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7화 (693/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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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새끼! 곱게 말로 할 때 알아서 나갈 것이지…….”

이제 갓 독립한 듯한 철없는 드래곤 한 마리를 확실히 교육(?)시킨 후, 아르티어스는 아버지의 연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의 연구실은 예전과 변한 게 전혀 없었다.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는 책상. 먼지가 쌓여있는 것은 책상 위만이 아니었다.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랬다.

어쩌면 어린 드래곤 녀석도 이곳에 연구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갓 분가해서 해보고 싶은 일이 수없이 많은 어린 드래곤이 연구실에 처박혀 마법공부부터 시작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아르티어스는 먼저 수북이 쌓여있는 마법서들 중에서 키메라 제조에 대한 책이 있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책 한권 한권을 다 읽어보며 꼼꼼히 확인해야 하는, 엄청난 끈기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거의 3천 권쯤 되는 마법서들을 살펴봤을 때쯤일까? 아르티어스는 희미한 드래곤의 존재감을 느꼈다. 그는 살펴보던 책을 신경질적으로 탁자 위에 내려놨다. 안 그래도 찾고자 하는 책이 찾아지지 않아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이 자식이 주제 파악도 못하고, 다시 온 모양이군. 이번에는 아주 그냥 박살을 내줘야겠어. 이 근처에는 아예 올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아르티어스는 녀석을 어떻게 하면 화끈하게 아작을 내줄까 궁리하며, 느긋한 걸음으로 어슬렁어슬렁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몇 발자국 채 걸어가기도 전에 밖에서 느껴지는 드래곤의 존재감이 상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온 몸에 전율이 일게 할 정도의 무시무시한 존재감……. 이 정도 존재감이라면 필시 에인션트급을 상회하는 드래곤이리라.

순간 멈칫 멈춰 선 아르티어스.

“지 애비에게 도움을 청한 건가?”

녀석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복수할 수 없을 거라는 걸 느꼈으리라. 하지만 자존심 강하기로 이름 높은 레드 일족이, 연장자의 도움까지 청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배알도 없는 새끼.”

무심결에 욕설을 중얼거리는 아르티어스였다.

지금까지 저질러 놓은 수많은 악행 덕에, 노룡들이 자신을 보는 눈이 곱지 않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제 멋대로 살아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처한 현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아르티어스는 아니다. 무엇보다 냉철하게 판단한다. 지금까지 그토록 많은 사고를 치고도,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게 바로 그 덕분이었으니까.

‘그냥 물러날까?’

만약 이게 아들의 일에 연관된 것만 아니었다면, 그는 곧바로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도망칠 수 없었다. 이대로 물러난다면, 더 이상 이곳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말은 여기에 쌓여있는 아버지의 마법서들을 살펴볼 수 없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부딪쳐 보는 수밖에.”

아르티어스의 예상과 달리 손님은 한 명만이 아니었다. 무려 세 명이었다. 그 중 하나는 얼마 전에 아르티어스에게 박살나서 쫓겨난 어린 드래곤이었고, 둘은 처음 보는 드래곤들이다. 그런데 그들 중 하나의 존재감이 워낙에 엄청나서, 나머지 둘의 존재감이 묻혀버렸기에 하나로 느껴졌던 것이다.

아르티어스가 레어 안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오크 녀석이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으르렁거렸다.

“바로 저놈입니다! 저놈이 제 레어를 뺏고, 저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구요.”

이때, 오크 녀석의 옆에 서있던 드래곤이 또 다른 존재에게 공손히 말했다.

“브라키어님, 공정한 판결을 부탁드립니다.”

웜급 정도의 젊은 드래곤, 아마도 오크 녀석의 아버지인 모양이다. 아르티어스에게 묵사발이 난 놈이 구원을 청할 데라고 해봐야, 그 아버지 밖에 더 있겠는가. 만약 아버지라는 녀석이 직접 이리로 달려왔다면, 아르티어스가 손쉽게 상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저놈이 아들을 박살낸 게 누군지 눈치를 챘는지, 자신들의 일족 수장(首長; Lord)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데 있었다.

에인션트 레드 드래곤 브라키어. 레드 일족의 수장으로서 광폭하기로 이름난 무시무시한 드래곤이다.

혹시나 하기는 했지만, 상대가 브라키어라는 말에 아르티어스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브라키어와는 예전에 안면이 있었다. 과연 저놈이 공정한 판결을 해줄까? 그럴 가능성은 아예 없다는 게 아르티어스의 판단이었다.

