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개 함정의 비밀
아르티어스가 급히 이동한 곳은 마법왕국 알카사스였다. 마법하면 알카사스였고, 대륙에서 엘프를 노예로 부리는 유일한 국가였다. 그곳 왕궁에 가서 국왕을 상대로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한 결과, 아주 전폭적인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흐흐흣,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는 걸 고민하고 있었다니……. 역시 간단한 게 진리지.”
아르티어스가 거의 200마리가 넘는 엘프들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내자, 어린 드래곤이 뭔 일인가 하여 고개를 삐쭉 내밀며 궁금해 했다. 하지만 워낙에 호된 맛을 봐서 그런지, 자신의 레어를 소란스럽게 한다며 따지지는 못했다.
아르티어스가 엘프들을 이끌고 나타난 것에 대해 반응을 보인 것은 그랜딜 공작이었다. 그는 이곳의 유산 회수 작업을 완료한 후, 드워프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며 아르티어스의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이, 이들은 누굽니까? 주인님.”
“아, 다 써먹을 데가 있어서 데려온 거야.”
아르티어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물건은 다 옮겼느냐?”
“예, 주인님. 혹시 더 시키실 일이 있으신가 해서 대기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더 이상은 없다. 너는 드워프들을 데리고 레어로 돌아가서, 짐 정리를 깔끔하게 해놓도록 해라.”
“예, 주인님.”
그랜딜 공작은 아르티어스의 레어로 돌아가기 위한 마법진을 그려나갔다.
아르티어스는 엘프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가 뭔가 웅얼웅얼 주문을 외우자, 엘프들의 이마 한가운데서 음산한 붉은 빛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빛이 사라졌을 때, 그들의 이마에는 괴이한 문양의 그림이 하나 찍혀있었다. 마치 붉은 색 잉크로 그려놓은 문신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문신에 비해 뭔가 음산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너희들의 이마에 찍힌 건, 아주 지독한 저주마법이지. 저주가 발동되는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후다. 그 전에 내가 해제해 주지 않는다면, 너희들의 머리통이 수박처럼 쩍 갈라지게 될 거야.”
아르티어스의 협박에 엘프들은 그저 부들부들 떨고만 있다.
“하지만 내가 시키는 일을 완수한다면, 너희들을 풀어주도록 하겠다. 자유를 되찾고 싶다면, 내가 시키는 일을 꼭 완수하도록 해라. 알겠느냐?”
“예.”
“너희들이 할 일은 이곳 레어에 있는 공간이동 마법진을 통해 어딘가로 갔다가, 그곳에서 다시 이리로 공간이동해서 돌아오면 된다. 아주 간단하지?”
그러면서 아르티어스는 이곳의 공간이동 좌표를 불러줬다.
엘프들은 7싸이클 마스터인 그랜딜 공작에 비한다면 아주 급이 떨어지는 마법사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까지 공간이동 해서 오지 못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직접 마법을 구동하는 게 아니라 마법진을 활용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의 등급보다 훨씬 더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공간이동 해서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위대하신 분이시여.”
“그래. 돌아오기만 한다면, 자유와 함께 푸짐한 상을 주겠다.”
그 말을 끝으로 아르티어스는 아무 녀석이나 지목해서, 각자가 들어갈 곳을 지정해 줬다.
“너는 저쪽으로 들어가. 그리고 너는 저쪽. 그리고…….”
101개의 이동 마법진에 엘프들을 모두 밀어 넣은 아르티어스는 자리에 앉아 차분히 기다렸다. 보물창고로 이동해 간 엘프가 돌아오기만을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엘프는 단 한 마리도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도망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다. 혹시 엘프들이 도망칠 것에 대비해 저주까지 걸어놨지 않은가.
아르티어스는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결국 한 놈도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사실이 그의 골치를 아프게 만들었다.
“이럴 리가 있나, 전부 다 함정이란 말인가? 어떻게 비밀창고 하나 없는 드래곤이 있을 수가 있다니?”
아르티어스는 목에 걸고 있는 수정목걸이를 이용해서 그랜딜 공작을 불렀다. 곧이어 수정 속에 그랜딜 공작의 모습이 나타났다.
“찾으셨습니까? 주인님.”
“여기서 가지고 간 물품들에 대한 목록 작성은 끝냈느냐?”
그 질문에 그랜딜 공작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변명했다.
