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앞쪽의 수풀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엄청난 숫자의 오크 떼가 췩췩거리며 올라오는 게 보였다. 오크들의 증원이었다.
“헉헉헉! 이런…, 헉헉! 제길!”
숨이 턱에 차서 쓰러질 지경인데, 오크들과 싸울 힘이 어디에 있겠는가. 죠셉은 허리에서 검을 뽑아들었지만, 라이는 얼른 검집을 풀어 땅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는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항복의 표시였다.
죠셉은 그런 라이를 비웃었다.
“헉헉! 배알도 없는 새끼. 헉헉, 싸워보지도 않고 돼지 새끼들에게 항복할 거냐? 헉헉!”
“헉헉, 싸우고 싶으면 너나 싸워, 새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앞쪽에서 달려오던 오크가 창을 던진 것은.
쐐앵─
날카로운 파공음. 창이 바람을 뚫고 날아오는 소리는 오크의 육체적인 힘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퍼억!
검을 들고 서 있던 죠셉은 자신의 배를 관통하고 들어와 있는 창대를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길로 바라봤다. 몬스터의 둔기공격을 저지하는 것을 위주로 제작된 갑옷이었기에, 날카로운 창에 너무나도 쉽게 뚫려버렸던 것이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 사실, 죠셉도 오크와 싸울 생각은 없었다. 숨이 턱까지 차 있는 상태라 싸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괜히 이렇듯 허무하게 오크들에게 항복하기가 싫어 짐짓 뻗대어 본 것뿐이다. 하지만 그게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죠셉은 천천히 무릎을 꿇더니,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그의 표정은 자신이 이렇게 허무한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듯 했다.
죠셉이 쓰러질 때쯤, 오크 떼가 라이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오크들 중 하나가 두툼하고 커다란 칼을 번쩍 치켜들더니 막 라이를 찍어버리려는 순간, 다른 오크가 그를 제지했다. 허파는 공기를 달라고 아우성이었지만, 긴장한 라이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힐끗 그 오크를 바라보니, 다른 오크들에 비해 훨씬 더 잘 차려입고 있는 게 눈에 띌 정도였다.
다른 놈들이 몸에 걸치고 있는 낡아빠진 갑옷에 비한다면, 꽤나 모양이 나는 갑옷과 투구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아마도 이놈이 두목인 모양이다. 두목 오크가 뭐라고 외치자, 시끄럽게 떠들던 주위의 오크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하지만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라이는 두목의 의도가 뭔지 몰라 초조해졌다.
라이의 의문은 곧이어 풀렸다. 두목 오크는 산 위에서 자신들에게 말을 걸었던 그 오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산 위에서 내려온 오크는 두목 오크에게 뭐라고 지시를 받더니, 라이에게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췩췩! 기술, 있냐?”
“기술?”
오크는 라이에게 손가락질하며 짤막하게 말했다.
“췩! 할 줄 아는 것.”
그 순간, 라이의 뇌리에는 예전에 친구들과 나눴던 오크와 관련된 우스갯소리가 떠올랐다. 그때 친구 녀석의 말이, 지능과 손재주가 뒤떨어지는 오크는 인간 기술자들을 노예로 잡아서 부려먹는다고 했었다. 그때 라이는 오크들을 위해 일하며 목숨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건 그때 얘기고, 막상 목숨이 위협받게 되자 라이는 살고 싶다는 생각 외에 다른 건 떠오르지도 않았다. 라이는 다급하게 외쳤다.
“나는 무기를 만들 수 있다.”
라이의 대답에 오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기?”
라이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자, 오크는 재빨리 두목 오크에게 달려가 뭐라고 보고했다. 그와 동시에 두목 오크는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며 흉성이 깃든 외침을 터뜨렸다.
“크오오오!”
그러자 다른 오크들도 그 외침에 영향을 받았는지, 각자 들고 있던 무기를 번쩍 들어올리며 꽥꽥거리고 난리를 피웠다. 오크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라이로서는 그저 끔찍하기만 한 시간이었다.
오크들에게 끌려가는 라이의 얼굴은 죽을상이었다. 찔리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젠장, 무기라고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잖아. 거짓말이라는 게 금방 탄로날 텐데, 그땐 어떻게 하지?’
