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6화 (702/930)

리챠드는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면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서두른 보람이 있었는지 어두워지기 전에 산꼭대기에 오를 수 있었다. 산 위에 올라온 일행들의 얼굴에 비로소 만족감이 어린다. 고생고생해서 올라온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산 위쪽에는 나무가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해도 키가 아주 작았다. 산 위쪽은 바위가 많은 돌산이었기에, 나무가 커다랗게 성장할 만큼 영양분이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지형조차 마음에 꼭 들었다. 정상부의 태반 이상이 십수 미터에 달하는 절벽으로 이뤄져 있었기에, 정상으로 올라올 수 있는 통로는 아주 좁았다. 방어전을 치루기에 정말이지 이상적인 지형이다. 지금까지와 달리 해가 지기만이 기다려질 뿐이다.

“오늘에야 놈에게 복수할 수 있겠구먼.”

“망할 놈. 오늘 밤이 네놈 제삿날이다!”

복수를 다짐하고 있는 일행들에게 헤슬러가 소리쳤다.

“자자, 모두들 진정하고 휴식을 취하도록 해라. 푹 쉬어둬야 밤에 힘을 쓰지.”

방어하기에 좋은 지형이었기에 그들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취사도구를 꺼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어 먹으려는 것이다. 큼직한 돌덩이 3개를 주워와 삼각형으로 놓고, 임시 화덕을 만든 뒤 그 위에 구리로 만든 솥을 올린다. 구리는 아주 무른 금속이라 얇게 가공할 수 있기에 쇠로 만든 것에 비해 가벼워서 여행용으로 들고 다니기에 적합했다.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자, 가지고 온 재료들을 집어넣어 끓이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스튜를 만들려면 오랜 시간 끓여 재료들이 뭉그러질 정도가 되어야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까지 참지 못했다.

“와아! 이게 얼마 만의 따뜻한 음식이야.”

“정말 맛이 기가 막히군요.”

“드실 만 하십니까? 공자님.”

“예, 맛있군요.”

“루크의 음식솜씨는 훌륭하지. 우리 마누라보다 훨씬 뛰어나거든.”

허겁지겁 먹다 보니 어느새 솥의 밑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 이제 어느 정도 배를 채웠으면 준비를 하자고. 자자, 어서 일어서!”

헤슬러는 일행들을 독려하여 트롤 사냥준비에 들어갔다.

“모두들 시야가 미치는 곳에 돌탑을 쌓아둬.”

오밤중에 불을 피울 수는 없다. 붉은머리 오크족의 영토는 벗어났지만, 이 일대에 다른 오크족이 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봉책으로나마 돌탑을 쌓아두는 것이다.

모두들 사방으로 흩어져 작은 돌들을 주워서 돌탑을 층층이 쌓기 시작했다. 다가오던 트롤이 돌탑을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지도록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어둠 속에서 놈이 접근해 오는 기척을 탐지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물론 녀석과의 격전이 시작되면 그때는 불을 피워야만 할 것이다. 야행성인 트롤이야 어둠 속에서도 자유롭겠지만, 사람은 불빛을 필요로 했으니까. 더군다나 이곳은 나무 한 그루도 없이 사방이 탁 트인 곳이라서 달빛도 훤히 비춰진다. 전날처럼 녀석의 위치를 포착하지 못해 화살을 쏘지 못하는 일 따위는 재현되지 않을 것이다.

만반의 대비태세를 갖추고 그들은 트롤을 기다렸다. 막간을 이용하여, 식량 주머니를 뒤적여 빵과 소시지를 꺼내 우물거리고 있던 타일러가 루크에게 물었다.

“이봐, 너 물통에 물 얼마나 있어?”

“반쯤 있을 걸. 그건 왜?”

“나도 반쯤 있는데, 그거 합치자.”

타일러의 제안을 이해할 수 없었던지 루크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합치자니?”

“그 아까운 피를 버릴 거야? 한 통 가득 놈의 피를 가져가면 꽤 짭짤하게 벌 수 있잖아.”