예전에 아르티어스가 사고 쳤을 때, 브라키어가 다른 종족의 수장 둘과 함께 그의 레어를 방문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붉은 머리의 엘프였는데, 오늘은 타는 듯한 적발의 건장한 호비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브라키어는 레어 안에서 걸어 나오는 아르티어스를 보고는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또 네놈이냐?”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그래. 한동안 조용하다 싶더니, 또다시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 게냐?”

“말썽이라니요? 터무니없으신 말씀이십니다.”

“터무니없다니! 어떻게 된 게 네놈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한 게 없냐. 이 아이한테 다 들었다. 레어에 무단침입, 그리고 강제 점거. 내 살다 살다 남의 레어를 뺏는 드래곤이 있다는 소리는 오늘 처음 들었다.”

그러자 아르티어스는 무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항변했다.

“뺏다니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뺏은 게 아니라고?”

“예, 이 레어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제 것입니다.”

“네 녀석의 레어는 말토리오 산맥에 있지 않더냐?”

“그렇긴 한데 그건 본집이고, 여긴 가끔 와서 쉬는 별장이죠.”

별장이라는 대답에 브라키어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그런데 감히 그런 억지를 자신의 앞에서 부리다니. 브라키어는 그래도 일족의 수장답게 분노를 애써 억눌렀다. 성질 같아서는 패대기부터 쳐놓고 대화를 나눴겠지만, 종족의 수장이라는 지위에 있는 만큼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억지로 참고 있었던 것이다.

“별장을 가진 드래곤이 있다는 말은 내 생전 처음 듣지만……. 뭐, 좋다. 네 말이 옳다고 치자. 그런데 이게 네 레어라는 증거가 있느냐? 네 별장이라는 증거가 있느냐는 말이다.”

“물론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이 레어를 물려받은 후, 저는 이곳에 침입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각종 마법 방어망을 쳐뒀습니다. 물론 그 방어망은 보물사냥을 하러 다니는 호비트들을 막자는 것이지, 동족을 막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강하게 방어망을 쳐봐야, 동족들을 상대로 그게 먹혀 들어가기나 하겠습니까? 오히려 방어망만 부서지죠. 그래서 동족이라면 방어망을 부수지 않고도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해놓은 뒤, 안쪽에 팻말을 세워두는 것으로 대신했었습니다.”

말을 하던 아르티어스는 어린 드래곤을 한 번 매섭게 째려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실수한 게 있으니, 설마 갓 분가한 어린놈이 제 레어에 둥지를 틀고 자리를 잡을지는 상상조차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그 간단한 마법 방어망도 통과하지 못해 몽땅 다 부숴버렸고, 제가 안쪽에 세워뒀던 팻말도 없애버렸더군요.”

브라키어는 사나운 눈빛으로 어린 드래곤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 녀석의 말이 사실이냐?”

갑작스런 질책에 어린 드래곤은 당황해서 대답했다.

“무, 물론 제가 여기에 왔을 때 방어마법진이 쳐져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안쪽에서 팻말도 봤습니다. 하지만 당시 여기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곳에 주인이 있다면, 그를 시중드는 자들이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경비 몬스터 한 마리 없이, 그렇게 간단한 마법만으로 레어를 방비하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 말에 브라키어는 잠시 고심을 했다. 사실, 브라키어는 내심 탄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순전히 억지만 부려대며 동족들을 괴롭혀 대는 못된 놈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이다. 어쩌면 아르티엔의 죽음이 녀석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쌍방 간의 의견을 들어본 결과, 네 의견이 충분히 일리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브라키어는 오크 녀석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이 레어의 주인이 죽은 것도 사실이고, 또 이곳에 아무도 살지 않고 있었다는 네 주장은 옳다. 하지만 방어 마법진이 쳐져있고, 이곳에 주인이 있다는 팻말까지 세워져 있었음에도, 그걸 무시한 것은 결코 옳은 행동이 아니야.”

오크는 굉장히 억울하다는 듯 슬쩍 눈시울까지 붉히며 열변을 토했다.

“그저 단순한 팻말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잠시 기억을 되새겨보는 오크. 그때 대충 읽고 뽑아버렸던 것이었지만, 완벽하기 짝이 없는 드래곤의 기억력은 당시의 장면이 마치 방금 전에 벌어졌었던 것처럼 선명하게 그의 뇌리에 떠오르게 만들어 줬다.

