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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를 수확하게 되면, 그것을 수집상들이 거둬들여 경매장에 내놓듯, 노예의 거래 또한 그와 유사했다. 전쟁이 벌어졌다든지 하는 이유로 노예가 대량으로 발생하지 않는 한, 노예를 처음 사들이는 사람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노예를 수집하는 수집상들이다.
물론 이들이 노예 거래만 하는 것은 아니다. 돈 될 만한 것들은 몽땅 다 취급하는 잡상인으로서, 그 거래 품목에 ‘사람’도 포함된다고 보는 게 옳았다. 즉, 노예 거래는 부업인 셈이다.
수집상들은 구매한 노예를 광산촌 따위와 같은, 고되고 힘든 일 때문에 사람들이 가려 하지 않는 곳을 찾아가서 팔아넘긴다. 노예를 원하는 소비자와 직거래를 하는 편이 마진이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집상들이 돌아다니는 곳은 변방이었다. 즉, 노예를 사서 부릴 만큼 돈이 많은 부자들은 거의 없다는 말이다. 때문에 수요가 그다지 많지 않은 만큼, 그들은 노예를 원하는 소비자를 찾기 힘들어지면 울며 겨자 먹기로 중간상인에게 노예를 저렴한 가격에 넘기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중간상인부터가 노예 거래를 전업으로 뛰는 자들이다. 그들은 수십, 혹은 수백 명 단위로 노예를 모아서 각종 경로를 통해 노예를 필요로 하는 시장까지 운반한다. 운송료가 꽤 많이 들지만, 노예의 가치 또한 훨씬 더 높게 뛰는 만큼 절대로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수집상으로부터 노예를 사들여 그것을 운반하고, 경매장에서 판매하기까지 그 과정을 몽땅 다 혼자서 처리하는 대규모 중개상도 간혹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했다. 특히 해상 운송의 경우, 선장이나 선주들이 개별적으로 노예 거래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몇 차례나 국경을 건너고, 또 육로에서 해로, 그리고 또다시 육로로 운송되어 오는 기나긴 여정. 주인이 바뀔 때마다 조금이라도 더 돈을 많이 받기 위해 경매를 하기도 했지만, 경매장에도 수수료를 줘야 하는 만큼, 대부분 단골인 거래처에 적당한 가격에 넘겼다.
산 넘고 물 건너서, 소비자들이 넘쳐나는 대도시에까지 운반되어 오면 노예의 가격은 산지 가격의 5배 이상으로 불어나게 된다. 그쯤에서 소비자에게 팔려가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지만, 일부 선택받은 노예들은 그렇지 않았다. 일종의 재교육 과정을 거쳐 더욱 높은 몸값으로 가치를 불리게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여자 노예의 가치와 요리를 능숙하게 할 줄 아는 여자 노예의 가치는 10배 이상 차이가 난다. 그런 만큼 어린 노예가 들어왔을 때 그 아이들 중에서 외모가 뛰어나고, 총명한 녀석들을 골라 재교육을 시키는 사업 또한 성황리에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키워내기만 하면 엄청난 부가가치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노예 양성소(養成所)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이 바닥에서는 꽤나 알아주는 실력자 중 한 명이 바로 테귤러였다. 마치 옆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을 하고 있는 중년 사내. 살까지 투실투실 쪄서 더욱 인심 좋게 생긴 외모를 하고 있었지만, 노예상들은 잘 알고 있었다. 겉모습과는 달리, 이 뚱보의 속마음이 뱀처럼 교활하고 냉혹하다는 것을. 이미 이 방면에는 악명이 자자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테귤러 씨. 오늘은 어쩐 일이십니까?”
“새로운 물건들이 들어왔다고 해서 왔네.”
정확히 말하면 어제 도착했다. 그리고 예정대로였다면 지금쯤 통관작업이 끝났으리라. 테귤러는 이 시점에 찾아와서 쓸 만한 노예들은 몽땅 다 뽑아서 가버렸다. 그것도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하지만 노예상으로서는 판매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상대가 너무 거물이었던 것이다.
“일부러 이곳까지 찾아오셨는데 이거 죄송해서…, 아직 검역(檢疫)을 마치지 못했기에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말에 테귤러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상하군. 어제 도착한 게 아니었나?”
