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작
크라레스 제국을 탈출한 백작이 둥지를 튼 곳은 ‘오츠아’라는 북쪽 변방에 위치한 왕국이었다. 영토는 꽤나 넓은 편이었지만, 거주하는 인구수는 보잘것이 없는 약소국으로서, 영토의 대부분이 아직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불모의 대지였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울창한 삼림지대. 그나마 다행이라면 저 남쪽의 무더운 기후에 조성된다는 밀림과는 달리 나무들이 조밀하게 자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렇듯 말을 타고 이동할 수가 있는 것이었지만.
헤슬러 남작은 일행들을 독려하여 꽤 빠른 속도로 전진했다. 물론 서두른다고 서두르고는 있었지만,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산길을 가야 했기에 속도는 생각만큼 그리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 종일 말을 타고 이동하다 보니, 어느덧 일행들은 라이가 지금껏 단 한 번도 와보지 못한 지역에 들어서 있었다.
“오늘은 여기에서 야영하는 게 좋겠습니다, 공자님.”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헤슬러 경.”
여기서 야영한다는 말에 라이는 황급히 말에서 내려 엉덩이부터 주물러댔다. 말을 탄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엉덩이가 아픈 것인 줄은 지금껏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봐, 라이. 네 엉덩이가 먼저가 아니라, 말부터 돌보는 게 먼저야. 알겠냐?”
라이가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들 말을 돌보고 있었다. 라이는 말을 타고 나와서 노숙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하는 짓을 주의 깊게 훔쳐보고는 그대로 따라서 했다.
말 등에 매여 있는 묵직한 안장을 풀자마자, 땀에 젖은 말 등이 드러나며 악취가 진동을 한다. 하루 종일 환기도 되지 않고 땀에 절어 있었기에 그런 모양이다. 씻겨 주는 게 제일 좋겠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않으니 모두들 닦아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말 등을 깨끗이 닦아준 다음에는, 밤새 말이 뜯어먹을 수 있도록 풀이 많은 곳을 골라 고삐를 묶어줬다. 말이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후에야 사람이 쉴 수 있었다. 저마다 보따리에서 먹을 걸 꺼내 우물거린다.
하루 종일 말을 타고 이동하면서, 틈틈이 보따리에서 먹을 걸 꺼내 요기를 했었다. 그런 만큼 저녁에 자기 전에는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라이는 기대했다. 하지만 모두들 요리를 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었다.
“저녁 식사 준비는 안 합니까?”
라이의 질문에 헤슬러 남작의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이 일대는 붉은머리 오크족의 영토다.”
붉은 흙을 이용해서 머리털을 장식하는 걸 즐기는 오크들이기에 편의상 붉은머리 오크라고 불렀다. 겨우 하루 만에 붉은머리 오크족의 영토까지 들어왔다니. 말이라는 동물을 이용했을 때, 이동속도가 얼마나 빠른지를 새삼 절감하는 라이였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놀라운 것이고, 라이의 마음속에 떠오른 의문은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오크의 영토라서 왜? 오크의 영토와 식사 준비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라이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듯하자, 외곽 쪽에 앉아 있던 루크가 끼어들었다. 그는 여기 있는 기사들 중에서는 가장 인상이 좋은 편이었고, 실제 성격 또한 그러했다. 루크는 입 안에 들어 있는 음식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 때문에 발음이 정확하지는 않았다.
“오크는 불을 겁내지 않아. 그런 만큼 요리를 한답시고 불을 피워놓으면 그건 바로 ‘우리들이 여기에 있으니 습격해 주쇼’하고 오크들에게 알려주는 거나 다름없는 거지. 이제 알겠냐?”
“아, 고마워요, 루크 아저씨.”
루크는 아직 입 안에 들어 있는 음식을 다 삼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루에서 커다란 소시지 한 덩어리를 꺼내 크게 잘라내며 말했다.
“너는 야영을 해보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런 기초적인 상식조차 모르고 있는 걸 보면.”
“예, 아저씨. 아버지를 따라서 사냥은 몇 번 다녀봤지만, 야영은…….”
