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스코 용병단
동굴 밖으로 나오는 도중에 그들은 수없이 많은 오크들의 사체를 볼 수 있었다. 수십, 아니 수백 마리는 족히 되어 보이는 오크들의 사체. 그에 비해 사람의 시체는 단 한 구도 볼 수 없었다. 대신 주위를 뛰어다니는 두세 명의 중무장한 무사를 볼 수 있었을 뿐이다.
‘세상에, 저 몇 안 되는 인원으로 이 동굴의 오크를 전멸시켰단 말이야?’
그들은 경악했지만, 동굴 밖으로 나온 다음에는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 저마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무리들. 그 중에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도 몇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는 사제의 모습도 보인다. 라이로서는 그런 모습을 처음 봤다. 그가 자랐던 마을에 마법사는 한 명 있었지만 신관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가 마법을 쓰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말이다.
꾀죄죄한 모습의 깡마른 시체 같은 몰골의 사람들을 무사가 데리고 오는 것을 보며, 강직한 인상을 한 중년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그 사람들은 뭔가?”
그러자 지금껏 투구를 뒤집어 쓰고 있던 무사는 동굴 밖으로 나와서야 투구를 벗었다. 그와 함께 꽤나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다. 금발을 길게 기른 미남이었다.
“예, 닥스님. 이들은 오크들에게 사로잡혀 동굴 안에 갇혀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부대장(副隊長)님은?”
“몸소 들어가셨다. 뒤에 서서 지시만 하실 분이 아니라는 걸 너도 잘 알 거 아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 사람들은 세바스티안님께 데려가서 치료를 부탁드리게.”
“예.”
장발의 무사는 그들을 사제에게로 데리고 갔다. 대지의 여신을 모시는 사제라고 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질 정도로 온화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장발의 무사에게 몇 마디 듣더니, 몹시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오크에게 잡혀 계셨다구요?”
“예.”
“꽤나 오랫동안 잡혀 계셨나 보군요. 몸이 말이 아닌 걸 보면…….”
세바스티안 사제는 그들의 몸에 손을 얹고 신의 은총을 빌었다. 성스러운 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그의 손을 보며, 라이는 이 세상에 신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실감했다.
‘대지의 여신이라고 했지? 앞으로 여신님의 종이 될 거야, 종.’
지금껏 종교라고는 꽤나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교육받았던 그에게, 사제가 사용한 신성마법은 크나큰 충격을 안겨줬다. 눈으로 직접 신의 기적을 봤는데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사제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치료를 받고 있을 때, 갑자기 분위기가 일변했다. 저마다 편한 자세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무사들이 모두 벌떡 일어섰던 것이다. 그들의 시선은 한 곳을 향해 있었다.
라이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려한 갑옷을 입은 중년의 기사가 동굴에서 걸어나오는 게 보였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뭔가를 들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한 벌의 갑옷이었다. 얼마 전에 루겐이 손을 봤었던 바로 그 갑옷. 워낙에 훌륭했던 갑옷이었기에 라이는 아직까지도 그 갑옷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 저 갑옷은……?”
“저건 부대장님의 막내 동생이셨던 제12소대장, 미하엘 올랜드 씨가 입으셨던 갑옷이지요.”
사제는 미하엘 일행이 이 근처에서 오크 떼에게 기습을 당했던 사건에 대해 라이 일행에게 설명해 줬다. 이곳 동굴을 차지하고 들어앉은 오크족은 강력한 무장을 바탕으로 주변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불안에 떨던 상인들은 요즘 들어 서서히 명성이 높아지고 있는 브리스코 용병대에 호위를 요청했다. 용병대장은 그 임무를 12소대장이자, 부대장의 동생인 미하엘에게 맡겼다.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용병대장은 오크족에 대한 방비쯤이야 1개 소대, 10명만 투입해도 충분하리라 예상했지만 예상외로 이곳 오크족의 전투력이 대단했던 것이다.
“책임감이 강하셨던 미하엘님은 부상자들의 퇴각을 엄호하시다가 변을 당하셨다고 하더군. 참, 아까운 분이셨는데…….”
오크족으로서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린 셈이었다. 용병대는 결코 당하고는 못사는 족속들이었다. 패배를 그냥 넘겨버린다면, 다른 용병대에 깔보이게 된다. 그렇기에 그들로서는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용병대장은 전사한 미하엘의 형, 돌턴 부대장에게 복수를 위임했다.
“2개 중대를 줄 테니, 녀석들의 씨를 말려버려라. 알겠나?”
“제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장님.”
“천만에.”
중무장한 2개 중대 100명과 1명의 수련마법사, 그리고 2명의 사제까지 지원된 강력하기 짝이 없는 완벽한 공격대. 거기에 불패를 자랑하던 오크족이 녹아내린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들의 본거지인 동굴 안에서 말이다.
“제발 저를 용병대에 받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라이의 당돌한 부탁에 돌턴 부대장은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비쩍 마른 소년을 아래위로 다시 한 번 훑어봤다. 도대체 사람이 이렇게까지 마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바짝 마른 소년. 닭 모가지나 비틀 수 있을지도 의문인데, 그런 애를 용병대에 받아들여서 어디에다가 쓴단 말인가.
