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4화 (700/930)

평소 고지식한 아버지라고 씹어대기는 했지만, 그래도 책임감이 강한 아버지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꽤나 컸었던 라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에게 기댈 수도 없었다.

혹독했던 첫날, 헤슬러는 꼬맹이들의 정신을 다잡아주기 위해(안 그러면 앞으로의 여행이 꽤나 힘들어질 테니까) 좀 가혹하게 몰아붙인 감이 있었지만, 그게 라이에게는 오히려 약이 되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해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라이는 급속도로 현 상황에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강행군을 해도 그는 더 이상 불침번을 서면서 졸지 않았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힘들더라도 무조건 일어서 버렸기 때문이다.

말을 타는 것에 익숙하지도 않은데다 매일같이 강행군을 하고 있다 보니 아무리 라이의 몸이 튼튼하다고 해도 무리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엉덩이와 허리가 무지 쑤시고 아팠다. 말의 진동을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부위이기 때문이다.

“아이고, 허리야…….”

한 손으로 나뭇가지를 잡아 균형을 잡으니, 나무 위였지만 허리 운동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허리를 빙빙 돌리기도 하고, 또 다른 손으로 뭉친 근육을 주무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눈으로는 주위의 깊은 어둠 속을 샅샅이 훑어나간다. 마을을 떠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라이는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갑자기 라이가 고개를 홱 돌렸다. 어디선가 뭔가 이질적인 소리가 나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급히 숨소리조차 죽이는 라이.

부시럭, 부시럭…….

불침번을 서면서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가 낮게 들려온다. 순간, 라이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뭔가가 저쪽에 있는 거 같아.’

하지만 설마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라이는 조심스럽게 아래쪽으로 고개를 내렸다. 나무 밑에는 말들이 매여 있었다. 몇 마리는 나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마침 2마리는 달빛에 몸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어둠 속에 적응된 눈이었기에 미약한 달빛임에도 불구하고, 말들의 표정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녀석들은 풀을 뜯지 않고 귀를 쫑긋거리는 것이 뭔가를 느낀 듯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야.’

당황하기는 했지만 라이는 지시받은 대로 행동했다. 그건 아마도 몬스터의 흉폭한 모습을 아직 보지 못했기에 얻어진 침착함인지도 모른다. 라이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미리 준비해 뒀던 작은 돌멩이를 한 개 꺼내어 헤슬러 남작을 향해 던졌다. 나무 그늘에 가려 있어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그가 어디쯤에서 잠이 들었는지 확인해 뒀었던 것이다.

곧이어 헤슬러 남작의 피로에 지친 듯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동쪽 방향에서 뭔가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말들의 움직임도 뭔가 수상하고 말입니다.”

헤슬러가 급히 밑을 내려다보니 말들이 긴장하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말들은 뭔가에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게 분명했다.

‘녀석, 주위 경계를 제대로 했군.’

첫날, 벼르고 있다가 제대로 걸려들었을 때 박살을 내놓은 게 꽤나 좋은 효과를 내고 있었다. 사실 이런 식의 신병 길들이기 쯤이야, 오랜 세월 백작 밑에서 기사 생활을 해온 헤슬러 남작에게는 흔히 해오던 일이었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길을 들이려면 초반에 제대로 하는 게 최고다. 나중에 뒤늦게 길들이려고 해봐야 그때는 이미 늦다. 이미 타성에 젖어버려 제대로 된 습관을 몸에 붙여주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헤슬러는 급히 사람들을 모두 다 깨웠다.

“밑에 뭔가 있다.”

모두들 화살을 장전하고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겨눈다. 여차하면 바로 발사할 수 있도록. 놈도 이쪽의 부산함을 느낀 것인지 움직임을 멈춰버렸다. 그때부터 기나긴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상대가 뭔지를 확인하기 위해 불을 피울 수도 없었다. 상대가 혹여 오크라면, 이쪽의 위치를 알려줄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미지의 적이었다. 다시금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나무를 피해 숲의 밑바닥까지 내려온 달빛에 적의 모습이 잠깐이기는 했지만 완벽하게 드러났다.

2.5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장대한 체구, 새파랗게 번쩍이는 두 눈, 개처럼 생긴 길쭉한 주둥이, 길게 솟아나와 있는 무시무시한 송곳니. ‘숲의 유령’이라고 불리는 트롤이었다.

트롤은 아주 강한 몬스터였다. 거기에다가 놈의 회복력은 너무나도 뛰어나서 웬만한 상처쯤은 조금만 쉬면 회복될 정도이기에 상대하기가 아주 까다롭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면, 놈은 무리를 짓지 않는 몬스터라는 사실이었다. 즉, 저 녀석 하나만 상대하면 된다는 말이다.

