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는 빠른 속도로 노예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라이가 적응할 수 없었던 것. 그것은 바로 먹는 것이었다.
“췩췩! 먹어라!”
오크가 던져준 것은 겨우 토끼 1마리. 어제는 아침이 다 되어갈 무렵 사슴 다리 하나를 던져줬었고, 그 전날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었다. 1년이 넘도록 이곳에서 생활하다 보니, 라이의 건장하던 신체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앳된 얼굴은 완전히 사라졌고, 비쩍 마른 시체와도 같은 몸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대신 눈빛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삶에 대한 집착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젠장, 겨우 이걸 누구 코에 붙이라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요리나 해.”
이곳에 끌려온 이후, 배불리 먹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놈들로서는 인심 쓴답시고 커다란 사슴다리 하나를 통째로 던져줘도, 그걸 먹어야 하는 사람은 3명. 그것도 그것으로 한 끼가 아니라, 하루를 버텨야 하는 것이다.
고기를 요리하는 방법은 한결같았다. 일단 불 위에 올려 털을 완전히 다 태워버린다. 가죽을 벗기지 않는 이유는 가죽까지 몽땅 다 삶아먹기 위해서였다. 그런 다음 이번 경우처럼 내장을 손질해야 하는 경우,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오물을 깨끗하게 씻어낸 다음 나머지는 다시 솥 안에 집어넣는다. 피를 씻어내지도 않았다. 단 한 방울이라도 흘릴세라 핥아먹던지, 아니면 다 솥 안에 집어넣었다.
‘내가 언제 이런 것을 먹기라도 했었나?’
토끼고기가 푹 삶아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라이는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각종 양념을 한 스튜를 한 솥 가득 끓여 목구멍에 찰 때까지 몇 대접씩이나 떠먹었었다. 그리고 어쩌다 아버지가 사슴이라도 한 마리 잡아오면, 며칠 동안 질리도록 사슴고기로 포식을 했었다. 보드랍고 향기로운 빵, 갓 낳은 신선한 달걀, 감자, 당근, 양배추, 콩…….
물론 아버지의 음식솜씨가 그다지 좋지 못했기에, 라이는 목구멍에 찰 때까지 퍼먹으면서도 음식이 맛이 없다고 연신 투덜거렸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해주시던 맛없던 음식들에 비해, 지금 먹는 것들은 어떤가? 지금 자신이 먹는 건 정말 형편없었다.
토끼 한 마리를 그대로 집어넣고, 물만 잔뜩 부어 끓인 토끼탕. 이건 토끼가 목욕을 하고 나간 물을 끓인 것인지, 토끼의 흔적을 찾기도 힘들 정도였다. 더군다나 소금기조차 전혀 없다. 하지만 이런 맹탕 같은 토끼탕이 맛이 없냐고? 천만에, 며칠 굶어봐라. 이것만도 얼마나 향기로운지 말이다.
밖에 나갈 수만 있다면 하다못해 사냥을 하든지, 아니면 버섯이나 산채와 같은 식재료를 채취해서 탕 안에 함께 넣을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좁아터진 동굴 안에 갇혀 지내다 보니, 놈들이 던져주는 식량에만 유존할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배고파…….”
이미 잡혀와 있던 다른 사람들의 몸이 왜 이렇게 깡 말라 있는가 했더니, 그게 다 이유가 있었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식사량. 배가 고프다 보니 다른 생각은 전혀 나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배 터지게 먹어보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라이의 뇌리를 꽉꽉 채워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배가 고프다 보니 일을 할 때 외에는 가만히 앉아 있거나, 아니면 누워 있는다. 잠이라도 자면 최소한 배고픔을 잊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동료들이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을 때, 라이는 검술 연습을 했다. 물론 나무막대기를 들고 휘둘렀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할 체력도 없을뿐더러, 그런 짓을 하는 것을 오크들이 용납할 리가 없다.
그렇기에 라이는 다른 사람들처럼 앉거나 누워서 눈을 감은 채, 머릿속으로 상상을 했다. 이렇게 공격해 들어올 때는 저렇게 받아치고, 또 저렇게 공격해 들어올 때는 요렇게 받아치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있다 보면, 시간이 빨리 흘러간다. 그렇기에 라이는 틈만 나면 가상의 적과의 검술 대결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동굴 안은 기온의 변화가 거의 없기에 계절의 변화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계절의 변화를 그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온도가 아니라 먹거리의 변화로써.
