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2화 (708/930)

* * *

“먹여만 주시면 돼요. 제발 일 좀 하게 해 주세요.”

“나가!”

덩치가 푸짐한 여관 아줌마는 두말 않고 라이를 내쫓았다. 아무리 사람이 궁해도, 저토록 비쩍 마른 녀석을 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손님들이 자신을 보고 뭐라고 하겠는가. 도대체 이곳 여관의 식사가 얼마나 형편없기에(혹은 고용인을 학대했기에) 저렇게 바짝 마를 수가 있느냐고 욕할 게 뻔했으니까.

바레인에 도착하면, 일단 일자리부터 잡고 일하면서 조금씩 몸을 추스르려고 했던 라이의 계획은 그 시작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도착한 날부터 시작해 해가 질 때까지 시 곳곳을 쫓아다녀 봤지만, 그를 고용하겠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젠장, 바레인에만 오면 일이 잘 풀릴 줄 알았는데…….”

꼬르르륵!

뱃속에서는 계속해서 밥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지금까지 굶기를 밥 먹듯 해왔던 라이였기에, 굶는 것 정도로 기가 꺾일 리는 없다. 하지만 잠자리조차 구하지 못해, 담장에 쭈그리고 앉아 밤을 새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서글픈 것 또한 사실이었다.

“아버지…….”

고지식하고 완고하기 짝이 없던 아버지.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였지만, 지금은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해주던 그 맛없는 요리들도 그리워 미칠 지경이었다. 집을 떠난 후, 왜 이렇게 악운의 연속인 건지.

“그래도 운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용병대가 나를 구해줬잖아? 그리고 여기에 오는 동안 식사도 넉넉하게 하게 해줬고 말이야.”

오크 소굴에서 바레인 시까지 오는 데 걸린 18일 동안의 영양가 있는 식사로 인해, 라이의 몸은 꽤나 좋아진 상태였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구경도 하기 힘들었던 따뜻한 햇볕을 듬뿍듬뿍 받고 있다 보니,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더욱 몸이 강건해지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었다.

“그래, 내일은 반드시 일거리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쭈그리고 앉은 라이는 무릎 사이로 고개를 푹 파묻었다. 춥다. 무릎을 꼭 껴안았지만, 몸의 떨림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때는 이른 봄. 이렇게 바깥에서 잠을 자다가는 얼어 죽기 딱 좋은 계절이다. 더군다나 해가 지자, 추위는 더욱 심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얼어 죽을지도 몰라.’

라이는 무심결에 보따리에 손을 집어넣어 가죽바지를 더듬었다. 최고급 가죽바지. 이걸 판다면 따듯한 식사와 잠자리가 보장된다. 하마터면 그는 벌떡 일어설 뻔했다. 하지만 라이는 애써 참았다.

팔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지금은 팔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상거지 꼴을 하고 있는 자신이 이런 고급품을 팔겠다고 하면, 상인이 제대로 된 가격을 쳐줄 리가 없다. 아니, 가격을 쳐주는 것은 고사하고 도둑으로나 몰리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 때문에 라이는 고픈 배를 움켜쥐고, 이런 차가운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서도 가죽바지를 처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누군가의 발자국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뚜벅뚜벅…….

육중한 발자국소리. 하지만 라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자신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곳은 길가다. 지나가는 사람이 자신을 이 자리에서 내쫓을 수는 없다. 그리고 라이는 쏟아지는 잠으로 인해 만사가 귀찮은 상태였다.

뚜벅뚜벅 들려오던 발자국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발자국 소리가 멈췄다. 그리고는 걱정스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얼어 죽어. 날이 조금 따뜻해졌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잘 수 있는 날씨가 아니라고.”

라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너무 잠이 쏟아져, 상대에게 대꾸하기도 귀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이에게 말을 건 소년은 끈질겼다. 라이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라이의 몸까지 흔들며 말했다.

“이봐, 정신 좀 차려 봐.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니까. 이봐, 이봐!”

몽롱해져 가는 정신, 잠이 쏟아진다. 라이는 귀찮았지만, 힘을 내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나른하게 풀려 있었다.

“놔 둬. 잠 좀 자게……. 졸려 죽겠단 말야.”

