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크 한 마리가 어디선가 오더니 뭔가 커다란 덩어리를 던져 주고는 가버렸다. 라이가 보니 그것은 멧돼지의 뒷다리였다. 잘라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지, 시뻘건 핏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생고기를 그냥 씹어 먹으라는 건가?’
라이가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들 눈이 뒤집혀서는 고깃덩이를 향해 후다닥 달려들었으니까.
“이, 이 아까운 걸…….”
모두들 떨어지는 피를 핥아먹고 빨아 먹느라 제정신들이 아니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이를 혓바닥으로 열심히 핥고 있는 걸 보며, 라이는 뱃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라오는 걸 느꼈다.
‘우욱!’
하지만 토할 수는 없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저런 모습을 보고 토악질을 했다가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다. 저들도 바보는 아닐 테니까.
뭐라고 말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딱히 좋은 표현이 떠오르지를 않는다.
‘그렇게 핥으면 맛있어요? 이건 아닌 것 같고. 굽거나 삶아서 드시지 왜 그렇게 날걸로…, 이것도 좀 그렇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리는 사이, 그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더 이상 핥아먹을 핏방울이 없자, 라그만은 그 고깃덩이를 가져다가 모닥불 위에 올렸다. 순간,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며 털이 타는 지독한 노린내가 동굴 안에 가득 퍼졌다.
“콜록! 콜록!”
라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기침을 해댔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지독한 냄새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마다 달려들어 시커멓게 타 꼬글꼬글 해진 털을 털어냈다. 곧이어 멧돼지 다리에는 시커먼 색의 그을음뿐, 털은 단 한 올도 남지 않게 되었다.
루겐과 스미스가 달려가서 구석에 놓여 있던 솥을 함께 들고 왔다. 둘이서 함께 들어야 할 정도로 꽤나 커다란 솥이다. 그들은 솥을 모닥불 위에 올린 후, 그 안에 멧돼지 다리를 넣고 물을 한가득 부어 끓이기 시작했다. 물을 너무 많이 부은 탓에 다리가 다 삶아지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모두들 군침을 흘리며 솥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라이는 전혀 식욕이 생기지 않았다. 방금 전에 봤던 모습. 그들이 핥고 빨았던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구토가 치밀어 올라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고기가 푹 삶아지자, 그들은 고기를 꺼내서 칼로 썩썩 자르기 시작했다. 그리 큰 칼은 아니었지만, 감옥 안에 갇혀 있으면서 칼까지 가지고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 라이였다.
“자네도 먹지?”
“아, 아닙니다. 저는 배가 불러서……. 그러니까 저놈들에게 잡히기 전에 식사를 양껏 했었거든요.”
그들은 두 번 권하지 않았다. 행여 라이의 마음이 바뀔 세라 고기를 3등분으로 나눈 다음, 저마다 쭈그리고 앉아 와구와구 뜯어먹기 시작했다. 정말 맛있게. 마치 이게 최후의 식사라도 되는 것처럼…….
“자, 이제 배를 두둑하게 채웠으니 일하자.”
라그만이 꺼내든 것은 갑옷 2벌과 창 몇 자루였다.
“참, 켈취 녀석 말로는 너 대장장이 일을 배웠다며?”
“켈취가 누굽니까?”
“너를 이리로 데려온 오크 말이야. 오크들 중에서 인간의 말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건 5마리 정도인데, 그 중에서 켈취가 말을 제일 잘하지. 그건 그렇고, 대장일은 얼마나 배웠냐?”
라이는 얼른 고개를 푹 숙이며 최대한 불쌍한 척 말했다.
“사실 그건 거짓말이었어요. 목숨을 건지려고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정말 눈앞이 캄캄합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스미스가 감탄했다.
“자네 정말 순발력이 뛰어나군. 급박한 상황에서 그런 거짓말을 다 생각해 내다니.”
순수하게 감탄하는 스미스에 비해 라그만의 눈빛은 조금 달랐다. 하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던 라이는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라그만은 씨익 미소 지으며 호탕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우리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 돼지새끼들이 어떻게 알겠어? 설마 오랜만에 온 동료를 오크들이 잡아먹도록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나.”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루겐은 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그릇에 고깃국을 떠서 노인에게로 가져갔다. 배가 두둑해진 후에야 앓아누운 노인에게 생각이 미친 것이다.
“영감님, 따뜻한 국물이라도 좀 드셔보세요. 예?”
그가 살며시 흔들었지만, 노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흠칫 놀라는 루겐.
“설마…, 죽은 거야?”
루겐은 좀 더 세게 흔들어 봤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손가락을 노인의 코에 댔다. 숨을 쉬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이때, 라그만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알겠어, 비켜 봐.”
라그만은 손을 뻗어 노인의 목 언저리에 댔다. 경동맥(頸動脈)이 머리로 흘러들어가면서 맥동치는 그 맥박을 읽어보려는 것이다.
잠시 후, 라그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죽었어.”
“서, 설마…….”
노인의 죽음을 가장 슬퍼한 사람은 루겐이었다. 그는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더니,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흐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람 죽는 거 한두 번 보냐? 적당히 해.”
“야, 그래도 너무하잖아. 지금까지 같이 산 게 몇 년인데…….”
