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5화 (691/930)

* * *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통신을 끝낸 미카엘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다크만 있으면 설설 기는 드래곤 주제에 미치…….”

여기까지 말하던 미카엘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황급히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무심결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아니! 어르신이 왔다면, 다크도 함께 왔다는 소리잖아?”

다크와 헤어진 지도 벌써 30년이 넘어 버렸다. 헤어지던 그날, 다크는 미카엘에게 마나를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지 가르쳐 줬었다. 그리고 그 수련법이 안겨다 준 놀라운 효능. 미카엘은 자신을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마스터가 되어있는 자신의 옛 동료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금은 치레아의 대공 부부가 되어있는 팔시온과 미디아. 그들은 다크로부터 뼈를 깎는 수련을 받아 놀랍게도 단 5년 만에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버렸다. 그때만 해도 미카엘은 자신도 열심히 수련하면 마스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스터라는 벽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그 벽을 깨지 못했다. 아버지인 로체스터 공작이 심혈을 기울여 개인교습까지 해줬지만, 아직까지 마지막 관문을 돌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요즘 들어 그는 간혹 생각한다. 그때 다크를 떠나는 게 아니었다고 말이다. 만약 그때 친구들과 함께 했었다면…, 그랬다면 그도 벌써 마스터가 되어 있었을 거다. 물론 치가 떨릴 만큼 혹독한 수련을 해야 했겠지만, 친구들이 마스터가 되어 있는 모습을 좌절감에 쌓여 지켜보고 있지 않아도 됐다는 말이다. 그것도 33년 전에!

이미 마스터가 되는 것을 포기한 그에게 다크란 존재는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왔다. 그만 만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자신도 마스터가 될 수 있다. 아니, 다크가 자신을 마스터로 만들어 줄 것이다. 미카엘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크를 만나야 해!”

지금 당장 치레아 공국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게 너무나도 원통했다. 먼저 어르신에게 줄 선물부터 장만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의 기사를 만들 수 있는 흑마법사 한 마리를 말이다.

* * *

아르티어스라는 존재가 일으킨 파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아르티어스가 치레아 공국을 방문한지 단 하루 만에, 거의 전 대륙이 들썩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르티어스에게 부탁을 가장한 명령을 받은 팔시온이, 혼자 당하는 게 억울하다는 심보로 각 제국에 퍼져있는 지인들과 지도층에 드래곤의 이름을 팔아 협조를 구한 덕분에 대륙 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흑마법사 사냥이 시작되었다. 온 천지사방에 현상수배 전단이 내걸렸고, 기사들이 산골 마을 구석구석까지 들쑤시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자 각국에 위치한 신전에서도 적극 호응하여, 마도전쟁의 잔재를 없애버리겠다는 기치를 내걸며 성기사들을 사방으로 파견했다. 덕분에 예상치도 못한 날벼락을 맞게 된 것은 흑마법사들이었다.

흑마법사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고, 또 그 모습을 깊숙이 감추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모두들 사력을 다해 들쑤셔 대니 성과가 없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 귀하디귀한 흑마법사들이 하나 둘 잡혀오기 시작했다.

“죽음의 기사를 만들 줄 아나?”

질문을 받은 흑마법사는 솔직히 대답했다.

“나는 그런 것 만들 줄 모르오.”

“좋게 말할 때 실토하는 게 좋아.”

“그래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안다고 할 수 있겠소?”

흑마법사는 항변했지만, 상대는 마치 흑마법사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집요하게 말했다.

“실토한다고 해서 자네한테 해가 될 일은 없네. 위쪽에서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의 기사가 한 마리 필요한 모양이야. 그것만 만들어 주면, 자유롭게 풀어주겠다고 황제폐하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네. 물론 두둑한 수고비도 지급될 테고.”

“좋은 제안이기는 하지만, 만들 수 없는 걸 만들 줄 안다고 거짓 자백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소.”

“이 새끼! 좋게 말해서는 안 되겠군.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네놈이 편히 죽을 것 같으냐?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어떤 건지 한 번 맛보고 싶다는 거야!”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모르는 걸 안다고 할 수 없지 않겠소.”

흑마법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는 법, 곧이어 강도 높은 고문이 가해졌다.

“이 새끼, 빨리 불어! 너 죽음의 기사를 만들 줄 알지?”

흑마법사는 만들 줄 모르는 데도 불구하고, 만들 줄 안다고 실토하라고 하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그냥 말로 하는 것도 아니고, 고문까지 병행하고 있으니 죽을 지경인 것이다.

“크아아악! 차라리 나를 죽여라. 아무리 죽음이 두렵다고는 해도, 만들 수 없는 걸 어떻게 만들 수 있다고 대답을 하겠느냐. 곧바로 들통 날 게 뻔한데…….”

당연한 지적이었지만, 혹독한 고문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도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모처럼 잡아들인 흑마법사다. 혹시 이놈이 죽음의 기사를 만들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시치미를 떼고 있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상, 고문을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사들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변하게 된 이유는 공작이나 대공 같은 지도급 층에서 두 눈을 시뻘겋게 붉히며 연신 닦달을 해왔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의 이름을 판 팔시온의 책임 떠넘기기가 확실하게 그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결국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거짓 자백을 하는 자가 몇 명 나타났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흑마법사의 실토를 곧이곧대로 믿고, 드래곤에게 데리고 갈 만큼 그들은 멍청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사들은 곧장 흑마법사를 데리고 공동묘지로 갔다. 그리고 명령했다.