얘기를 듣고 있는 헤슬러 남작이 얼굴을 찌푸리는 걸 보며, 라이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마 헤슬러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경험이 적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야영을 하면서 불을 피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불빛을 보고 달려드는 몬스터들이 꽤나 많거든. 특히 오크들이 문제지. 녀석들은 늑대만큼이나 냄새를 잘 맡으면서도 전혀 불을 두려워하지 않거든.”
대충 식사를 마친 타일러가 주섬주섬 자신의 짐을 집어 들더니 나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왜 저러는 거지? 주변을 둘러보기라도 할 생각인가?’
입 안에 든 음식을 우물거리며 라이가 의아해 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짐을 들고는 나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무 한 그루에 한 명씩 올라갔지만, 헤슬러 남작만은 공자를 도와 그와 함께 올라갔다. 밤새도록 그를 옆에서 지켜주겠다는 뜻이리라.
제일 먼저 나무 위로 올라간 타일러가 가지 위에 앉아서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뻗었다. 눈까지 지그시 감는 걸 보면, 정말 나무 위에서 자려는 모양이다.
‘젠장. 나무 위에서 자야 할 줄이야…….’
눈치를 보던 라이는 어쩔 수 없이 낑낑거리며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안장을 제외하고 말에 실었던 짐들까지 모두 다 등에 지고 있는 데다가, 몸에는 묵직한 갑옷까지 걸치고 있으니 나무를 타는 게 쉽지는 않았다.
아무리 몸놀림이 날렵한 그라고 하지만, 이렇게 짐들을 잔뜩 짊어지고 나무를 오르는 건 정말 어려웠던 것이다.
그때, 그의 눈에 옆나무를 오르고 있는 조셉 녀석의 모습이 들어왔다. 녀석은 덩치가 큰 걸 자랑이라도 하듯 아주 쉽게 쓱쓱 올라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도 낑낑거리며 올라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라이의 눈에는 그가 아주 쉽게쉽게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제기랄!”
‘저 돼지 같은 녀석도 올라가는데, 내가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지.’
라이는 악에 받쳐서 사력을 다해 나무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겨우겨우 다른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는 정도의 높이에까지 올라섰을 때쯤, 라이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결국에는 해냈다는 뿌듯한 성취감.
라이는 이마에 흥건히 솟아오르는 땀을 손으로 훔치며 자부심 어린 눈길로 주위를 둘러봤다. 어른들 중에서 아무라도 자신에게 칭찬이라도 해주길 잔뜩 기대하며.
하지만 라이는 그런 헛된 기대는 금방 버려야 했다. 생각해 보니 주위에 있는 어른들은 모두 다 자기 아버지뻘인 중년의 기사들이다. 더군다나 그들이 입고 있는 갑옷의 상체는 라이의 것보다 훨씬 더 두껍고 무거운 철판갑옷이었다. 그런 아저씨들도 모두 다 나무를 탈 때 땀 한 방울 안 흘린 것처럼 보이는데, 어찌 새파란 자신이 힘들다는 내색을 할 수 있겠는가.
라이는 행여 다른 사람이 들을 세라 낮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작부터 이렇게 고난의 연속이어서야, 앞으로의 일정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라이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을 흉내 내어 자세를 잡았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굵은 가지 위로 다리를 쭉 뻗으니 그런대로 잠을 잘 수 있을 것도 같기는 했다. 하지만 평소 잠을 자면서 몸부림이 심한 라이였기에, 혹시 밑으로 떨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떨어질 테면 떨어지라지. 죽기밖에 더하겠어.’
이때, 헤슬러 남작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첫 불침번은 타일러가 서.”
“예.”
헤슬러 남작은 불침번을 설 순서를 지시했다. 물론 공자는 그 순서에서 당연히 빠져 있었다.
점차 어둠이 짙어오기 시작하며, 라이의 기념할 만한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나무 위에 자리잡은 라이는 곧이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너무나도 피곤했기 때문이다.