봄부터 가을까지는 비교적 잘 먹는다. 토끼 한 마리를 던져주는 한이 있더라도, 끼니를 거르는 날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겨울철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욱 많다. 더군다나 먹을 거라고 던져주는 게 오크 고기일 가능성이 컸다. 먹을 걸 찾기 힘든 만큼, 주변 부족을 쳐서 그들을 잡아먹는 것이다.
먹을 거랍시고 잘린 오크 다리를 하나 던져줬을 때, 라이는 기절초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크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동굴 밖에서 오크 한 마리가 뭔가를 들고 다가오는 게 보였다.
“오늘도 오크 고긴가?”
“오크 고기면 어때. 될 수 있으면 살이 많이 붙어 있는 거라면 좋겠는데…….”
하지만 아니었다. 오크가 던져주고 간 것은 말의 다리였다. 그것도 신선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들은 더 이상 할 말을 잊고 곧바로 말 다리에 달려들어 피를 쪽쪽 빨아 먹었다. 향긋한 피 냄새! 이게 얼마 만에 맡아보는 제대로 된 먹거리의 향기인지…….
말고기로 배를 두둑이 채우고 나자, 모두의 눈동자에는 오랜만에 생기가 감돈다. 루겐은 힘 있는 어조로 말했다.
“자, 배를 빵빵하게 채웠으니 이제부터 일해야지. 녀석들이 가져온 거 이리로 가져와 봐.”
아무리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라도 일은 해야 했다. 오크들이 자신들을 살려두고 있는 유일한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일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면, 바로 그날로 녀석들의 뱃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사람이라면 대화와 타협이라는 게 통하겠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할 거냐, 말 거냐 단 두 가지뿐. 더 이상의 선택은 없었다.
사실, 오크라고 해서 대화와 타협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부 오크들의 경우 약탈한 보석이나 상품 따위를 인간 상인들에게 팔아넘기는 고도의 상술을 발휘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것은 외부인들의 경우이고, 한식구의 경우는 얘기가 달랐다.
위에서 시키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게 그들의 율법이었다.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곧 상관을 치고 그 자리로 올라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런 만큼 한식구로 취급되는 노예의 항명을 그들로서는 결코 용인해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오크들은 무기를 관리한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다만 쇠에 기름을 칠하면 좋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식사를 끝낸 다음 손에 묻은 기름기를 무기나 갑옷의 쇠로 된 부분에 쓱쓱 닦았다. 그들의 무기 손질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런 무식한 오크들이 쓰던 무기이니 상태가 얼마나 엉망진창이겠는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오크들은 무기가 완벽한 상태로 수리되어 나오는 것 또한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충 쓸 수 있도록 만들어만 줘도 무조건 OK였다.
평상시 노예들이 밥 먹고 하는 일은 나무를 깎는 일이었다. 오크들은 창이나 도끼, 철퇴 따위의 나무 막대기가 들어간 무기를 많이 사용했다. 창촉이 돌 따위에 부딪쳐 뭉그러지는 경우도 간혹 있긴 했지만, 그런 것보다도 창대나 도끼 자루 같이 나무로 된 부분이 부러져서 오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때 사용하려고 평소에 목봉(木棒)을 만들어 두는 것이다.
간혹 가다 갑옷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파손되거나 노획한 물건들이었는데, 이 경우에도 분해를 해서 어떻게 해서든 놈들이 입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면 됐다.
하지만 그렇게 부숴버리는 게 너무나도 아까운 갑옷이 들어올 때가 간혹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세상에, 이 갑옷 좀 보세요. 이런 걸 부숴야 한다니, 이건 죄악이라구요.”