“‘이 레어는 나 아르티어스의 것이다. 무단침입자는 용서하지 않겠다.’ 이렇게 단 두 줄만이 기록되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레어 안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고, 심지어 금은보화라고는 두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텅 빈 공간이었죠. 남아 있었던 건 아르티엔님이 남겨놓으신 방대한 양의 마법서들 정도였습니다. 저는 아르티어스라는 드래곤이 아르티엔님이 돌아가신 후, 그분이 남겨놓으신 재산을 습득하기 위해 먼저 침을 발라놓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에 들러 마법서를 자신의 레어로 옮기려고 말입니다. 저는 혹시나 해서 10년 동안을 기다렸습니다. 아르티어스란 드래곤을 만나면 사정을 설명하고, 마법서는 필요 없으니 이 레어를 저에게 달라고 부탁하려고 말입니다. 제가 남의 재물을 탐할 만큼, 후안무치한 그런 드래곤은 아니지 않습니까? 고룡께서 기거하시던 곳이라서 그런지, 넓이 하나만큼은 정말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 분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앞뒤 설명을 들어보지도 않고 저를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진다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브라키어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아르티어스를 바라봤다. 양쪽 얘기를 들어보니, 둘 다 그럴 듯한 이유였기에 공정한 판단을 내리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이 아이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솔직히, 자네에게 레어가 둘씩이나 필요하지는 않지 않은가. 물론 여기에 있는 아르티엔님의 유산은 자네가 가져가는 것으로 하고, 어린 드래곤을 위해 양보를 해주면 안 되겠는가?”

“위대하신 브라키어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윽박을 질러서라도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내심 마음을 다지고 있었던 브라키어는, 아르티어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네 예전보다는 꽤나 어른스러워졌군, 그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허허, 아르티엔님께서 살아계셨다면 대견스러워 하셨을 게야.”

“…….”

살짝 양심이 찔리는 아르티어스였다. 지금 이러고 있는 건 필요에 의해서였지, 결코 자신이 개과천선해서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그분께서 대마왕 크로네티오와 싸우다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브라키어. 대마왕이 강림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드래곤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그 혼자만이 싸우다 죽었다는 것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회상에 잠겨있던 브라키어는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일세. 아르티엔님께서 크로네티오와 싸우실 때, 자네도 함께 있었나?”

“예.”

“오호, 이제야 궁금증을 풀 수 있겠구먼. 그렇다면 왜 그때 다른 드래곤에게는 알리지 않았는가. 내가 만약 그 사실을 알았다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갔을 텐데…….”

“당시 대마왕은 토지에르라는 호비트의 육신에 강림했었지요. 아무리 대마왕이 강하다고 하지만, 호비트의 육신이 지니고 있는 한계로 인해 그리 대단한 능력을 지니지는 못했었습니다. 그 때문에 어르신을 비롯한 다른 일족의 수장들께 기별을 넣지 않았던 겁니다.”

브라키어는 말도 안 된다는 소리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호비트의 몸에 강림했다고? 그럴 리가…….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 내 직접 가봤다네. 그 엄청난 흔적들, 그건 결코 호비트 따위의 몸에서 구현해 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었어.”

“맞습니다.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아버지께서는 놈이 본신이 지닌 힘의 절반쯤을 보유하고 있는 상태라고 말씀하셨죠.”

그 말에 브라키어의 얼굴에 경악감이 어렸다. 본신 능력의 절반이라면, 드래곤이 떼로 덤벼든다고 해도 승패를 가늠하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절반이라고? 그게 사실인가?”

“예. 아버지께서는 대마왕과 싸우기 전에 제게 경고하셨죠. 당신께서 놈에게 패한다면 덤벼들 생각 말고, 즉시 각 종족의 로드들께 사태의 전말을 말해주라고 말입니다. 모든 드래곤이 힘을 합친다면, 승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시면서…….”

얘기를 하던 중 하마터면 아르티어스는 다른 드래곤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추태(?)를 연출할 뻔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의 아버지의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아버지의 너무나도 깊고 큰 사랑이 마음 속 깊이 느껴졌던 것이다.

“허어, 내가 파악했던 것보다 더욱 큰일이 벌어졌었던 모양이로군. 그런 강적을 아르티엔님 혼자서 막아내시다니. 그분께서 강하시다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였을 줄이야…….”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브라키어는 잠시 후, 아르티어스에게 말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자네가 말썽은 많이 부리지만, 그래도 자네 또래의 다른 드래곤들에 비한다면 마법에 대한 성취가 높다는 것 정도는 나도 익히 알고 있다네. 그분의 뒤를 잇기 위해, 이렇게 마법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니……. 허어, 참으로 대견하구먼.”

아르티어스가 이계로 날아갔다가 얼마 전에야 도착했다는 것을 브라키어는 몰랐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이곳에 몇 십 년만에 왔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아르티엔이 물려준 마법서를 지키기 위해, 자신과 대면하는 위험까지 감수하고 있지 않은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동안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레어에 처박혀 마법에 매진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브라키어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칭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르신.”

“열심히 해보게. 아르티엔님의 혈통을 계승한 자네니, 목적한 바를 반드시 이룰 수 있을 게야.”

“감사합니다,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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