“미안하네. 정원이 꽉 차서 자리가 없구먼.”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용병대에 정원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군요. 여기에 잡혀오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기사 수업을 받던 견습기사였습니다. 몸이 완쾌되기만 한다면, 한 사람 몫은 충분히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라이가 견습기사였다는 말은 다소 의외였지만, 그 사실이 돌턴의 마음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자네의 그 마음은 충분히 알겠네만, 용병대라는 곳이 자네 몸이 완쾌될 때까지 요양을 시켜주는 곳은 아니라네. 제대로 몸을 만든 다음에 오게나. 그때는 받아들여 주겠네.”
라이가 제아무리 얼굴가죽이 두껍다고 해도 더 이상 부탁할 수는 없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더 이상은 시간낭비인 게 뻔했던 것이다.
“그럼 죄송하지만, 바레인 시까지만이라도 데려가 주시면 안 될까요?”
라이의 부탁을 부대장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안 그래도 그리로 가는 길이니까.”
사제로부터 바레인 시에서 왔다는 얘기를 이미 들은 라이다. 그렇기에 그곳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청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부대장님.”
“뭘, 그런 걸 가지고.”
라이는 바레인 시까지만이라도 안전하게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일단은 그곳에 간 다음에, 그 다음 일을 생각…….
이때, 라이의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맞다! 가죽바지.’
라이는 슬쩍 부대장의 눈치를 살폈다.
‘가죽바지를 돌려주는 게 좋을까?’
만약 그가 용병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가죽바지를 부대장에게 돌려줬을 것이다. 잘 봐달라는 뇌물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 가죽바지는 꽤나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고, 현재 라이는 동전 하나 가진 게 없는 빈털터리였기 때문이다. 아마 가죽바지를 몰래 내다 판다면 한동안은 먹을 걱정을 않고 살 수 있으리라.
이윽고 결심을 한 라이는 부대장에게 물었다.
“부대장님, 동굴 안에 좀 다녀올 수 있을까요?”
“동굴 안에는 왜?”
“지금껏 제가 사용해 왔던 물건들 때문입니다. 방금 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그냥 도망쳐 나왔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걸 모두 포기하는 것이 너무 아까워서요.”
“오크 사냥은 끝났으니까, 들어가 봐도 된다.”
“감사합니다, 부대장님.”
이때,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루겐이 라이를 말렸다.
“그 넝마들을 가져다가 뭐 하려고?”
“넝마라뇨? 밥그릇하고 연장들……. 가지고 가면 다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른다구요. 아저씨들은 그것들을 그냥 다 놔두고 가실 거예요?”
라이의 물음에 그들은 손을 내저으며 대꾸했다.
“됐다. 무슨 추억이 될 거라고, 그딴 걸 가지고 돌아가.”
“그럼 아저씨 것들 중에서 괜찮은 거 있으면 제가 가져도 돼요?”
“좋을 대로 하렴.”
루겐의 시원스런 허락에 라이는 신이 났다.
“감사합니다.”
라이는 쏜살같이 동굴 안 감옥으로 달려갔다. 감옥으로 가는 길에 수많은 오크들의 시체를 발견했다. 용병대원들은 이리저리 다니며 혹시 오크들 중에서 살아 있는 놈은 없나 살펴보며, 그들의 몸에서 쓸모 있는 게 없나 뒤지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쇠 부스러기 같은 거야 쓸 데가 없었지만, 놈들 중에는 장식품으로 돈이나 보석 따위를 가지고 있는 놈도 간혹 있었기 때문이다.
지독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감옥 안. 지금쯤은 적응이 됐을 만도 하련만, 똥통에서 풍기는 악취는 여전히 그의 코를 괴롭혔다. 하지만 똥통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라이는 황급히 감옥 안으로 들어가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배고플 때 웬만한 가죽들은 모두 다 물에 푹 불려뒀다가 삶아 먹어버렸기에, 갑옷을 수선한다고 놔둔 몇 가닥의 가죽끈이 전부였다. 대신 라이는 다 헤어진 담요를 바닥에 깔고, 그 안에 짐들을 집어넣었다. 낡은 옷가지들, 칼, 망치, 집게, 바늘……. 솥은 너무 커서 들고 가는 것을 포기했다.
마지막으로 라이는 슬쩍 주위에 누가 있는지 잘 살펴본 다음, 자신의 잠자리 밑에 깔린 건초 속에 숨겨놨던 가죽바지를 꺼냈다.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손질을 해뒀기에 가죽바지의 상태는 양호했다. 라이는 낡은 옷 속에 가죽바지를 집어넣은 다음 돌돌 말아서 숨겼다. 이렇게 해놓으니 헌옷 누더기처럼 보일 뿐, 감쪽같았다.
라이가 누더기 담요뭉치를 등에 이고 나오자, 지독한 악취에 모두들 코를 감싸쥐었다.
“에휴~, 그걸 뭐 하려고 들고 나와? 버려라, 버려. 차라리 내가 좋은 걸 줄게.”
“말로만 하지 마시고 주세요. 저로서는 이거 하나라도 아쉽다구요.”
뻔뻔스러운 라이의 말에 용병들은 황급히 자신들에게 거의 필요없는 여분의 옷가지 따위를 짐에서 꺼내 던져주었다. 그 덕분에 라이는 다시 한 번 짐을 싸야 했다. 악취에 찌든 옷가지들은 모두 버리고, 낡은 로브로 보자기를 대신해서 새로운 짐들을 그 안에 넣었다. 물론 가죽바지도 함께 꽁꽁 묶어서 같이 넣었다. 그건 자신의 재산목록 1호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