헤슬러 남작은 언제 말을 상실할지 알 수 없었기에, 말이 있을 때 최대한 많은 거리를 이동하기로 작심한 모양이다. 그렇기에 그는 필요 이상으로 일행을 닦달하며 강행군을 감행했다. 건장한 라이가 겨우 하루 동안의 여행으로 녹초가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큭!”
얼굴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통증에 라이는 잠에서 깼다. 달빛조차 나무 그늘에 가려 있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다. 잠결에 벌떡 일어서려 했던 라이는 무게 중심이 흔들리며 하마터면 땅바닥으로 추락할 뻔했다.
“허억!”
한순간에 잠이 확 깬다.
이때, 저 앞쪽 어둠 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일어났냐?”
“예? 아, 예.”
“1시간 불침번 서고 루크와 교대해라.”
“알겠습니다.”
“주위를 세심히 살피고,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나를 깨워. 알겠냐?”
“예.”
방금 전에 땅바닥에 떨어져 죽을 뻔한 탓에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고 있다.
“그나저나 엄청나게 어둡네.”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일부러 약간 소리를 내서 중얼거려 보는 라이였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더니, 시간이 지나자 어둠에 눈이 익어 어렴풋하기는 했지만 차츰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절반쯤은 눈으로 보고 나머지 절반쯤은 귀로 듣고 있다고 봐야 했다.
짙은 어둠 때문에 주위가 잘 보이지 않다보니, 청각이 극도로 예민해진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날벌레소리, 바람 때문에 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가지 사이로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소리…….
언제부터 자신이 졸기 시작했는지는 라이도 몰랐다. 워낙 좁은 나무 위에 걸터앉아 있다 보니, 잠에서 깨어난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샌가 다시금 잠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퍽!
“크억!”
배가 터져나가는 듯한 지독한 고통. 너무나도 극심한 고통에 라이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할 지경이었다. 배를 감싸쥔 채 상체를 앞으로 엎드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등 뒤로 느껴지며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퍽!
“헉!”
그제야 라이는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두들겨 패고 있었던 것이다. 짙은 어둠 속이라 상대가 뭐로 자신을 두들기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모, 몬스터?’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생각을 바꿨다. 몬스터가 왜 자신을 두들겨 패고만 있겠는가. 진짜 몬스터라면 처음부터 죽이려고 들었지, 이렇게 때리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때, 갑자기 상대가 자신의 목줄을 움켜쥐고 힘껏 조여왔다.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컥컥…….”
어둠을 뚫고 냉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헤슬러 남작의 목소리였다. 라이는 소름이 쫙 끼쳤다. 지금까지 이렇게까지 냉정한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헤슬러 남작은 라이가 졸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불침번을 서면서 한번만 더 졸았다가는 죽여버릴 테다. 알겠냐?”
라이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목줄을 움켜쥐고 있는 손의 힘이 풀렸다.
“너는 동료들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렸다. 네가 병사라면 이미 패죽여 버렸겠지만, 아직 어리다는 점을 감안하여 살려주는 거다. 다시는 불침번을 설 때 졸지 마라.”
“예, 예.”
라이는 온몸이 아리는 고통 때문에 밤새도록 신음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껏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라이였기에, 어젯밤에 벌어진 일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까지 시종을 할 필요가 있을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고 해서 순순히 돌려보내줄까? 아니, 돌아가라고 한다고 해도, 누군가가 영지까지 안내해 줄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도 모르는 그가 영지로 돌아갈 수 있을 리 없다. 더군다나 온 사방에 몬스터들이 득실거린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까지 단 한 마리도 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어쨌건 혼자 돌아가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길이었다.
“젠장, 두고 보자. 두고 봐. 헤슬러 남작, 언젠가는 오늘 일을 반드시 갚아 줄 거야.”
물론 대놓고 떠들어 댄 것은 아니다. 행여 누가 들을 세라 입속으로 중얼거린 말이다. 자신에게 힘이 없다는 게 이렇게나 서러울 줄이야.
‘어떤 짓을 해서라도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울 거야. 반드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지만 그 자신도 현재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급 기사의 자식인 자신이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울 수 있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