“어쩔 수 없지. 약초 한 뿌리도 쓸 수 없는 처지인데, 뭘 어떻게 하겠어. 그냥 이렇게 살다가 가는 수밖에.”
라그만은 창살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오크에게 다가가더니 말을 걸었다.
“켈취를 불러줘. 켈취, 알겠어? 케엘취! 켈취!”
감옥 앞에는 언제나 2마리의 경비 오크가 지키고 있었다. 라그만의 부탁을 들은 경비 오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딘가로 뒤뚱거리며 걸어갔다.
잠시 후, 경비 오크는 또 다른 오크 한 마리와 함께 돌아왔다. 놈은 다른 오크들이 코가 막힌 듯한 췩췩거리는 소리밖에 내지 못하는 것에 비해 어눌하기는 해도 사람의 말을 제법 했다. 단순한 말밖에 하지 못했지만,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췩! 무슨 일이냐? 호비트.”
“영감이 죽었어.”
“취익! 죽어?”
켈취는 경비를 서고 있는 오크들에게 뭐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경비 오크는 감옥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노인의 시체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라이는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부디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묻어줘야 할 텐데…….”
그때 옆에 서 있던 스미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
“묻어주려는 게 아니라, 먹으려고 가져가는 거야.”
일순 라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머, 먹어요?”
“죽은 동료도 먹어치우는 것들이야. 그런 놈들이 사람 시체를 그냥 내버릴 것 같아?”
오크에게 잡히면 살아서 나갈 수가 없다. 죽임을 당해서 잡아먹히거나, 뼈 빠지게 일하다가 죽은 다음 놈들의 뱃속에 들어가거나…, 결국에는 놈들의 뱃속에 들어가야 끝이 나는 것이다.
‘떠그랄! 이럴 줄 알았으면 폐가 터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도망쳐 보기라도 할 걸.’
이때만큼은 이미 오크들의 뱃속에 들어가 있을 죠셉이 부러워지는 라이였다.
노인의 시체를 들고 나간 다음, 켈취는 다른 경비 오크에게 문을 잠그라고 지시했다. 볼일이 끝난 켈취는 뒤돌아서서 밖으로 걸어서 나가는 중이다.
그런 켈취를 바라보던 라그만의 얼굴에 갈등이 어렸다. 노인은 죽었고, 새로운 신참이 하나 들어왔다. 그것도 건장한 놈이.
이윽고 라그만은 결심을 굳힌 듯, 급히 켈취를 불렀다.
“켈취! 할 말이 더 있다.”
걸음을 옮기던 켈취는 뒤로 돌아서며 물었다.
“췩, 뭐냐?”
“오늘 잡혀온 저 호비트 말이야.”
라그만은 손가락으로 라이를 가리켰다. 라이는 라그만이 왜 오크를 불러서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나 해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의 눈길이 얽히는 순간, 라그만은 오크에게로 고개를 홱 돌리며 재빨리 말했다.
“무기를 만들 줄 안다고 한 건 새빨간 거짓말이래. 죽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한 거지.”
감옥은 그리 넓지 않았기에, 라이도 라그만이 하는 말을 다 들을 수 있었다. 라이는 절망했다. 그는 라그만을 노려보며 외쳤다.
“이럴 수가. 왜? 왜 그런 짓을!”
안 그래도 험악하게 보이는 켈취의 인상이 그 말을 듣는 순간 더욱 포악하게 일그러졌다. 켈취는 경비를 서고 있는 오크에게 뭐라고 명령했다. 경비 오크가 감옥문을 다시 열자, 켈취가 직접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무지막지한 손으로 라이의 멱살을 틀어쥐고는 밖으로 끌고 나갔다.
켈취에게 질질 끌려 나가는 라이를 향해 라그만이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게 다 입을 줄이자고 한 짓이니 네가 이해해라. 너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녀석들이 가져다 주는 식량은 정말 보잘것없거든.”
분노한 라이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외쳤다.
“이런 나쁜 새끼! 너는 인간도 아냐. 그래, 고기조각 조금 더 먹자고 같은 사람을 고자질을 해? 이 오크보다도 못한 새끼! 두고 보자. 반드시 복수할 테다.”
하지만 그런 라이에게 대꾸하는 라그만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복수는 무슨. 지금 잡혀가면 곧바로 오크들에게 잡아먹힐 텐데. 하여튼 잘 가라구. 오랜만에 들어본 바깥소식, 정말 고마웠어.”
“에잇, 퉤! 죽어버려라!”
“걱정 마. 너보다는 오래 살 거니까.”
“평생 오크 발바닥이나 핥다가 죽어버려!”
“정말 시끄러운 놈이군.”
지지 않고 대꾸는 하고 있었지만, 라그만의 표정은 썩 밝지 못했다. 그라고 좋아서 라이가 무기를 만들 줄 모른다는 것을 고자질 했겠는가.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스미스의 물음에 라그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어조로 대꾸했다.
“어쩔 수가 없어. 녀석은 젊은 데다, 아직 힘이 있어. 겨우 이런 보잘것없는 먹거리에 만족할 거 같아? 굶주림에 지쳐 녀석의 눈이 돌아가 버리면, 그때는 이미 늦어. 우리 모두가 놈에게 살해당하느니, 저 녀석 혼자 죽어버리는 게 나아.”
라그만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했다. 그의 말이 옳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