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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일어난 라이는 평소와 달리 세수를 끝낸 다음, 곧바로 가죽갑옷부터 착용했다. 갑옷은 질긴 트롤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투박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아주 실용적이고 튼튼했다. 더군다나 몬스터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의 타격점을 생각해서, 폭이 좁은 철판을 갑옷 위에 이리저리 덧대어 충격이 분산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갑옷의 무게에 비했을 때, 둔기 공격에 대한 방어력은 꽤나 뛰어난 편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칼과 같이 날카로운 무기에는 의외로 쉽게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부분에 대한 방어까지 고려한다면 갑옷이 너무 무거워지므로, 그 부분은 아예 포기했던 것이다. 즉, 이 갑옷은 몬스터 전용의 갑옷이었지, 사람과의 전투는 아예 포기한 갑옷이라는 말이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기에, 마을 소년들 대부분이 이런 갑옷을 입고 있었다.
라이는 습관적으로 허리에 장검을 찬 다음, 단검 1자루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평상시 같았으면 이 정도 무장이면 충분했겠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단검 2자루를 더 꺼내 양쪽 장화 속에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방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화살들을 몽땅 다 집어들어 예비 화살통 안에 꽉꽉 쑤셔넣었다.
이 정도 무장이면 평소 사냥을 갈 때 준비하는 것에 비해 거의 3배쯤 되는 양이다. 하지만 라이는 이 정도로도 모자라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지금까지 마을을 벗어나 먼 길을 떠나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오늘이 바로 막내 공자가 아카데미를 향해 출발하는 바로 그날이었다. 그리고 라이가 생애 처음으로 영지를 벗어나게 되는 역사적인 날이기도 했고.
일주일쯤 전, 3명의 악동들이 가출해 버린 사건으로 인해 마을은 뒤숭숭한 상태였다. 물론 라이에게도 추궁이 들어왔었다. 그놈들이 너한테 뭐라고 한 거 없었느냐면서. 하지만 라이는 딱 잡아뗐다. 함께 가출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지만, 단호히 거절했다고 말이다. 홀로 계신 아버지를 놔두고 몰래 도망칠 수는 없었다고.
악동들의 아버지들은 즉시 백작에게 휴가를 받아 아들놈들을 잡아오겠다며 마을을 떠났다. 그런데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는 걸 보면, 녀석들은 탈출에 성공을 한 것인지도…….
“아냐. 결국에는 잡혀 올 거야. 튀어봤자 벼룩이지. 거기에서 어디로 튀겠어? 내가 생각 잘 했지. 암.”
방을 나서기 전, 라이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았던 방을 감회 어린 시선으로 천천히 둘러봤다. 낡은 침상 하나에 손때 묻은 테이블 하나가 가구의 전부였다. 초라하다고 할 만큼 단촐한 모습이었지만, 어찌되었든 자신이 15년을 살았던 정이 듬뿍 든 방이다. 객사(客死)를 당하든지, 아니면 훌륭한 새 주군을 찾아 그의 밑으로 들어가든지.
자신의 미래가 어떤 형식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라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을 나섰다. 오랜 꿈이 오늘에야 이뤄지는 것이다.
“일어났느냐?”
“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버지.”
“앉거라. 먼 길을 떠나려면 속이 든든해야 하는 법이다.”
식탁 위에는 아침식사가 거나하게 차려져 있었다. 물론 호화로운 식사라는 말은 아니다. 아침에는 전날 저녁에 먹다 남은 것들로 대충 떼우고 일터로 나가는 게 보통이었지만, 오늘은 따끈한 식사가 차려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 아버지는 이걸 만들기 위해 평소보다 훨씬 더 일찍 일어나서 음식을 만들었음에 틀림없었다.
그걸 느낀 라이는 눈물이 핑 도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탁자에 앉기는 했지만, 아버지에게 뭐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평소에도 그리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 사이다. 더군다나 요즘 들어서는 더욱더 반항적으로 아버지를 대해왔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떠나는 마당이라고 갑작스럽게 아버지에게 살가운 대화를 꺼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부자간의 식사는 말없이 진행되었다.