라이가 그런 말을 꺼낼 만도 했다. 갑옷은 너무나도 훌륭했다. 예전에 그가 입었던 가죽갑옷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명품 중의 명품이었던 것이다. 대단한 솜씨의 장인이 만든 철판갑옷(Plate Armor)으로, 단 한 치의 틈도 없을 만큼 철판들이 기가 막히게 맞물리도록 제작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기가 막힌 세공품의 경우, 제대로 된 관리를 해줄 때는 제 성능을 충분히 발휘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오히려 싸구려 갑옷보다 못하다는 게 문제였다. 서로 맞물리는 연결점에 녹이 슬어버리면, 그 부분이 뻣뻣해져 버려 아예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되기 때문이다.
“젠장, 고급품일수록 손보는 건 더 힘들어. 자,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하면 돼.”
루겐은 익숙한 동작으로 철판갑옷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원래가 갑옷은 입고 벗기 편리하도록 한쪽은 열쇠로 잠기게 되어 있고, 다른 한쪽은 경첩으로 되어 벌릴 수 있도록 만든다. 그는 경첩 위쪽을 작은 못으로 톡톡 두들겨 연결점인 쇠막대기를 뽑아냈다. 그와 동시에 갑옷은 앞판과 뒷판의 두 덩어리로 분리되었다.
“어깨판이라든지 그런 세밀하게 움직이는 부위는 다 떼버리는 거야. 이런 부분이 녹이 슬어 뻣뻣하게 굳어버리면, 오히려 사용하기가 더욱 힘들어지거든. 그러니까 완전히 굳어버렸을 때를 가정해서 갑옷 모양을 만들면 돼.”
마지막 끝처리는 가죽끈을 이용해서 두 갑옷판을 얼기설기 연결하는 것이었는데, 갑옷판 자체가 워낙에 잘 만들어져 있어서 가죽끈을 밀어 넣을 틈새가 없다는 것이 작업을 더욱 힘들게 했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연장이 있어서 갑옷판에 구멍을 송송 뚫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한참 동안 갑옷판과 실랑이를 벌이던 루겐은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을 쓱 닦으며 말했다.
“휴우, 겨우 끝냈군.”
그가 갑옷 상의 하나를 끝내는 동안, 라이와 스미스는 녀석들이 가져다 놓은 창 8자루와 도끼 5자루를 손봤다. 그리고 연결끈이 끊어져 입기 힘들게 된 4벌의 오크 갑옷까지 전부 손봤다. 그만큼 루겐이 갑옷 하나를 손보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다는 말이다.
“이건 어떻게 할 거예요?”
지금까지 가죽바지 등은 놔뒀다가 잘라서 가죽끈을 만드는 데 썼었다. 그걸 잘 알면서도 라이는 이번에 입수된 가죽바지를 번쩍 들어 보였다. 왜냐하면 가죽끈으로 만들어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물건이었으니까.
“여기에 갇혀 있으면서도 욕심이 생기는 모양이지?”
“헤헤…….”
“가지고 싶으면 가져라. 단, 저기에 있는 여유분이 다 떨어지면, 그때는 그것도 잘라버리는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야.”
라이가 갑옷 바지에 욕심을 내는 것은 아직 삶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루겐과 스미스는 아예 탈출의 가능성을 포기해 버린 상태였다. 그런 그들에게 100만 골드짜리 보물이 코앞에 떨어진다고 해도 무슨 감흥을 불러일으키겠는가.
라이는 무심결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이제 자신의 것이 된 가죽바지를 홀린 듯 바라봤다. 이 정도 명품은 지금껏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백작이나 그의 아들들 정도가 입은 것을 봤을 정도다. 백작은 무인이 아니었기에 예식용의 가죽갑옷이나 입었지, 상하의 한 세트로 제작된 철판갑옷을 입지는 않았다. 겉멋으로 입기에는 그 무게가 너무나도 무거웠기 때문이리라.
라이는 그들이 입은 멋진 가죽갑옷을 부러워 하긴 했었지만, 언감생심 자신도 이런 것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는 꿈도 꿔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비싼 물건이었던 것이다.
라이가 가죽바지에 홀려 있을 때, 루겐이 꽤나 흥미롭다는 듯 스미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꽤 실력 있는 무사였던 것 같은데…….”
“실력이 있으면 뭐 해. 오크 떼에 둘러싸이면 그걸로 끝인데.”
“아니야. 저것들을 봐봐.”