“지금 당장 죽음의 기사를 하나 만들어 봐!”

고문 때문에 거짓 실토를 한 것일 뿐, 그들이 죽음의 기사를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다시 감옥으로 끌려가, 이번엔 헛걸음치게 만든 괘씸죄까지 더해져 더욱 강도 높은 고문이 가해졌다.

“너 만들 수 있으면서도, 못 만드는 척 하는 거지?”

“아, 글쎄 아니라니까 그러네.”

“빨리 불어, 새꺄. 사실은 만들 줄 알지?”

“끄아아악! 미치고 팔짝 뛰겠네. 차라리 날 죽여라!”

고문은 흑마법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 죽으면 그제서야 죽음의 기사를 만들지 못한다는 말을 믿어줬다. 물론 억울하게 죽은 흑마법사야 온갖 욕설을 퍼붓고 싶었겠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이런 젠장, 시체 치워라. 이놈도 아닌 모양이군.”

“예.”

“빨리 가서 딴 놈 끌고 와!”

이런 현상이 대륙 곳곳에서 벌어졌고, 흑마법사들에게는 그야말로 악몽과도 같은 나날들이 지속되었다.

불법 레어 침입자

팔시온과 헤어진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레어로 공간이동했다. 팔시온이 흑마법사를 찾는 동안, 그곳에서 상처를 돌보며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레어의 안쪽 가장 깊숙한 곳에 마련되어 있는 거대한 공동(空洞)은 드래곤이 본체로 현신한 채 잠을 자기위한 공간이다. 그래서 언제든 드래곤이 낮잠을 잘 가능성이 있는 만큼, 그곳에는 아무것도 놔두지 않고 비워두었다.

공간이동을 한 아르티어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그 공동의 중심부쯤이었다. 그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본체로 현신했다. 그 넓었던 공동이 꽉 찰 정도로 거대한 아르티어스의 본체. 하지만 그의 몸 여기저기에는 수많은 상처들로 너덜거리고 있었다.

이제야 시간적 여유를 가지게 된 아르티어스는 온몸의 상처를 꼼꼼하게 마법으로 치료해 나갔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회복력을 자랑하는 게 바로 드래곤이다. 그런 만큼 마음먹고 치료를 하기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몸에 더 이상의 상처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덜거리는 외피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물론 외피를 복구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뱀 같은 파충류들은 허물을 벗는 방식으로 외피의 상처를 복구하지만, 드래곤이 허물을 벗는다는 소리를 들어봤는가? 드래곤은 허물을 벗지 않는다. 드래곤의 외피는 드래곤 본이라는 금속성 물질로 이뤄져 있었기에, 허물을 벗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대신 드래곤들은 마나를 이용하여 자신의 몸체를 변화시키는 재주를 부릴 수 있었다. 과거 아르티어스가 다크를 위해 자신의 몸속에 있는 드래곤 본의 일부를 꺼내어, 검을 만들어줄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아르티어스는 방대한 마나를 운용하여 뼈대를 이루는 드래곤 본의 일부를 꺼내어 외피를 복구시켰다. 몸 구석구석을 단장해야 하는 일인 만큼 마나의 소모가 큰 것은 물론이고, 기나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매우 섬세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외피를 복구하는 작업을 완전히 끝내지 못했다. 그건 쏟아지는 잠 때문이었다. 그의 몸은 수면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기나긴 잠을 말이다. 지금 그의 드래곤 하트는 거의 텅 비어있는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장백산에서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를 했고, 곧바로 차원이동을 하며 막대한 마나를 소모했다. 아무리 드래곤이 마르지 않는 마나의 샘인 드래곤 하트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렇게 엄청난 마나를 한꺼번에 소비하고 나면 반드시 수면을 통해 보충을 해야 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가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기 시작했을 때, 갑작스런 그 괴성에 놀라 엘프 둘이 뛰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지하공동을 가득 채운 거대한 황금 덩어리를.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의 주인이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이, 이걸 어떻게 하지요? 깨울 수도 없고…….”

“우리를 찾지도 않으시고 바로 잠자리에 드시지 않았나. 주변에 대기하고 있다가, 찾으시면 바로 달려가는 수밖에.”

“그게 좋겠군요.”

엘프들은 드래곤이 언제 깨어날지 몰라 전전긍긍 하고 있었지만, 사실 아르티어스는 그들의 예상과 달리 깊은 잠에 빠진 게 아니었다. 깊은 수면으로 빠지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그야말로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가 치레아 공국에 다녀온 지 보름쯤 지났을까, 그의 뇌리를 울리는 요란한 울림이 갑작스럽게 전해져 왔다. 팔시온에게 전해줬던 수정구를 통한 통신이 그의 뇌로 직접 전해져 들어왔던 것이다. 그가 위험한 이런 방식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혹시나 깊은 잠에 빠져 신호를 놓쳐버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어르신, 기뻐하십시오. 어르신께서 제게 부·탁·하·신 흑마법사를 겨우 찾아냈습니다.>

<알겠다. 지금 곧 가마.>

곧이어 아르티어스의 거대한 몸체가 사람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레어에서 그 자취를 감춰버렸다. 치레아 공국으로 공간이동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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