식사를 끝낸 라이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이는 문가에 걸려 있던 두터운 로브를 집어들었다. 아버지가 쓰던 걸 물려받은 거였기에 꽤나 낡은 물건이기는 했지만, 추위를 막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이만…, 가볼게요, 아버지.”
아버지는 문밖으로 나가려는 라이의 어깨를 다급히 붙잡으며 말했다.
“이건 가져가야지.”
아버지가 건넨 것은 제법 묵직해 보이는 자루 한 개였다.
“이게…, 뭡니까?”
“가면서 먹을 음식들을 좀 챙겼다. 물론 식량이 배급되기는 하겠지만, 따로 가져가는 게 좋을 게다. 네 나이 때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픈 법이니까.”
“고맙습니다, 아버지.”
“그래, 몸 건강하거라.”
라이는 활과 화살, 그리고 식량 자루를 등에 지고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이때 등 뒤로 아버지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이거다 싶을 때는 최선을 다하거라. 부디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빈다.”
아버지가 걱정스런 시선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건만, 야속한 아들놈은 단 한 번도 고개를 뒤로 돌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버렸다.
“영악한 놈이니 잘 해내겠지.”
라이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후에도, 아버지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명 사이로 인마(人馬)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인다. 머리를 맞대고 사이좋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뭔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을 가지고 가지 않는 게 안전하다니까 그러네요.”
“자네, 이미 결정을 내린 걸 가지고 계속 그럴 건가? 공자님께서 가시는데 그 먼 거리를 도보로 걸어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자신이 생각해도 이 정도 이유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그는 곧이어 말을 이었다.
“여차하면 그때 말을 포기하면 되지 않겠나. 몬스터들이 말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그 순간을 활용해서 탈출할 수도 있고 말일세.”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잠깐!”
쑤군거리던 사내들 중 한 명이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는 손을 들어 상대방의 말을 가로막았다. 잠시 후, 사내는 다가오는 사람이 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서 오너라, 라이.”
짙은 턱수염과 구레나룻 때문에 얼굴의 윤곽조차 알아보기 힘든 사내가 라이를 향해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짙은 턱수염 탓에 입이 더욱 빨갛게 보인다.
“안녕하세요, 헤슬러 아저씨.”
마틴 헤슬러 남작은 백작이 총애하는 가신들 중 한 명이다. 그의 곁에 서 있는 3명의 기사들 역시 모두들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헤슬러보다는 무게감이 적었다. 그걸 보면 헤슬러가 호위대의 대장인 모양이다.
라이는 다른 기사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모두들 라이의 아버지 정도의 연배들이다. 백작은 제국을 탈출한 이래 제대로 된 기사들을 더 이상 영입하지 못했던 것이다.
“너는 저기에 있는 밤색 암말을 타도록 해라. 순한 녀석이니 다루기 편할 게다.”
라이는 말을 타고 갈 거라는 말에 흥분했다. 그는 말을 거의 타보지 못했던 것이다.
“우와, 말이다.”
라이는 순간의 선택을 정말 기가 막히게 했다고 생각했다.
‘역시 가출하지 않고 공자 일행에 묻어가기를 잘했어. 말까지 타게 될 줄이야.’
노회한 밤색 암말은 라이가 초짜라는 것을 금세 눈치 채고는 얕잡아보고 툴툴거렸지만, 녀석의 내심을 알 리 없는 라이는 말을 진정시키고자 목을 쓰다듬어 줬다. 녀석은 라이도 잘 알고 있는 말이었다. ‘팔로아’라고 불리는 나이가 제법 든 암말로서, 성질이 순해서 초보자도 다루기 쉬운 녀석이다.
사실, 아버지를 통해 백작 저택에 있는 말들을 몇 번 타보며 승마술을 배우기는 했지만, 그리 뛰어난 실력은 아니었다. 하급 기사의 아들이 마구간의 말들을 대놓고 이용하기에는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라이의 온 정신이 암말에 집중되어 있을 때, 등 뒤에서 헤슬러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에 있는 짐이 네 거다. 말에 싣도록 해라.”