사실, 라이는 이날 이때까지 아버지에게 기사가 되기 위한 수련만을 받아왔을 뿐이다. 무기를 다루는 기법. 그리고 무기나 갑옷을 오랫동안 잘 쓰기 위해 손질하는 방법. 그리고 기사로서 갖춰야 할 각종 교양, 특히 상급자에 대한 예의범절에 대해서 자세히 배웠다.
그 외에는 여느 애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아버지를 도와 작은 텃밭에 농사를 짓거나 애들과 함께 근처 개울에서 낚시질을 하기도 했고, 사냥도 해봤다. 그리고 땔감을 준비해 두는 것도 그에게 주어진 일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무기 제작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무기를 만들 줄 모른다고 실토했다가는, 곧바로 놈들의 한끼 식사감이 될 게 뻔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놈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할 법한 노예감을 궁리하다 보니, 무기를 만들 줄 안다고 거짓말을 하고 만 것이다.
‘정말 무기를 만들어 보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그때는 죽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신이시여, 제발 살려주세요. 이 어린 나이에 오크 밥이 되는 건 너무하다는 것을 신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젠장, 괜히 마을 밖으로 나와 가지고…….’
그 작은 마을을 벗어나기만 하면, 누구나가 다 자신의 능력을 탐내어 휘하에 두고 싶어 할 줄 알았다. 그리고 근사한 레이디가 마을 밖에는 넘쳐나는 줄 알았다. 이야기책에 나오는 것 같은 근사한 연애는 해보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영지를 나오자마자 오크들의 뱃속에 들어가게 될 줄이야. 라이는 너무나도 원통했다.
오크들이 라이를 끌고 간 곳은 커다란 동굴이었다. 놀랍게도 산 남쪽편에 커다란 동굴이 뚫려 있었다. 라이 일행이 자리잡았던 산꼭대기와는 그야말로 지척이나 다름없는 위치다. 그렇기에 이들은 산꼭대기에서 풍겨오는 맛있는 말 냄새를 맡고 사냥하기 위해 급히 달려 올라왔던 것이다.
점점 동굴이 가까워져 오자 라이는 이맛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동굴 안에서 지독한 악취가 풍겨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윽! 이게 무슨 냄새야?’
하지만 투덜댈 수는 없었다. 괜히 오크들을 자극해 봐야 명줄만 재촉할 뿐이다.
동굴 안으로 들어온 라이는 커다랗게 피워져 있는 모닥불을 보며 경악감을 감추지 못했다. 오크들이 불을 겁내지 않는다는 것은 얘기를 들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불을 이용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선두에 가던 오크들 중 한 마리가 횃불을 하나 붙여서는 그 불빛에 의지해 동굴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라이 또한 놈의 뒤를 따라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어설프게 지은 감옥이 보였다. 감옥 안에서 새나오는 불빛, 그 불빛 사이로 얼핏 보이는 것은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사람이 있다. 나보다 이전에 잡혀 들어온 사람이.’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라이는 너무나 반가워 눈물이 핑 돌았다. 역시 자신의 선택은 옳았던 것이다. 저 사람들에게 기술을 배울 수 있다. 그러면 더 이상 오크에게 잡아먹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감옥의 창살은 두꺼운 나무로 조잡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주변이 어두운 데다 창살이 두꺼워 라이는 가까이 다가간 후에야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순간, 라이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지금껏 오크가 풍기는 악취에 마비되어 있던 그의 코가, 더욱 지독한 악취에 반응을 했던 것이다.
‘허억, 무, 무슨 이런 지독한 냄새가…….’
얼마나 씻지를 못했는지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있는 사람들. 더군다나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삐쩍 마른 시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비참한 모습. 그들은 퀭한 눈으로 라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췩췩! 들어가!”
오크는 라이를 감옥 안에 거칠게 밀어넣은 다음 가버렸다. 오크의 손에 떠밀려 감옥 안으로 들어간 라이의 눈에,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나무통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악취의 근원은 바로 그곳이었다. 일명 똥통. 화장실이 없는 만큼, 죄수들은 볼일을 바로 그곳에다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옥에 끌려간 라이가 가장 특이하게 생각한 것은, 죄수들이 감옥 안에서 불을 피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인간 세상이었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죄수들에게 불을 피울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은 너무 위험했으니까.