어제 도착했다면 지금쯤이면 검역과정이 끝나 있어야 정상이다. 다른 노예상이라면 몰라도,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정이 있었다니, 어쩔 수 없지.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주저없이 일어서는 테귤러.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며 노예상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놈이 윗선에다가 대고 몇 마디 말만 해도, 이번에 수입한 노예들의 통관 허가가 언제 떨어질지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테귤러는 웃으며 일어섰지만, 이 방면에서 그가 왜 악명을 떨치고 있는지 노예상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노예상은 황급히 테귤러를 따라 나오며 사정했다.
“고정하십시오, 테귤러 씨. 검역이 끝나는 대로 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일견 비굴하게까지 느껴지는 노예상의 대응에 테귤러는 발걸음을 멈췄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 쓸 만한 놈들이 있던가?”
“저도 아직 실물을 본 건 아닙니다만, 서류상으로 봤을 때 테귤러 씨가 흥미를 가지실 만한 아이는 몇 있는 것 같더군요. 검역이 끝나는 대로 따로 관리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제3부두는 노예선들이 접안하는 부두였다. 외국에서 수입되어 들어오는 노예들의 검역 때문에 노예선들만의 전용부두를 정해놓은 것이다. 노예상의 사무실은 제3부두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테귤러는 부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두에는 꽤 많은 노예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어쩌면 한꺼번에 배들이 밀려들어오면서 검역이 지연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요즘 노예선들이 꽤 많이 들어오는 것 같더군. 내 위쪽에 말해 두지. 자네 배의 검역을 최우선적으로 해주라고 말일세.”
“감사합니다, 테귤러 씨.”
선수에 말 조각상이 붙어 있는 돛대 3개짜리 대형 범선이 바로 노예상의 배였다. 청소를 하느라 갑판 위를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선원들의 모습이 조그마하게 보인다.
그때 테귤러의 눈에 꽤나 색다른 광경이 들어왔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무심코 봤을 때는 못 보고 지나쳤었는데, 지금 보니 돛대에 사람이 하나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도 매달려 있는 사람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마치 뼈다귀를 연상시킬 정도로 비쩍 마른 것이, 흑마법사들이 소환한다는 스켈레톤 같았다.
제법 먼 거리였기에 자신이 제대로 본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테귤러는 품속에 손을 넣어 작은 망원경을 꺼냈다. 망원경으로 자세히 확인해 보니, 자신이 본 게 틀림없었다. 매달린 노예의 몸은 정상적인 게 아니었다.
“혹시 전염병이라도 들어온 건가?”
전염병이라는 말에 노예상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전염병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쪽을 보게. 아까는 몰랐는데, 저기에 비쩍 마른 노예를 하나 매달아 놨지 않은가. 귀중한 상품을 굶겨서 저렇게 만들어 놨을 리는 없고…….”
노예상은 잠시 망설이더니, 할 수 없다는 듯 털어놨다.
“전염병은 아니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생각을 해보시면 아실 겁니다. 병에 걸린 노예를 돛대에 매달아 놓을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자네 말이 맞는 것 같군. 그런데 무슨 일이기에 저렇게 매달아 놓은 건가? 그러고 보니 채찍질이라도 한 모양이지? 등판에 핏자국이 있는 걸 보면 말일세.”
“이런 말씀 드리기 부끄럽습니다만, 글쎄 저놈이 탈출을 시도했지 뭡니까.”
통관작업 도중에 노예가 탈출을 시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쇠사슬로 꽁꽁 묶인 데다, 이동할 때는 여러 명의 감시를 받게 되니 말이다.
그런데도 놈이 탈출을 감행했다는 말은 어딘가 헛점이 보였다는 뜻이다. 즉, 안전을 위해 취해야 할 단계들 중 하나 이상을 무시했다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렇기에 노예상은 한사코 그걸 감추려고 했던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말씀드립니다만, 저 녀석이 탈출하는 바람에 검역이 중단되었습니다. 녀석을 붙잡았을 때는 이미 검역관이 돌아가 버린 후라서……. 다시 검역을 해달라고 요청은 해놨습니다만, 대기하고 있는 배가 워낙 많다 보니 한 며칠 걸릴 것 같습니다.”
“으흠~, 그렇게 된 것이로군.”