잠시 긴장하기는 했지만, 트롤을 활로 겨누고 있자니 점차 마음이 안정된다. 사람들이 트롤을 ‘숲의 유령’이라고 부르는 것도 다 놈의 행동이 워낙 은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무리를 짓지 않는 육식동물들이라면 당연한 것이다. 대놓고 쫓아 다녀봐야 잡혀줄 사냥감은 단 하나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트롤의 은밀한 접근을 자신은 눈치 챘다. 라이의 얼굴에 짙은 자부심이 어렸다.

‘유령이라고 하더니, 별것도 아니잖아.’

모습을 포착하지 못했을 때나 유령 소리를 듣는 것이다. 놈은 이미 포착되었고, 지금 모두들 놈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다. 화살촉에는 대형몬스터를 상대하기에 적합하도록 상처 회복을 방해하는 독약까지 발라져 있다. 제아무리 트롤이라고 해도 화살세례를 받는다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라이는 침착하게 헤슬러 남작의 발사 명령을 기다렸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활을 겨누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트롤은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고 있는 중이다. 눈치 빠른 말들이 트롤의 접근을 파악하고는 겁에 질려 동요하고 있었지만, 트롤은 느긋했다. 도망쳐 봤자, 곧바로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인다.

슉!

그때, 갑자기 화살 한 발이 트롤을 향해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다른 기사들도 일제히 시위를 놨다. 라이만이 시위를 놓을 타이밍을 놓친 채 멍하니 활을 겨누고 있을 뿐이다.

퍽!

첫발은 트롤의 몸에 꽂혔지만, 뒤이어 날아간 다른 화살들은 모두 다 빗나갔다. 화살에 맞자마자 트롤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런 제기랄! 어떤 새끼가 쐈어?”

헤슬러 남작이 내뱉는 욕설이 들려왔다. 사실, 그의 명령이 있기 전에 화살을 쏴서는 안 됐던 것이다.

만약 놈이 일반적인 육식동물이라면, 그것도 단독 생활을 하는 육식동물이었다면 상황은 여기에서 끝이 났을 것이다. 화살을 한 대 맞은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을 테니까. 그들은 상처 입기를 원하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그로 인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롤은 달랐다. 녀석들은 상처회복력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다. 그리고 그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놈들은 단독 행동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적과의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주 호전적인 몬스터였다.

상처 입은 트롤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다. 어두운 데다가 속도까지 빠르다 보니 놈에게 활을 겨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때, 라이가 놀라서 입을 쫙 벌리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 그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트롤이 몸을 날리더니, 몽둥이를 들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나뭇가지를 잡고 그 탄력을 이용해 공중으로 뛰어올랐던 것이다. 커다란 덩치를 지닌 대형급 몬스터의 움직임이라는 게 도저히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민첩함이다.

붕~ 하고 놈의 몸이 하늘 위로 솟구치더니, 그 상태에서 다른 나뭇가지를 한 손으로 잡고는 탄력을 이용해 더욱 높이 몸을 띄웠다. 덩치 큰 트롤이 마치 원숭이처럼 나무를 타는 모습에 라이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이는 자신이 나무 위에 있는 만큼 안전하다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이 왜 트롤을 ‘숲의 유령’이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면 절대로 그런 생각을 했을 리가 없었다.

트롤같이 덩치가 큰 몬스터들은 나무를 탈 줄 알더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걸어서 이동한다. 왜냐하면 나뭇가지가 몸무게를 못 이기고 부러지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나무를 타면, 사람에 비해 월등한 운동신경과 균형감각, 그리고 강인한 근력으로 원숭이만큼이나 재빨리 이동할 수 있었다. 즉, 트롤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나무 위는 결코 안전한 장소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젠장! 어디로 갔어?”

사람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눈치 챈 트롤은 무식하게 곧장 달려들지 않았다. 놈은 교활하게도 옆쪽으로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듯 싶더니 나무그늘 속으로 몸을 숨겨버렸다. 한밤중이다 보니 놈이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찾아낼 방법이 없다.

그때 헤슬러 남작은 트롤의 몸무게 때문에 흔들린 마지막 나무어림을 겨냥한 채 외쳤다.

“저 근처인 것 같다. 모두들 주의 깊게 살펴 봐. 리챠드는 오른쪽, 타일러는 왼쪽!”