그제야 루크는 타일러의 제안을 이해했다. 트롤의 피는 상처회복용 물약인 포션의 핵심재료였고, 그 가격은 대단히 비쌌다. 그걸 물통에 담아가자는 말이다.

“내 몫은?”

“삼분의 일 줄게.”

“에게, 겨우 삼분의 일?”

“젠장! 나는 마을에 가서 물통을 새로 사야 된다고. 찝찝하게, 트롤 피를 넣었던 물통을 다시 쓸 수는 없잖아. 아니면 배분을 반반씩 나누고, 네 물통에 담든지.”

“알았어. 삼분의 일.”

“좋아.”

당사자인 트롤은 죽어줄 생각조차 않고 있는데, 그 둘은 벌써 피를 팔 궁리부터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헤슬러와 리챠드는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뭐라고 초치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괜히 부정탈까 봐서였다. 그만큼 상위급 몬스터인 트롤을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버려진다는 것

사위에 짙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을 때, 헤슬러는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온 희미한 냄새가 묘하게도 그의 코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냄새지?”

“냄새라니요? 무슨 냄새가 난다고…….”

코를 연신 킁킁거리던 리챠드가 돌연 벌떡 일어서며 짤막하게 외쳤다.

“오크다!”

돼지냄새와 비슷한 오크 특유의 냄새. 리챠드가 오크를 상대하며 몇 번이고 맡았던 냄새였다. 오크는 강인한 생김새와 달리 피부가 대단히 연약하다. 그렇기에 그들은 햇빛이 강한 낮 동안에는 거처에서 숨어 지내고, 해가 모습을 감췄을 때만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때문에 동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놈들이 처음 밖으로 쏟아져 나올 때가 가장 냄새가 심했다. 그 덕분에 그들이 오크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젠장, 근처에 오크의 소굴이 있음에 틀림없어. 이 일을 어떻게 하지?”

“섣불리 움직이는 게 더 위험해. 놈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까.”

“말에 재갈을 물려라. 소리를 내지 못하게 막아!”

허둥지둥 대책을 강구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오크는 강인해 보이는 근육질의 몸과는 대조적으로, 머리통이 꼭 돼지처럼 생겨서 일견 웃기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덕분에 돼지에 필적할 정도로 뛰어난 후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밤에 활동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오큽니다!”

리챠드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산 아래쪽으로 쏠렸다. 과연 산 정상으로 올라오는 길목에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툭 튀어나온 들창코에 멧돼지를 보는 듯한 위로 치솟은 뻐드렁니. 오크가 확실했다. 더군다나 그 숫자는 얼핏 봐도 10마리는 족히 넘어 보였다.

“어떻게 알고 벌써 온 거지?”

대가리의 형상이 돼지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오크를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인간형으로 생긴 놈들의 신체는 대단히 건장했다. 하체가 좀 부실하기는 했지만, 우람한 근육질로 채워진 탄탄한 상체를 보면 놈들이 얼마나 강한지 붙어보지 않아도 능히 짐작이 가능하다.

더군다나 놈들은 무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지금까지 마을에 쳐들어 왔던 오크들이 나무 몽둥이 따위를 들고 있었던 것에 비해, 놈들의 태반 이상은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창, 칼, 철퇴, 도끼 등등……. 더군다나 그 중 1마리는 대충 꿰맞춘 것이라고는 해도 갑옷까지 걸쳐 입고 있었다.

오크들이 이쪽의 위치를 파악하게 된 것은 일주일 이상 씻기지 못해 지독하게 풍기고 있는 말 냄새 때문이라는 것을 알 리 없는 사람들에게, 이들의 갑작스런 등장은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이때, 바람이 새는 듯한 괴이한 음성이 들려왔다.

“췩! 호비트! 항복하라!”

그러자 성격이 괄괄한 타일러가 즉각 커다란 목소리로 응대했다.

“헛소리 하지 마라, 이 돼지새끼들아! 우리들이 무슨 할 짓이 없어서, 돼지새끼들에게 항복을 하겠냐.”

“췩췩! 후, 후회할 거다, 호비트!”