루겐은 오크들이 입었던 갑옷 4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갑옷 입은 오크만 최소한 4마리가 죽거나 다쳤다는 뜻이야. 그렇다면 갑옷 안 입은 놈은 최소한 그 네다섯 배가 아작났다고 봐야겠지. 혼자서 이 정도 무력을 뽐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그래듀에이트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루겐의 말에 스미스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열을 올리는 루겐에 비해 스미스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흥. 그래듀에이트가 혼자서 이런 산골짜기에? 그것보다는 파티가 들어왔다고 보는 게 옳겠지. 그러다가 운이 없는 저 사람은 죽고, 나머지는 다 도망쳤다고 말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뭐 바뀌는 게 있어? 죽을 사람은 죽었고, 도망칠 사람은 도망쳤는데 말이야.”
루겐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혹시 그들이 복수를 하러 오지 않을까?”
“복수? 돈도 안 되는 오크 떼를 때려잡자고, 이런 산골짜기까지 들어올 사람이 누가 있겠어. 이 정도 규모의 오크 떼라면 수백 명은 동원해야 할 텐데……. 그것보다는 똥 밟은 셈 치고, 두 번 다시 이쪽 방향으로는 얼씬도 안 하는 게 맞겠지.”
“젠장, 그럴 가능성이 더 크군.”
갑자기 풀이 팍 죽는 루겐. 방금 전 희망에 차 있던 것에 비하면 이제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비관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안됐다고 생각했는지, 스미스는 급히 그를 위로했다.
“아냐.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어. 그러니 희망을 잃지 말라고. 누가 알아? 수백 명의 동료들을 이끌고 올지 말이야.”
수백 명이 한꺼번에 파티를 맺어 이동하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한 가지 있을 수는 있었다. 아주 거대한 귀족가문에 소속되어 있어, 그 가문에서 사병(私兵)을 이끌고 구원하러 오는 경우다. 루겐도 거기에 생각이 미쳤는지 급히 자신이 방금 전에 손봐 놓은 갑옷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런 문장을 본 적 있어?”
갑옷의 가슴어림에는 노란 꽃이 그려져 있었다. 꽃을 정확히 그려놓은 게 아니라, 단순화시켜 그려놓은 것이라 어떤 꽃을 그린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처음 보는데…….”
스미스의 대답에 루겐의 얼굴에서 다시 생기가 사라졌다. 자신들이 모를 정도의 문장을 사용하는 가문이라면, 거대 귀족가문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 말은 즉, 그들의 도움으로 구출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멋진 갑옷 한 세트를 구경한 지 한 달쯤 흘렀을까? 언제나와 똑같은 하루하루, 그리고 배고픔. 지금쯤 봄이 올 때가 되었을 텐데, 아직까지도 겨울은 끈질기게 남아 자신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오크 고기라는 형태로.
“젠장, 또 오크야?”
“이 녀석이 배가 덜 고팠구나. 오크면 어때? 나는 맛만 좋던데. 눈 감고 먹으면 구수하면서도 쫄깃한 게 기가 막히잖아. 쪼잔한 녀석들. 어제는 다리통을 하나 주더니, 오늘은 겨우 팔 하나야? 이걸 누구 입에 붙이라고…….”
오랜 세월 노예생활을 해온 루겐과 스미스는 오크 고기에 대한 거부감 따위는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만, 라이는 달랐다. 이제 겨우 1년이 조금 지났을 뿐이다. 지금껏 몬스터 고기가 식용이 가능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더군다나 저 흉칙하게 생긴 오크 고기를. 그것도 머리통만 뺀다면 사람과 거의 흡사한 신체구조를 가진 놈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에 거부감이 없을 리 없었다. 하기야 몇 년 더 지나고 나면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환장을 하며 달려들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은 오크의 잘린 팔을 붙잡고, 지금껏 그래 왔듯이 입을 대고 피를 빨아먹었다. 그런 다음, 팔을 솥 안에 집어넣었다. 솥 안에서 오크 고기가 익으며 구수한 냄새를 풍기자, 라이의 입 안에는 혐오감과는 별도로 군침이 고이고 있는 중이다. 오크는 생김새만 돼지와 비슷한 게 아니라, 그 맛도 비슷했다. 만약 오크라는 것을 모르고 먹는다면, 멧돼지 고기와 혼동을 일으킬 정도로 그 맛이 상당히 흡사했던 것이다.
