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려가는 라이
어두운 곳에 있다 보니 시간의 흐름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한참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었다. 갑자기 밖에서 칼칼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마도 두목이 네일 영감이라고 했던 늙은이가 찾아온 모양이다.
“물건이 있다며. 상태는 괜찮아?”
“어서 오십시오, 네일 씨. 물론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뒤탈이 있는 물건은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여기 출신도 아니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오크 소굴에 잡혀 있었다고 하더군요.”
“오크 소굴이라고? 젠장! 1골드라고 해서 꽁지 빠지게 달려왔더니, 헛걸음을 했잖아.”
1골드라고 한 것은 네일 영감을 낚기 위한 미끼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오크 소굴에서 살았다는 말에 네일 영감은 물건의 상태를 볼 생각이 싹 사라진 모양이다. 그가 그냥 돌아가려고 하자, 두목이 말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잠깐만요, 네일 씨. 무슨 성격이 그렇게 급하십니까. 일단, 여기까지 오셨으니 물건이라도 보고 가셔야죠.”
밖에서 빗장을 여는 소리가 들려오자, 라이는 주먹에 힘을 꽉 줬다. 여차하면 치고 나갈 생각이었다. 계속 바깥의 동정을 살펴본 결과, 밖에 있는 건 두목이라는 놈 한 명뿐이었다. 간혹 가다 똘마니 한둘이 들락거리기는 했지만, 그들은 그리 오랜 시간 머물지 않고 곧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렇다면 지금 문밖에는 두목과 영감, 이렇게 두 명밖에 없으리라.
끼이익!
귀가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문이 활짝 열렸다. 그와 동시에 쏟아져 들어오는 엄청난 빛줄기. 라이는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들 생각이었지만, 상대가 보여야 달려들든지 아니면 빈틈을 노려 도망치든지 할 게 아닌가. 라이가 강한 빛줄기 때문에 눈조차 뜨지 못하고 버벅거리고 있을 때, 네일 영감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내 살다 살다 이렇게까지 비쩍 마른 놈은 처음이로군.”
라이가 시력을 채 회복하기도 전에 갑자기 문이 탁 하고 닫혔다.
“안 돼!”
재빨리 뛰어가 힘껏 문을 밀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밖에서 빗장을 거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라이는 문을 쾅쾅 치며 소리쳤다.
“이러지 말아요. 풀어 줘요. 나를 풀어 줘! 문 열어!”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고 두목의 열성적인 목소리만 들려왔다.
“저거 봐요. 겉모습만 저렇지, 원기왕성 하다니까요. 아직 젊으니까 잘 먹이면, 조금만 지나도 예전 모습을 되찾을 겁니다.”
두목의 그것에 비해 네일 영감의 목소리는 심드렁했다.
“흠, 병든 게 아니라면……. 좋아, 20실버 주지.”
영감의 제안에 두목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겨우 20실버요? 요즘 노예 시세가 얼만데…….”
“저런 꼬라지인데 더 받기를 원하나? 불만이면 직접 노예시장까지 자네가 데리고 가든지.”
아무나 노예시장에 노예를 데리고 가 거래를 하지는 못한다. 정식으로 노예를 팔려면, 제반 서류가 빈틈없이 갖춰져 있어야 했다. 이 노예가 어떤 사유로 인해서 노예가 되었는지를 증명하는 그런 서류들 말이다. 그리고 그런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불법적인 루트를 통해 거래를 하려면, 어지간한 인맥과 조직력 가지고는 거래 자체가 불가능했다.
영감의 최후 통첩에 두목은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나를 꺼내줘! 풀어달란 말이다. 이 새끼들! 내가 무슨 물건인 줄 알아? 내가 풀려나면 너희들은 다 죽었어. 관청에 고발할 테다. 고발!”
라이의 악에 받친 외침이 들리는 가운데, 장시간 고민하던 두목이 결국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10실버만 더 쓰시죠, 네일 씨.”