라이는 잠에서 깼다. 눈앞이 깜깜한 것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직 해가 안 떴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이어 라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해가 뜨지 않았다고 해도 이건 너무 어둡다. 하다못해 별빛이라도 보여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어젯밤의 그 매서운 추위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건물 안임에 틀림없다. 어둠 속으로 손을 뻗어 바닥을 만져봤다. 나무의 감촉이다. 틀림없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라이는 황급히 자신의 전 재산이 들어 있는 보따리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손을 더듬거려 봐도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덮고 자던 냄새나는 넝마조각 외에는.

“이럴 수가, 이게 어디로 간 거지?”

허둥대며 주위를 더듬거리는 라이. 물론 워낙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무심결에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눈에 밖에서 스며들어 오는 가느다란 빛의 선이 보였다. 문틈으로 빛이 스며들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쾅쾅!

“이봐요, 문 열어 줘요!”

그러자 밖에서 사내의 괄괄한 음성이 들려왔다.

“조용히 하고 있지 않으면 맞을 줄 알아.”

사내의 위협에 라이의 목소리는 급격히 낮아졌다. 오크에게 당한 긴 노예생활로 인해 그의 성격도 꽤 많이 바뀌어 있었다. 옛날 같았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겠지만.

“여, 여기가 어딥니까?”

“…….”

“무, 무서워요. 여기가 대체 어디예요? 훌쩍.”

우는 척 하는 라이의 목소리가 먹혀들어 갔는지 사내의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이 들려왔다.

“얌전히 있어. 그러면 아무도 너를 해치지 않을 테니까.”

라이는 빛이 스며들어 오는 문틈으로 눈을 바짝 대고 밖의 동정을 살폈다. 시야가 워낙 제한적이라 살펴본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밖에는 탁자 하나가 놓여 있었고, 자신에게 위협을 가한 사내가 그 탁자에 앉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두목.”

탁자에 앉아 있던 사내가 두목인 모양이다. 그리고 방금 들어온 앳된 목소리의 소년은 그의 똘마니고.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제 말이 맞았어요, 두목.”

“녀석이 브리스코 용병대에서 도둑질을 한 거였나?”

왜 이곳에서 갑자기 브리스코 용병대의 이름이? 하고 라이가 생각하는 순간, 똘마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지도 모르죠. 수소문을 해봤는데, 어제 브리스코 용병대와 함께 들어온 애라고 하더라구요. 오크들에게 노예로 잡혀 있던 걸 구해줬다고 하던데요.”

“노예로 있던 걸 구해줘?”

그렇게 반문한 두목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오크족 본거지를 치지 않고서야, 사람을 구출한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하지만 저 몰골을 보면 오크한테 잡혀가는 걸 우연히 만나 구출했다고 보기에도 그렇고…….”

“오크족 본거지를 친 게 맞대요. 두목도 치토우 황야의 무법자라고 불리는 오크족을 아시잖아요. 그놈들을 몰살시켰다고 하더라구요.”

두목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치토우 황야의 무법자라고? 이야, 그게 사실이라면 꽤나 짭짤하게 벌었겠군.”

치토우 황야의 무법자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던 오크족. 그들에게 피해를 본 사람은 꽤나 많았다. 하지만 아무도 섣불리 그들을 치겠다고 나서지는 못했다. 피해만 크고, 소득은 별로 없을 게 뻔했으니까. 아마 용병대는 누군가의 의뢰를 받고 오크족을 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강한 오크족이라면 꽤나 많은 보수가 오고 갔을 게 뻔했다.

“쩝, 꽤나 많이 벌었겠지?”

두목은 욕심이 나는지 입맛을 쩝쩝 다셨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간이 부었다고 해도, 용병대의 금고를 털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건 너무 위험했으니까.

“아뇨.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요. 별로 돈 냄새가 안 나더라구요.”

용병들은 돈 쓰는 데 있어서 아주 헤프다. 목숨을 걸고 돈을 벌었으면, 잘 모아뒀다가 사업밑천이라도 해야 하는 게 정상인데, 그들은 그렇지 못했다. 평소 가지고 싶었던 것을 사는 것부터 시작해서, 술과 계집…….