“네놈들이나 후회하지 마라.”

그래도 일행에게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오크들 중에서 활을 소지한 놈이 없었다는 점이다. 아마 단순무식한 오크들이 사용하기에 활은 너무 복잡한 무기였는지도 모른다.

싸움의 대상이 트롤에서 갑자기 오크로 변하다 보니 모두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별적인 전투력으로 본다면 단연 트롤이 우세하겠지만, 오크들에게는 ‘숫자’라는 무기가 있었다.

“얼마나 큰 종족일까요?”

“알 수 없지. 밑에 몰려와 있는 저것들이 다일 수도 있고, 아니면 조금 더 많을 수도 있고…….”

헤슬러 남작은 애써 ‘조금’이라는 표현을 썼다. 말이 씨가 된다고 수백 마리라고 했다가, 정말 그 많은 숫자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한 가지는 분명해. 놈들이 아직 제대로 된 진형을 갖추기 전인 지금이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

아마 좀 더 많은 오크들이 몰려들어 온다면 탈출 자체가 불가능해지리라. 헤슬러의 지시에 따라 모두들 오크 떼를 향해 돌격할 준비를 갖췄다. 기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막내 공자의 안전이었다.

헤슬러가 가장 앞장 서서 적진을 뚫고, 나머지는 빙 둘러서 공자를 호위하는 형식으로 진형을 짜기로 했다. 그리고 말이 없는 두 사람의 시종들은 뒤에서 뛰어서 따라오라고 명령했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헤슬러 아저씨. 어떻게 달려서 말의 뒤를 쫓으라는 겁니까?”

“평지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여기는 산속이다. 산속에서는 말이 제 속도를 내지 못하는 만큼, 충분히 따라올 수 있다. 그리고 산속에서 말 위에 두 명이 타는 것은 너무 위험해. 걱정 마라. 너희들이 충분히 뒤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몰 테니까 말이야.”

죠셉이 겁에 질린 얼굴로 반론을 제기해 봤지만, 헤슬러는 단호하게 내쳤다. 저런 경험 없는 꼬마 녀석들이 뒤에 탄다면 도움이 되기는커녕, 움직임에 방해만 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기 때문이다.

“돌격!”

헤슬러의 신호에 따라 일행들은 오크들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설마 인간들이 처음부터 탈출을 시도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오크들의 눈에 당황감이 어렸다. 그들은 느닷없이 풍겨온 말 냄새를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이었을 뿐, 전투를 감안하고 온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증원을 요청하기 위해 전령까지 보냈는데…, 그게 최악의 선택이 되어 버렸다.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소중한 전투원을 하나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헤슬러를 비롯한 기사들이 앞장서서 오크들을 베며 길을 열었다. 사나운 기마(騎馬)의 돌진에 당황한 오크들은 허둥지둥 옆으로 피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그 사이를 뚫고 기사들은 공자를 호위하여 최대한 빠른 속도로 산 밑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 뒤를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쫓아가는 라이와 죠셉.

오크들의 상체는 사람에 비해 훨씬 건장했지만, 다리는 짧다. 뒤뚱뒤뚱 뛸 수밖에 없다 보니, 사람에 비해 뛰는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었다. 점차 뒤로 처지기 시작하는 오크들. 오크들과의 거리가 꽤나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은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채찍질까지 해대고 있다.

기사들의 뒤를 죽어라 쫓아가던 라이는 미친 듯 내달리는 것도 어느 정도지, 입속에서 단내가 풍기는 것을 벗어나 이제는 폐가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헉헉! 제발 좀 천천히 달려요!”

하지만 리더인 헤슬러 남작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의 오랜 경험은 이 근처에 오크족 소굴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오크들의 증원이 산 아래쪽의 길을 틀어막으면 끝장인 것이다. 그걸 잘 아는 그였기에 뒤쫓아 오는 시종들을 배려할 여유 따위는 전혀 없었다.

아니, 그는 처음부터 시종들을 오크들에게 내줄 심산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애들 두 명을 챙기려다가는, 오히려 몽땅 다 오크들에게 죽을 위험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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