모두의 시선이 한쪽 방향으로 집중되었을 때, 리챠드와 타일러는 각기 지시받은 대로 그 옆 부분을 훑었다. 워낙에 재빨리 움직이는 놈이다 보니 아직도 그곳에 있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이때, 타일러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10시 방향!”

모두들 일제히 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몽둥이를 치켜든 채 나뭇가지들을 징검다리 삼아 공간을 도약해 오고 있는 트롤의 무시무시한 모습을.

트롤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타일러 같은 노련한 기사조차도 자신의 코앞에까지 트롤이 돌진해 들어오자 눈을 질끈 감아버렸을 정도다.

하지만 이때, 신이 돌봤는지 트롤이 마지막 도약을 위해 밟은 나뭇가지가 우지끈 하는 굉음을 내며 부러졌다. 트롤은 몽둥이를 치켜든 자세 그대로 땅바닥으로 추락해 버리고 말았다.

퍼버벅!

“크아아악!”

밑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나뭇가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트롤이 나뭇가지 위로 떨어진 건지, 아니면 아래쪽에 돋아나 있는 작은 나무 위로 떨어진 건지…….

혼이 빠져버린 타일러를 제외한 다른 기사들은 아래쪽을 향해 저마다 화살을 날렸다. 물론 1발만을 쐈을 뿐, 재빨리 재장전 한 채 모두들 아래쪽을 주시한다.

“죽지는…, 않았겠죠?”

“겨우 7미터 높이다. 타격이야 좀 받았겠지만,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고 해서 죽지는 않아.”

모두들 긴장한 채로 주위를 살펴봤지만, 트롤의 움직임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놈이 물러난 모양이다.

10여 분 정도를 기다리던 헤슬러 남작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단검을 뽑아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일견 목숨을 내건 행동처럼 보였지만, 헤슬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대비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헤슬러를 제외한 모두가 활에 화살을 먹인 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는 가운데 초조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헤슬러는 아래쪽을 잠시 살펴보더니 곧바로 나무 위로 올라왔다.

“놈이 물러난 게 확실해. 타일러, 자네가 서 있는 나무의 아래쪽 가지가 부러져 있고, 거기에 피가 흠뻑 묻어 있는 걸 보면 아마 추락하면서 찔린 모양이야. 피의 양으로 보아 꽤 큰 상처를 입었음에 틀림없어.”

“먹이에 대한 집착이 강한 놈인 만큼, 새벽녘에 다시 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웬만큼 상처를 입었다 해도 그 시간쯤이면 충분히 회복이 될 테니까요.”

“내 생각도 그래. 어쨌건 지금은 좀 쉬어 두도록 해.”

“예.”

다른 기사들에게 그렇게 말한 헤슬러 남작은 이번에는 소년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으르렁거렸다.

“내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활을 쏜 놈이 누구냐?”

어둠 속에서 헤슬러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안 그래도 살기 어린 목소리로 질책하고 있는데, 그런 모습까지 보다 보니 라이는 실신할 지경이었다. 자기가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라이, 너냐?”

라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남작님. 저, 저는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죠셉, 너냐?”

“…….”

죠셉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자신이 두려움에 질려 화살을 발사했다는 것도 그 자신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지금껏 그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왔다. 마을 아이들 중에서도 백작의 자식들을 제외한다면 자신이 가장 강했다.

남을 두들겨 패며 괴롭힌 적은 많아도, 괴롭힘을 당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군다나 마을을 습격한답시고 왔던 몬스터들을 향해 화살을 쏴본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그런 자신이 트롤 따위를 보고 공포에 질리다니…….

사실 라이가 트롤의 모습을 보고 의외로 침착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모르는 게 약이라고, 녀석이 나무를 탈 줄 모를 거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죠셉은 달랐다. 그는 트롤이 나무를 엄청나게 잘 탄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라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나큰 공포에 떨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런 개새끼! 너구나.”

헤슬러 남작은 나무 밑으로 내려가더니 곧이어 죠셉이 있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정말 무자비하게 죠셉을 두들겨 팼다. 이번에는 운 좋게 넘어갈 수 있었지만, 또다시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동료들의 목숨이 날아가기에 적당히 봐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 제발 다시는 안 그럴게요. 흑흑…….”

죠셉이 이렇게 심하게 매질을 당한 적이 있었던가? 마을이라면 그의 아버지의 후광이 있기에 설혹 헤슬러 남작이라고 할지라도 죠셉을 이렇게 막 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 죠셉을 바로 잡아 놓지 않으면 자신의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헤슬러 남작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그의 손속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느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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