“워낙 방대한 양이라 아직 다 작성하지는 못했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모든 목록을 다 작성할 필요는 없고, 마법에 필요한 시약과 재료들의 목록을 우선적으로 작성하도록 해라.”
“옛, 주인님.”
아버지가 마법에 열을 올렸던 만큼, 아주 귀한 마법재료라든지 시약은 따로 모아뒀을 가능성이 있었다. 만약 조사해 보고 희귀하거나 아주 위험한 마법물품이 전혀 없다면, 어딘가 그것들이 보관되어 있는 비밀창고가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곳에서 더 이상 기다려봤자 시간낭비인 것 같으니, 돌아가서 휴식이나 취해볼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레어를 향해 공간이동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 이동 마법진으로 보내고 남은 엘프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서재 한쪽 구석에 오글오글 모여앉아 아르티어스를 향해 두려움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엘프들.
더 이상 쓸모가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놔두고 가려 했던 아르티어스였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나름대로 쓸모가 있을 것도 같았다. 수많은 마법물품들을 정리한다고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을 그랜딜에게 주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자료를 정리하는데 필요한 시간도 대폭 줄어들 테고 말이다.
* * *
레어의 가장 깊은 곳에 마련되어 있는 거대한 공동. 이곳은 드래곤이 본체로 현신한 채 수면을 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엄청나게 넓은 공동이었지만, 그곳이 비좁게 느껴질 만큼 거대한 황금빛 드래곤 한 마리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다.
“드르렁, 쿠울…….”
아르티어스는 지금 의도적으로 아주 얕은 수면을 취하고 있는 중이다. 정신줄을 놔버리고 깊은 잠에 빠지게 되면, 얼마나 오랜 시간 자게 될지 자신도 모를 정도였다. 그 만큼 그의 심신은 엉망진창인 상태였다. 특히 그 망할 놈의 호비트와의 대결이 그에게 안겨준 상처는 심각했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라곤, 놈을 완벽하게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는 정도일까…….
“아르티어스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아르티어스는 졸린 눈을 억지로 떴다. 그러자 공동 입구에서 조심스런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고 있는 그랜딜 공작의 모습이 보였다.
“크아아앙~.”
단순하게 하품을 하는 동작이었지만, 거대한 드래곤이 입을 쩍 벌리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그랜딜 공작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작업은 다 끝났느냐?>
“예, 주인님.”
순간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고 곧이어 그 빛이 멈췄을 때…, 그곳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한 아르티어스가 서있었다. 그는 그랜딜 공작을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리 줘 보거라.”
“여기 있습니다.”
목록을 살펴보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그랜딜 공작이 말했다.
“지금까지 주인님께서 보유하고 계시던 분량의 10배는 족히 넘어갈 정도입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퉁명스런 어조로 대꾸했을 뿐이다.
“쓸데없는 설명은 필요 없다.”
“…….”
한동안 꼼꼼히 목록을 살펴보던 아르티어스가 중얼거렸다.
“역시…, 창고가 있어. 비밀창고가…….”
그 말을 끝으로 팟 하는 소리와 함께 공동에서 아르티어스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어딘가로 공간이동을 한 것이다.
어린 드래곤의 레어로 온 아르티어스는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비밀창고가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예전과 달리 제대로 수색작업을 시작했다. 우선 마법을 이용해서 레어 안에 뭔가 마법장치가 되어있는 것은 아닌지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탐지마법에 걸리는 것이라고는 여기저기 벽 쪽에 설치되어 있는 공간이동 마법진이 전부였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아버지한테 슬쩍 물어둘 걸.”
아무리 말썽꾸러기 아들이기는 했지만, 자신이 물어봤다면 알려주지 않을 아버지는 아니었다. 아니, 마법 연구를 위해 재료가 필요하다는 아들에게, 자신에게 없는 재료라면 어떻게든 만들어서라도 구해서 줬을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투덜거리며 직접 레어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묘한 기계장치를 찾아낸 것은 그의 예상과 달리 의외로 빨랐다. 서재를 뒤지던 그의 눈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스위치 한 개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흐흐, 이렇게 쉽게 찾아낼 수 있을 줄이야! 진작에 찾아볼 걸.”
희열에 찬 웃음을 흘리며 급히 스위치를 누르는 아르티어스.
스르르륵!
그러자 뭔가가 긁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어디지?”