잠시 궁리하는 듯하던 네일이 말했다.
“5실버.”
“조금만 더 쓰시죠.”
두목은 애처롭게 사정했지만, 네일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더 이상은 절대로 안 돼. 저렇게 비쩍 마른 놈은 팔기도 힘들단 말이야.”
또다시 시작된 침묵. 하지만 그것은 전보다는 빨리 끝났다. 두목의 체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습니다. 25실버로 하죠.”
“좋아, 물건은 모레 찾으러 오지. 그동안 잘 먹여놔.”
“걱정 마십시오. 먼 길 떠나는 데 지장 없도록 잘 먹여 놓을 테니까요.”
“참, 인수하러 오는 당일은 음식은 물론이고, 물 한 방울 먹이지 않아야 된다는 것쯤은 잊지 않았겠지?”
“핫핫,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디 하루이틀 장사합니까?”
문 밑쪽에 만들어 놓은 조그만한 쪽문이 탁 하고 열리며, 두목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릇 내놔.”
살짝 열린 쪽문으로 재빨리 다가간 라이는, 구리로 만들어진 다 찌그러진 그릇을 밖으로 내밀었다. 밖으로 나온 그릇에 두목은 뜨끈한 스튜를 한 국자 떠 넣어줬다. 뻣뻣한 싸구려 빵 한 덩어리와 함께. 이게 식사의 전부였다.
“남기지 말고 다 처먹어. 알겠지?”
당연히 음식을 남길 생각이 없었던 라이는 빵을 찢어서 스튜에 찍어 먹었다. 숟가락 따위는 아예 없었다. 빵으로 그릇의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먹었기에 설거지를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릇은 깨끗하게 변했다. 물론 설거지 하라고 물을 따로 넣어 주지도 않았지만.
라이가 두목이 넣어주는 음식을 군소리 하지 않고 깨끗이 먹어치운 이유는, 체력을 비축하는 게 최우선적인 과제였기 때문이다. 실낱같은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움켜쥐려면 체력이 있어야만 했다.
‘영감이라고 했지? 좋아. 빈틈을 노리다 보면, 노예시장까지 가는 동안에 최소한 한 번쯤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야.’
라이가 희망을 거는 것은 네일이 늙은이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오랜 노예생활로 인해 비쩍 말랐다고는 하지만, 나이 많은 영감 하나 제압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물론 수갑이라든지 족쇄 같은 구속구를 채우기야 하겠지만, 기회만 있다면 영감을 때려눕히고 열쇠를 탈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크 소굴에서도 살아남은 나야. 여기라고 내가 포기할 거 같아? 나중에 두고 보자. 꼭 복수해 줄 테다.’
어떻게 해서든 아버지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아버지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고해 바치면, 저 인신매매 일당은 절대 살아남지 못하리라. 아니, 구태여 아버지의 손을 빌릴 필요도 없다. 관청에 가서 고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그러면 그의 복수는 관청이 대신 해 줄 것이다. 그는 햇볕이 잘 드는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두목과 그 똘마니들이 교수형에 처해지는 것을 구경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 언젠가는 나한테 살려달라고 싹싹 빌게 만들어 줄 테다. 반드시.’
갇혀 있다 보니 따로 할 일도 없는 만큼, 라이는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복수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상상하며 자신을 위안했다.
꼬로로록!
뱃속에서는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두목이 밥을 주지 않았다.
‘참, 그 영감이 당일에는 아무것도 먹이지 말라고 했었지? 오늘이 바로 그날인 모양이군. 아, 목마르고 배도 고프고…….’
두목은 아침부터 어디로 갔는지 밖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기야 그 전에도 두목이나 그 똘마니들은 이곳을 자주 비워놓고 들락거렸다. 그걸 보면 여기가 저들의 본거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컴컴한 데다 구석진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보니 살며시 잠이 밀려들었다. 라이는 정신을 차리려고 하지 않고, 일부러 잠에 빠져들기 위해 노력했다. 배고픔과 갈증을 잊는 데는 그게 최고였으니까.