순간 테귤러는 흥미가 동하는 것을 느꼈다. 설마, 항구에 배가 도착한 첫날의 혼란을 틈타 탈출을 시도하는 놈이 있을 줄이야. 꽤나 행동력이 있는 교활한 놈임에 틀림없었다. 테귤러는 다시 한 번 망원경으로 노예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봤다. 성인은 아니었다. 순간 테귤러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놈이라면 키워 볼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노예가 머리를 치켜들었다. 노예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테귤러의 눈에는 급격하게 실망감이 어렸다. 나이가 어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기대만큼 어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최소한으로 잡는다고 해도 14살은 넘어 보였다. 교육시키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였다.
하지만 녀석의 눈빛 하나만큼은 마음에 쏙 들었다. 반항적으로 번쩍이고 있는 차가운 눈빛! 전혀 기가 죽은 놈의 눈빛이 아니었다.
꽤나 흥미가 동하기는 했지만, 노예상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괜히 말해봐야 가격만 올라갈 테니까. 그렇기에 그는 짐짓 딴전을 피웠다.
“아주 제대로 매질을 해놨군.”
“예. 하지만 통할지 의문입니다. 비리비리하게 생긴 것에 비해, 아주 지독한 독종이라고 하더군요. 제대로 팔 수나 있을지 걱정입니다. 지금까지 녀석을 손보려고 했던 사람이 꽤 있었던 모양인데…….”
노예상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노예가 지녀야 할 최고의 미덕은 순종(順從)이 아니겠는가. 저렇게 기가 센 노예를 사겠다는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
“어쨌건, 검역이 끝나고 나면 기별이나 넣어 주게.”
“염려 놓으십시오, 테귤러 씨.”
테귤러가 노예상을 다시 찾은 것은 그로부터 3일이 지난 후였다. 원래는 전날 연락이 왔었는데, 마침 일이 있어서 가지 못하고 하루가 지난 후에 달려온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테귤러 씨.”
잠시 환담이 오간 후, 테귤러는 물건을 먼저 보기를 원했다.
“이 아이들입니다. 외모는 물론이고, 혈통도 괜찮은 아이들로 골라놨습니다.”
물론 정말 괜찮은 애들 몇 명은 뒤로 빼돌려 놓은 상태였다.
테귤러는 노예상이 건네주는 서류를 뒤적거리며 살펴봤다.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위로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 노예들의 신상내력이 꽤나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서류상으로는 꽤 괜찮구먼.”
이때 여자노예 하나가 살며시 걸어 들어와서는 공손히 인사하며 노예상에게 보고했다.
“아이들이 준비되었습니다.”
“평소처럼 한 명씩 들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해주게. 그리고 자네는 볼 일을 보러 가보게. 나중에 일이 끝나면 부르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잠시 후, 여자노예가 아이를 한 명씩 테귤러가 있는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아이들은 테귤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모두들 깨끗하게 씻겨서 잘 입혀놓은 상태다. 여느 부잣집 아이들에 비해 전혀 모자람이 없어 보일 정도로 귀엽고 기품이 흐르는 아이들이다.
테귤러는 방에 들어온 아이들을 꼼꼼히 살펴봤다. 옷을 벗겨서 몸매를 살펴보는 것은 기본이다. 혹시 채찍 자국 같은 게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상류층에 납품해야 하는 노예의 몸에 보기 흉한 흉터가 있어서는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지능이나 성격을 알아보기 위해 이런저런 질문을 해댔다. 어떤 질문은 지금 상황과는 완전 별개의 뜬금없는 것이기도 했고, 또 어떤 질문은 아이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그런 것이기도 했다. 아이들의 반응을 보기 위함이었다.
노예들을 모두 살펴본 테귤러는 만족스러운 듯 노예상에게 말했다.
“이번에 들어온 아이들의 품질은 꽤 괜찮군.”
“감사합니다, 테귤러 씨.”
“나는 이 정도 가격이라고 판단했네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테귤러가 건네주는 서류. 처음에 노예상이 그에게 건네줬었던 아이들의 신상내력이 적혀 있던 서류였다. 테귤러는 그 서류 아래쪽에 각각의 가격을 써놨다. 그걸 본 노예상의 인상이 왈칵 일그러졌다.
“이, 이건 너무 적습니다. 조금만 더 쓰시지요, 테귤러 씨.”