하지만 이곳 감옥 안의 사람들은 버젓이 불을 피웠다. 그건 인간들을 위해 오크들이 배려해 준 것이 아니라, 대장일을 시켜먹으려니 어쩔 수 없이 불을 피우도록 허용해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감옥 안에 있던 사람들은 라이의 등장에 너무나도 놀라워했다.
“세상에,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사람이야?”
“그러게. 오늘은 녀석들이 웬일이래? 지금까지는 몽땅 다 잡아먹어버리더니…….”
“영감이 죽을 때가 다 됐으니까, 그 후임으로 쓰기 위해 살려서 데려온 거겠지.”
이때, 그들 중 한 명이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서며 말을 걸었다.
“나는 라그만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지내는 동안은 서로 잘 지냈으면 좋겠다.”
“라이입니다. 라이 위너스.”
라그만은 라이에게 감옥에 잡혀 있는 사람들을 소개했다. 모두들 오랫동안 수염도 깎지 못해 온통 털투성이였다. 키가 조금 큰 쪽이 루겐이었고, 작은 쪽이 스미스였다.
마지막으로 라그만은 침상 위에 죽은 듯 누워 있는 한 노인을 소개해 줬다. 라그만의 말을 알아듣기는 했는지 노인은 힘겹게 눈을 뜨기는 했지만, 곧이어 감아버렸다. 간혹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성만이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많이 아프신가 보네요.”
“가장 오랫동안 오크들에게 잡혀 계셨던 분이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라그만은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몰라. 여기서는 한가하게 세월이나 세고 있을 입장이 아니니까. 아무튼 우리들 중에서는 가장 오랫동안 잡혀 계셨어. 나이도 많으시다 보니 여기저기 아픈 데도 많았는데, 약이라고는 구할 수도 없고……. 처음에는 가벼운 기침 정도만 하시더니, 결국에는 저렇게 드러누워 버리셨지.”
그렇게 말하는 라그만의 얼굴에는 짙은 절망감이 어려 있었다. 그 자신도 평생을 저렇게 살다가 이곳에서 죽을 수밖에 없을 거라는 그런 절망감. 분위기가 급속도로 어두워지자, 스미스가 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해서인지 급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떻게 오크에게 잡혀왔냐? 척 봐도 아직 어린 것 같은데…….”
다들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이곳은 오지 중의 오지였고, 라이같이 아직 솜털도 제대로 벗겨지지 않은 어린 녀석이 모험을 하겠답시고 찾아올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오랜만에 사람이 잡혀들어 왔는지 그들은 라이에게 뜨거운 관심을 보여왔다. 그 중에서 스미스는 따뜻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라이의 손을 꼭 잡아줬는데, 사실 라이의 마음은 썩 편치 못했다.
왜냐하면 모두들 너무나도 불결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러운 것만이 아니다. 이, 벼룩, 빈대 등이 살갗 위를 슬슬 기어다니고 있는 게 뻔히 보이고 있지 않은가. 우웩!
그들의 몸에서 지독한 악취가 풍기고 있을 게 뻔했지만, 다행히도 라이의 코는 더 이상 악취를 맡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코는 지속된 자극으로 인해 완전히 마비되어 버렸던 것이다.
사람들은 라이에게 바깥사정을 물어보느라 바빴다. 구조 받을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발견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라이는 그들에게 아무런 희망도 줄 수 없었다. 사실, 그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일행들과 함께 다르칸으로 가던 길이었다는 거냐?”
“예.”
라이는 자기가 어떻게 하다가 오크들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해 줬다. 물론 그들의 동정을 사기 위해 약간의 각색을 해서. 기사라는 놈들은 자신들만 살겠다고 종자들을 헌신짝 던지듯 내던져 버렸고, 그 와중에 절친했던 친구(그들의 동정을 사기 위해 죠셉은 웬수같은 놈에서 죽마고우로 변해 있었다)는 오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말이다.
“허어, 어떻게 그럴 수가! 동료를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정말 나쁜 놈들이로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어르신.”
“어쨌거나 한솥밥을 먹게 되었으니, 이제부터 잘 부탁하겠네.”
“예.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