라이가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을 때, 갑자기 빗장이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드디어 기회가 왔다. 오늘이 그 네일 영감이라는 놈이 자신을 인수받기로 한 바로 그날인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문이 열릴 리가 없지 않은가. 순간 문이 활짝 열리며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라이는 인상을 찡그리며 팔을 들어 빛을 가렸다. 눈이 빛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 여유가 필요했다.
억센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을 때쯤 라이의 시력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이때, 라이의 눈에 탁자 앞에 서서 자신을 노려보며 서 있는 한 중년인이 보였다.
중년인이 라이에게 안겨준 인상은 정말 강렬했다. 안 그래도 사나운 눈초리를 지닌 데다가, 뺨은 물론이고 한쪽 눈알마저 훑고 지나가버린 기다란 칼자국으로 인해 그의 인상은 가히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 과연 똘마니들이 두목으로 받들어 모실 만한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놈이 두목?’
두목은 푸대자루에서 사슬뭉치를 꺼내며 말했다.
“이쪽으로 데려와.”
반항을 할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두목의 인상을 보는 순간 라이는 기가 질려버렸다. 괜히 까불어 봐야 좋을 게 전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손 내밀어.”
라이는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그냥 넘어가고, 나중에 기회를 봐서 영감을 때려눕히는 게 훨씬 쉽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라이의 표정은 곧이어 일그러졌다. 상대가 자신에게 채우려고 하는 수갑은 일반적인 수갑이 아니었다.
두목이 꺼내든 것은 노예용으로 특별히 제작된 구속구(拘束具)였다. 수갑과 족쇄만 차고 있어도 움직이는 데 커다란 제약을 받게 될 텐데, 이것은 그 둘을 사슬로 연결해 놓아 더더욱 움직이기 불편하게 만들어 놨다. 더군다나 구속구에 열쇠 따위는 아예 달려 있지도 않았다. 열쇠로 열게 만들어 봐야 관리하기만 힘들고, 또 노예가 열쇠를 훔쳐 탈출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구속구에 자물쇠를 다는 대신, 이것은 좀 더 단순하면서도 풀기 어려운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양쪽을 오므린 다음, 그 사이에다가 작은 쇠막대기를 박아 넣는 형식으로 잠가버린다. 쇠막대기가 꽂혀 들어갈 구멍은 한 치수 작게 제작되어 있기에, 망치로 쇠막대기를 두들겨 넣어버리면 뽑는 것 또한 예삿일이 아니었다. 전용 장비를 동원하든지, 아니면 대장간으로 쫓아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두목과 똘마니는 수갑은 물론이고 족쇄까지 라이에게 완벽하게 채웠다. 하지만 두목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끈을 꺼내어 무릎을 묶고, 또 팔도 움직이기 어렵도록 꽁꽁 묶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소리도 내지 못하도록 재갈까지 채워버렸다.
이때, 두목 옆에 서 있던 똘마니가 입을 열었다.
“밖에까지 들어다 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네일 씨.”
순간 라이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라이는 얼굴을 홱 돌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두목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네일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더 살펴봤다.
‘헉, 이 사람이 네일이라고? 영감이라더니! 이게 무슨 영감이얏!’
“들어 줄 필요 없어. 내가 자네와 함께 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는 게 더 문제야.”
“그건 그렇습죠.”
당황한 라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여기까지였다. 네일이 커다란 푸대자루 속에 그를 집어넣어 버렸던 것이다.
“여기 있네. 은화 25개. 세 보게.”
“예, 틀림없군요.”
“다음에도 물건이 생기면 꼭 연락해 주게.”
“물론입니다, 네일 씨. 제가 네일 씨 외에 다른 사람에게 물건을 넘기는 걸 한 번이라도 보신 적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