“돈 냄새가 안 나더라고? 거참, 이상하네.”

고개를 갸웃하던 두목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핫, 그러고 보니 정말 배은망덕한 놈이로군. 목숨을 구해준 은인의 물건을 도둑질했으니 말이야.”

“그런 심보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꼴이 된 거 아니겠어요? 천벌을 받은 거죠.”

“큭큭큭, 그거 말 되네.”

자신을 비웃는 듯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라이는 그들이 브리스코 용병대를 찾아가게 된 동기가 바로 가죽바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브리스코 용병대에서 도둑질한 물건이라면 팔 때 조심해야겠네.”

“문장만 지우면 감쪽같지 않을까요? 두목.”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흔한 물건이라면 모르겠지만, 희귀한 물건은 들킬 위험이 높거든. 차라리 여기서 파는 것보다는 세바인 시로 가져가서, 거기에서 파는 게 좋겠어.”

“그럼 저 녀석은 어떻게 하실려구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팔아버려야지.”

바깥에서 도란도란 들려오는 대화를 들으며, 라이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번에는 인신매매냐? 이놈의 팔자는 정말…….’

정말이지 울고 싶어지는 라이였다.

“용병대에서 가죽바지까지 훔쳐낸 걸 보면 꽤나 실력이 있는 놈 같은데, 그냥 데리고 쓰지 않으시고요?”

그러자 두목의 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인의 가죽바지까지 훔치는 쓰레기야. 그런 놈을 뭘 믿고 써. 그냥 팔아버리는 게 최고지.”

“비쩍 말라서 누가 사가기나 하겠어요?”

자신을 팔아버리겠다는 쪽으로 대화가 기울자, 라이는 황급히 소리쳤다.

“그 바지 제가 훔친 게 아니에요!”

“저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훔친 게 아니면, 그걸 왜 네 녀석이 가지고 있어?”

마치 비웃는 듯한 상대의 말투에 울컥했지만, 라이는 애써 참았다. 라이는 차분한 어조로 자신이 오크의 노예로 잡혀 있을 때의 일을 얘기했다. 그 바지를 자기가 어떻게 가지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제발 믿어 주세요.”

그러자 밖에서 두런두런 얘기 소리가 들려왔다.

“꽤 그럴듯한데요. 복수를 한 거라면, 오늘 거기에 갔을 때 술 취한 용병들이 별로 보이지 않던 이유가 설명되잖아요.”

“좋아, 라이. 오크한테 잡혀가기 전에는 뭐 했었냐? 고향은 어딘지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얘기해 봐. 혹시 누가 아냐? 동향사람이라서 내가 너를 풀어줄지 말이야.”

라이는 잽싸게 상대가 원하는 걸 말해줬다.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기사라는 것과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기사 수업을 받으며 성장했다는 것만큼은 숨겼다. 대신 라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제법 재산이 많은 상인이라고 말했다.

“저를 보내 주시면, 아버지께서 후사하실 겁니다. 제발 저를 좀 놔 주세요.”

“두목, 저 얘기를 듣고도 파실 생각이세요?”

“그러면 저렇게 나이 먹은 놈을 어디다가 써? 듣자하니 도둑질도 제대로 못하는 모양인데. 지금 그런 걸 가르치기에는 너무 늦었잖아.”

“그건 그러네요.”

“네일 영감에게 전해. 쓸 만한 놈이 하나 들어왔는데, 금화 1골드에 사지 않겠느냐고 말이야.”

“1골드씩이나 줄 거 같아요? 말도 안 돼요. 네일 영감이 얼마나 짠돌인데…….”

“그건 그때 가서 흥정하면 될 일이야. 네 녀석이 참견할 필요는 없다.”

“알겠습니다, 두목.”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리겠다는 말에, 듣고 있던 라이는 화들짝 놀라 급하게 소리쳤다.

“제발 저를 그냥 풀어주세요. 여기서 있었던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요.”

라이가 애절한 목소리로 사정했지만, 두목은 냉정한 어조로 대꾸했다.

“조용히 안 해? 한 마디만 더하면, 몇 대 맞을 줄 알아!”

“…, 훌쩍.”

격하게 밀려드는 억울함과 서러움에 눈물을 삼키는 것 외에 라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