헤슬러가 가리킨 곳에 작은 보따리 2개가 끈으로 연결되어 말에 싣기 편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보따리의 무게는 꽤나 묵직했다. 보따리에서 식욕을 돋우는 향긋한 냄새가 솔솔 풍겨 나오는 것을 보면 식량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라이가 보따리를 말에 싣고 있을 때, 그의 나이 또래의 소년 하나가 저택에서 걸어나왔다. 녀석의 이름은 죠셉. 라이보다 더 근육질의 몸매를 지니고 있었고, 키도 좀 더 컸다. 녀석은 라이를 보더니 깔보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이거 라이 아냐, 너도 가냐?”
“응.”
“호오, 놀라운데? 말을 타고 간다고 들었기에, 네가 갈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거든. 너는 말을 탈 줄도 모르잖아.”
이죽거리는 죠셉의 말투에 라이의 기분은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놈에게 뭐라고 쏘아주지는 못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무기를 가지고 싸운다면 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결투도 아니고, 애들 싸움에 칼을 들고 설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체격적인 조건에서 놈이 압도적인 데다가, 더더욱 안 좋은 것은 놈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보다 훨씬 직위가 높다는 데 있었다.
“조금은 탈 줄 알아.”
“조금? 흥! 그 정도 가지고 공자님을 따라갈 생각을 하다니. 너, 하루 종일 말 타본 적 있어? 아마 엉덩이가…….”
슬슬 시비를 걸고 있던 죠셉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왜 갑자기 녀석이 말문을 닫았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라이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더 이상 짜증나는 놈과 엮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 싸워봤자 좋을 게 없지. 성격 좋은 내가 참아야지. 젠장.’
속으로 투덜거리며 하던 일을 계속하는 수밖에. 하지만 나빠진 기분은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다.
이때, 라이의 등 뒤에서 매력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이, 오랜만이구나.”
‘이 목소리는?’
라이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자신의 등 뒤 한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 아름답다고밖에는 표현하기 힘든 소년이 서 있었다. 길게 기른 금발머리. 백작가의 자식이라는 훌륭한 혈통에 어울리는 외모를 지닌 소년이었다. 이렇게 몰락하지만 않았다면, 라이는 서슴지 않고 그를 자신의 주군으로 선택했으리라.
‘젠장, 이래서 내가 만나기 싫었다고.’
초롱초롱한 아름다운 눈망울만 바라봐도 녀석과 같이 있고 싶다는 강한 유혹이 밀려온다. 죠셉은 거기에 홀라당 넘어가 버렸지만, 라이는 유혹을 참아냈다. 그는 좀 더 현실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라이가 강한 유혹을 느꼈을 만큼, 막내 공자는 괜찮은 성품의 소유자였다. 공자의 나이 많은 형들은 둘 다 아버지가 떵떵거릴 때 태어나서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내서 그런지, 그야말로 인간이 덜 된 상태였다. 하지만 불우한 시절에 태어난 막내 공자는 달랐다.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기사들의 애환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공자님.”
금발머리는 불만 어린 어조로 라이에게 말했다.
“우리 사이에 갑자기 왜 그래? 예전처럼 그냥 짐이라고 불러.”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공자님. 엄연히 신분이라는 게 있는데 말입니다. 공자님께 그런 말을 했다는 게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또다시 혼구녕이 나는 건 저란 말입니다.”
“위너스 경에게는 내가 잘 말해 둘게.”
“말로 해서 통할 상대였다면, 예전에 그렇게 하셨겠죠.”
그 말에 둘의 대화가 갑자기 끊겼다. 짐, 아니 제임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의 아버지가 고집불통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고지식하다는 것을 말이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유연한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면, 백작의 총애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누가 뭐라고 해도 백작의 가신들 중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검술의 소유자가 바로 그였으니까.
이때, 헤슬러 남작이 공자에게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갈 길이 멉니다, 공자님. 얘기는 가는 길에 하시지요.”
백작가의 막내아들이 먼 길을 떠나는데 호위하는 사람이 겨우 기사 4명에 시종 2명이라니……. 그 숫자만 봐도 백작가가 얼마나 몰락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고 했던가? 공자가 말에 오를 때 옆으로 살짝 벌어진 로브 자락 사이로 고풍스런 문양이 새겨진 갑옷이 얼핏 보였다. 과연 과거 대제국의 백작가 아들이 입고 있을 만한 고급스런 갑옷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