“총액 624골드 24실버. 꽤 후하게 써놨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조금만 더…….”
아마 딴놈이 와서 이딴 소리를 했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곧바로 내쫓아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테귤러인 만큼 그럴 수가 없었다. 여기서 장사 접을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한동안의 실랑이와 우는 소리가 오고간 후에야 금액이 결정되었다. 650골드로. 물론 그것도 상품의 질에 비한다면 굉장히 싸게 판 것이다.
노예상은 우울한 표정으로 묻는다.
“아이들은 언제 보내드리면 되겠습니까?”
“내일 아침에 보내주게.”
“예, 테귤러 씨.”
테귤러는 짐짓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일전에 돛대에 매달려 있던 녀석 말일세.”
“예.”
“그 녀석도 볼 수 있겠나?”
테귤러의 말에 노예상의 안색이 핼쑥하게 바뀌었다. 마치 똥 씹은 듯한 그런 구린 표정 말이다.
“예? 설마, 그 노예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마음에 든 것은 아니고, 확인해 볼 게 있어서 그런다네. 왜 그러는가?”
“그런 놈을 누가 찾을까 싶은 차에 검투장에서 노예가 필요하다고 하길래 팔아버렸는뎁쇼.”
비록 테귤러가 비양심적인 날강도이기는 했지만, 노예를 보는 안목은 대단히 뛰어났다. 그런 그가 관심을 가질 만한 노예를 똥값에 처분해버렸다니. 노예상으로서는 너무나도 원통해서 기절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에 비해 테귤러는 노예상이 말한 검투장이라는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비쩍 마른 애를 검투장에서 쓰겠다고 샀다니. 청소? 그런 일을 시키기에는 몸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검투장에?”
“예. 이번에 거창한 쇼를 할 예정인데, 거기에 쓸 노예들이 필요하다고 해서요.”
쇼에 쓴다는 말에 테귤러는 감 잡았다. 그는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어, 검투장에서 소비하기에는 아까운 녀석이었는데…….”
테귤러가 관심을 보이는 것은 고급 노예들이다. 그런 노예를 5골드도 안 되는 헐값에 넘겨버렸으니, 노예상은 울 듯한 표정이다.
“그렇게 쓸 만한 놈이었습니까? 하, 하지만 그놈은 지금까지 테귤러 씨께서 구입해 가신 상품들과는 꽤 거리가 있는 녀석이었는뎁쇼.”
“그건 나도 알고 있네. 그 때문에 자네한테 그날 말하지 않은 거고. 첫째로 나이가 너무 많았고, 둘째로는 몸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거든.”
테귤러는 자신이 어제 와보지 않은 것을 아쉽게 생각했다. 그랬다면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았다. 정말로 테귤러가 그 아이를 원했다면 검투장에 사람을 보내어 데려올 수도 있었다. 검투장에서 원하는 것은 머릿수였지, 꼭 그 아이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 아이를 대신할 노예만 건네주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테귤러는 그만뒀다. 이미 검투장으로 팔려간 녀석을 이리로 데리고 오려면 시간이 꽤 걸리니까. 더군다나 그 아이를 꼭 사겠다는 마음도 없었다. 이리로 데리고 와서 살지 안 살지 판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깨끗하게 포기하고 돈 될 만한 다른 애를 찾는 게 시간상으로 훨씬 이익이리라.
모든 일을 마무리 지은 뒤 노예상의 사무실을 나와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테귤러의 눈에 현란한 포스터 한 장이 눈에 띄었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괴수가 커다란 몽둥이로 사람을 잔인하게 때려죽인 후, 뜯어먹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 밑에 쓰여 있는 글자들.
지상 최고의 몬스터 쇼!
이 이상의 자극적인 볼거리는 없다!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포악함! 잔인함! 그리고 괴력!
오감만족(五感滿足)!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일순 테귤러의 눈에 경멸이 어린다.
“쓰레기 같은 새끼들! 저딴 볼거리를 만들 생각을 하다니. 검투장에서 노예를 왜 사갔는가 했더니, 별 쓰레기 같은 수작을 부리고 있었군.”
테귤러는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듯 거친 동작으로 커튼을 쳐 마차의 창문을 가려버렸다. 적어도 그는 저런 말초적인 자극으로 돈을 벌지는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