재빨리 고개를 돌리는 아르티어스의 눈에 벽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그건 이동마법진 앞을 감싸고 있던 벽이 움직인 것이었다.
“이럴 수가…….”
다시 한 번 더 스위치를 눌러보는 아르티어스. 그가 스위치를 누를 때마다 구멍이 뻥 뚫린 벽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게 비밀의 방문을 여는 스위치였군. 그렇다면 이 방에만 스위치가 4개나 있다는 소리잖아. 마법진이 4개니까 말이야.”
김샜다는 듯 중얼거리는 아르티어스는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101개의 마법진이 깔려있으니, 그 문을 여는 스위치만 101개가 있을 것이다. 그걸 다 찾아야 하나? 물론 그런 멍청한 짓을 하고 있을 아르티어스 옹은 절대로 아니었다.
* * *
“100개 다 찾았습니다, 어르신.”
아르티어스에게 한대 쥐어 박힌 어린 드래곤이 그걸 다 찾아냈다.
“얼라, 100개뿐이야? 하나가 더 있을 텐데.”
“하, 하나가 더 있다구요?”
“그래. 하나가 더 있지. 내일 해질 때까지 시간여유를 주마. 만약 그때까지 하나를 더 찾아내지 못하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결코 쉬운 게 아니라는 걸 이 몸께서 친히 가르쳐 주마.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어르신.”
꼬맹이 녀석은 마치 꽁지에 불이 붙은 닭 마냥 팔딱거리며 뛰어다녔다. 그러다 혼자서는 힘들 것 같자 자신이 거느린 모든 노예들까지 동원해서 레어 전체를 뒤졌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아르티어스는 희미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정도로 열심히 찾는다면, 분명히 남은 스위치 하나를 찾아낼 것이다. 물론 없다면 찾아내지 못하겠지만…….
느긋한 표정으로 일몰을 감상하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내심은 얼굴과는 달리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꼬맹이 놈이 전력을 다해 레어 안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도 남은 1개의 스위치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스위치가 원래 없을 수도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니야. 스위치는 분명히 있어.’
기계장치의 모양이야 여러 수천가지로 변형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찾아온 100개의 스위치 모양만 해도 가지각색이 아닌가. 그런 만큼 숨겨진 스위치를 아직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정말 있을까? 어쩌면 스위치 따위는 없을지도 몰라. 그런데 마법진은 101개인데, 왜 스위치는 100개밖에 없는 거지? 스위치가 아닌 마법장치라도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뒤져도…….’
여기까지 생각하던 아르티어스의 눈에 붉게 타오르며 침몰해 가고 있는 태양이 보였다. 일몰 때라 그런지 태양만이 아닌 구름까지, 하늘 전체가 다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다. 마치 하늘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아르티어스의 머리를 쏜살처럼 스쳐지나가는 뭔가가 있었다.
“맞아. 바로 그거였어!”
태양도 붉고, 구름도 붉고 하늘 전체가 붉다. 그러다 보니 원래 붉은 것이 어느 놈인지 당최 헷갈린다. 만약 태양이 스위치라면, 저런 방식으로 숨겨놓으면 되지 않을까?
“맞아. 훔친 말을 숨기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말들 사이에 숨기고, 소는 소들 사이에 숨기는 게 진리지. 그렇다면 남은 1개의 스위치는 스위치 사이에 숨기고, 마법진은 마법진 사이에 숨겨져 있겠지. 안 그렇습니까? 아버지.”
아마 아르티엔이 살아있다면, 아르티어스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이렇게 대답했으리라.
『그걸 이제야 깨달았냐? 이 닭대가리야.』
석양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 아르티어스의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레어 안으로 들어온 아르티어스는 어린 드래곤을 불러 물었다.
“찾았냐?”
그러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어린 드래곤의 표정이, 그야말로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직전의 상태처럼 왈칵 일그러졌다.
“저…, 아, 아직…….”
“그만하면 됐다. 가서 쉬도록 해라.”
몇 대 쥐어 터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어린 드래곤은 멍한 표정으로 아르티어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아르티어스는 부드러운 어조로 다시 말했다.
“수고했다. 가서 푹 쉬도록 해라. 하루 종일 고생했으니 뭐 좀 먹고…….”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서는 어린 드래곤. 녀석으로서는 왜 갑자기 이 성질 나쁜 드래곤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