지만 더 물어보자. 예를 들어, 자기가 애지중지하던 애완동물이 죽었다고 치자. 그걸 키메라 기법을 활용해서 되살릴 수는 있냐? 아니면 불가능하냐? 내 말은 예전과 거의 비슷한 상태로까지 만들 수 있느냐 하는 말이다.”

왜 그런 걸 묻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브로마네스는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급히 되물었다.

“혹시~, 네 아들이라고 소개했던 그 호비트가 죽은 거냐?”

순간 아르티어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줘.”

“그런 거냐? 그런 거지?”

“그렇다면 어쩔 건데?”

질문의 의도가 자신을 놀리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퉁명스럽게 대답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브로마네스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조언했다.

“그냥 보내 줘. 유희는 유희로 끝내야 하는 거야. 그것 때문에 헤즐링일 때 유희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 거고 말이야. 너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놈이…….”

하지만 그럴 조언이 통할 상대였다면 이런 짓을 하고 있겠는가. 아르티어스는 냉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쓸데없는 참견은 사양하겠어.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해 줘. 모르면 모른다고 하던지. 다른데 가서 알아볼 테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브로마네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휴우~,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야. 물론 껍데기야 똑같이 만들 수 있겠지만, 알맹이가 문제지. 키메라에는 영혼이 없어. 그저 본능대로 움직일 뿐이야. 교육을 통해 간단한 일 정도는 시킬 수 있겠지만,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호비트 정도의 지능을 가지게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해.”

“글쎄…, 꼭 그렇게 단정 지을 수가 있을까? 예전에 아버지가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지. 호비트가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가끔 드래곤도 놀랄 만한 업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한 분야에 미칠 정도로 매진해서라고. 호비트 따위도 그런데, 우리와 같은 드래곤이 한 분야에 미쳤다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문제는 네가 원하는 수준 정도의 키메라를 만들려면 드래곤의 사체가 필수적일 걸?”

브로마네스의 말에 아르티어스의 눈이 순간 번쩍하고 빛났다. 그는 급히 물었다.

“정말 드래곤의 사체만 있으면 가능해?”

그러자 왠지 겁을 집어먹은 브로마네스가 뒤로 주춤거리며 급하게 말했다.

“아, 아르티어스. 제발 이성을 찾으라고!”

“이런 미친 새끼! 대체 지금 뭘 생각하고 있는 거냐? 하여간에 당최 친구라는 놈이 도움이 안 돼. 그나저나 요 근래 죽은 드래곤이 있냐?”

아르티어스의 구박에 쑥스러운 듯 머리를 벅벅 긁던 브로마네스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을 했다.

“아르티엔 어르신을 마지막으로 그 후에 죽은 드래곤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흐음…, 그렇다면 결국 내가 죽는 방법밖에는…….”

아르티어스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일렁였다. 하지만 이게 다른 드래곤 앞에서 할 말이 아님을 금세 깨닫고는 당황해서 황급히 변명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새꺄. 그래봐야 헛수고니까. 그리고 설혹, 네놈이 죽는다고 해봐야, 그 정도 수준까지 연구를 한 놈이 있어야 할 게 아냐? 내가 좀 호기심이 많아 여기저기 안 다녀본 곳이 없는데, 아직까지 그런 연구를 한 흔적이 발견됐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흑마법 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말이군.”

그러자 브로마네스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흥! 네가 흑마법을 배워보겠다고?”

드래곤이 흑마법을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흑마법을 배우는 첫 번째 단추가 바로 마왕에게 영혼을 파는 것이었으니까.

“누가 그 따위를 배운댔냐? 흑마법을 쓸 줄 아는 놈을 붙잡아서 부려먹겠다는 얘기지.”

“쉬운 일은 아닐 게다.”

“왜? 어느 시대든지 흑마법사들은 대륙에 항상 득실거려 왔어. 호비트들에게 있어서 가장 쉽게 막강한 힘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그 말이 맞긴 한데, 마도전쟁이 끝난 지 이제 겨우 4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거든.”

“40년이라고?”

아르티어스는 깜짝 놀랐다. 다크와 이 세계를 떠난 지 겨우 3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차원을 이동하는 데 아무리 오차가 발생했다손 치더라도, 자신의 계산대로라면 길어야 10년 내외가 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벌써 4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니.

물론 차원 이동시, 아르티어스는 약간의 오차를 감안하여 1년 정도는 여유가 있도록 시간을 맞추기는 했다. 왜냐하면 같은 시간대에 동일한 인물이 둘 이상 존재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40년이라니! 그렇게 커다란 오차가 발생했다는 것은 자신이 만든 차원 이동식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말이었다.

‘내가 파악하지 못한, 또 다른 변수가 더 있다는 말인가?’