“이제 익었을 거예요.”
“아냐. 조금 더 익혀야 해.”
“그러지 말고 지금 꺼내 먹자구요. 나 배고파요.”
“누군 배 안 고프냐? 그래도 구수한 국물을 마시려면 좀 더 끓여야 해.”
곧이어 벌어질 포식을 기대하며, 훈훈한 마음으로 기분 좋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날카로운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오크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죠?”
“싸움이라도 난 모양이지. 돼지 같은 새끼들! 먹을 거 앞에 두고, 서로 조금이라도 더 처먹겠답시고 곧잘 싸우곤 하잖아.”
스미스의 말에 루겐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소리가 너무 커. 이건 한두 마리가 싸우는 게 아니야.”
“그렇다면 뭔가 사단이 난 게 아닐까?”
그때, 라이가 끼어들었다.
“이쪽에서 다른 오크족을 쳤듯, 이번에는 다른 오크족들이 공격해 들어 온 건 아닐까요?”
“설마……. 여기 이놈들은 다른 오크족들과 달리 무장을 꽤나 단단히 하고 있어. 예전에 네가 살던 마을에 이 정도로 중무장을 한 오크가 쳐들어 온 적 있었냐?”
잠시 생각해 보던 라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없었어요. 잘해봐야 나무 몽둥이가 고작이었죠.”
“거봐. 이놈들은 이 일대에서는 최강의 부족이야. 이런 놈들을 공격할 간 큰 오크족이 있다고 생각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래봐야 오늘 식사량을 늘려 줄 뿐이겠지만.”
스미스의 말에 라이가 기대 어린 어조로 불쑥 끼어들었다.
“그럼 이거 말고 고기를 좀 더 줄지도 모르겠네요?”
“호오, 그럴 수도 있겠는데? 흐흐, 벽에다 기록해 놔야겠군.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을 수도 있겠다고 말이야.”
“해가 서쪽에서 뜨건 말건 무슨 상관이야. 해 본 지가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지 기억도 안 나는구먼. 나는 그냥 배불리 먹기나 해봤으면 좋겠어.”
그때였다. 갑자기 동굴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그들의 눈에 띈 것은. 갑주로 중무장을 하고 있는 그는, 온몸에 흠뻑 피칠을 하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두툼한 방패를, 그리고 왼손에는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전투도끼를 들고 있었다. 그걸 보면 저 사람은 보기 드문 왼손잡이인 모양이다.
감옥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 오크 두 마리가 곧바로 무기를 꼬나들고 그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곧이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오크가 얼마나 무섭고, 싸움을 잘하는데……. 그런데 그 사람은 단숨에 오크 두 마리를 도끼로 쪼개버렸던 것이다. 방패로 오크의 공격을 막는 순간, 도끼로 쪼개버리는 동작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퍽!
“꾸에엑!”
경비 오크 둘을 단숨에 죽여 없애버린 무사는 감옥 앞으로 주춤주춤 다가왔다. 그는 할 말을 잊은 듯 감옥 앞에 망연히 서 있었다. 감옥 안에 갇혀 있는 꾀죄죄한 몰골의 깡마른 사람들. 얼마나 오랜 세월 오크들에게 학대를 당해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오크들을 향해 솟아오르는 불과 같은 분노에 치를 떨고 있는 중이다.
그에 비해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지금 이 일이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조차 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지금껏 이런 날이 오기를 얼마나 학수고대하며 살아왔던가. 하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도저히 현실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꿈이라면 제발 깨라!
이윽고 정신을 차린 무사가 급히 말했다.
“비켜서시오. 문을 열어 드리리다.”
그는 죽은 오크의 품속을 뒤져 열쇠를 찾는 수고를 생략하고, 단숨에 빗장을 도끼로 쪼개 문을 열었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소? 자, 빨리들 나갑시다.”
“저, 우리는 구출된 건가요?”
“물론이오. 이 동굴 안의 오크들은 단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할 거요. 아무리 어린 새끼라고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