“40년이라는 말에 뭘 그렇게 놀래? 우리에게 40년이라고 해봐야, 찰나에 불과한데 말이야. 그렇지만 호비트들은 다르지. 아무리 호비트들이 흑마법사가 되어 활기차게 움직인다고 해도, 겨우 40년 정도 가지고 예전의 성세를 회복한다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걸? 그때 너무 많이 죽었거든.”

시간이 많이 어긋나기는 했지만, 아르티어스에게는 오히려 득이었다. 처음에 자신이 계산한 대로 3년 정도의 시간차이로 차원 이동이 되었다면 실력있는 흑마법사는 아예 찾기도 힘들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마법을 시행하기도 힘들었다. 이번 여행에서도 밝혀졌듯, 마법에 능한 드래곤들 조차도 차원 이동시 아직 파악하지 못한 변수들이 무수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어떤 부작용을 초래하게 될지는 그 누구도 몰랐다.

“그래도 40년이라면 호비트니 기대해 볼 만하지 않으려나? 뭔가에 미치면 가끔 우리도 깜짝 놀랄 만한 업적을 만들어 내는 놈들이니 말이야. 게다가 마도전쟁 당시 안 죽고 살아남아서 어디 음침한데 숨어있는 실력있는 놈이 없으란 법은 없잖아.”

“으이구, 그렇게까지 그놈을 죽음의 기사로 만들고 싶다면야 어쩔 수 없지.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보자. 죽음의 기사로 만들어서 어쩔 건데? 너, 죽음의 기사가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본 적이나 있긴 하냐?”

아르티어스는 으시대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있지. 몇 번 싸워보기까지 했는 걸.”

“그럼 잘 알거 아냐. 그것들도 키메라나 마찬가지야. 제대로 된 대화조차 불가능한 쓰레기들이지.”

브로마네스의 지적에 아르티어스는 애써 반박했다.

“대화가 불가능한 건 하급기사들로 만든 놈이고, 마스터 이상이 넘어가면 곧잘 말을 해. 아들놈 실력이라면 아주 부드러운 대화가 가능할지도…….”

그러자 브로마네스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좋아, 그건 그렇다고 치자. 대화만 할 수 있으면 되는 거야? 겉모습은? 죽음의 기사는 육신을 가질 수 없어서, 소멸하는 그 시간까지 갑옷 속에 깃들 수밖에 없잖아.”

“뭐, 드워프놈들을 족쳐서 멋진 갑옷 한 벌 만들라고 하면 되지.”

“이런 빌어먹을 새끼,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군.”

브로마네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아르티어스는 침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내 아들놈을 꼭 되살리고 싶어. 겉모습이 어떻든 상관없어. 움직일 수 없어도 돼. 그냥 아들 녀석과 즐거웠던 과거를 회상하며, 서로 대화만 할 수 있어도 만족할 거야.”

“미친 놈! 뭐 그렇게까지 하고 싶다면 좋을 대로 해라. 아르티엔 어르신도 살아계실 때 못 말린 네놈의 꼴통짓을 누가 말리겠냐!”

“그래서 말인데……. 나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는 아르티어스의 모습에 울화통이 터져버린 브로마네스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싫어. 내가 왜 그딴 멍청한 짓거리에 내 귀중한 시간을 허비해야 하지?”

화를 내며 뒤돌아서는 브로마네스를 붙잡으며 아르티어스가 살살 달랬다.

“어허, 이거 왜 이러시나, 친구. 우리 오랜만에 세상구경이나 함께 하자구. 그럼 내가 다른 세상에 가서 어떤 모험을 했는지, 그 재미있는 얘기들을 들려줄게. 어때?”

“됐네. 네놈이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했는지, 나는 전혀 흥미 없거든.”

“이 망할 새끼! 너 정말 이럴래?”

계속 이죽거리는 말투에 안 그래도 끓어오르던 화를 애써 삭이고 있던 아르티어스의 눈썹이 일순 위로 바짝 곤두섰다.

“시, 싫다니까. 안 그래도 할 일도 많고 말이야.”

웬만하면 따라 나설 놈인데 저렇게 단박에 거절하는 것을 보면, 뭔가 저질러 놓은 다른 일이 있는 모양이다. 이럴 경우, 뭐라고 해도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아르티어스였기에 미련없이 돌아섰다.

몇 발자국 걸어가던 아르티어스가 갑자기 뒤돌아서며 말했다.

“참! 예전에 알던 그 호비트들 있잖아. 아들놈의 동료들이었던 놈들 말이야.”

“응. 그런데?”

“혹시, 그놈들 아직도 살아있냐?”

“그건 잘 모르겠고, 두 놈은 치레아 공국에 있는 걸 봤었어. 네 아들을 대신해서 거기를 다스리고 있더라.”

그 말에 아르티어스의 눈동자가 묘하게 빛났다.

“치레아 공국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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