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9화 (715/930)

기억봉인 마법

“이 아이입니다, 신관님.”

그로부터 며칠 뒤, 신관을 집으로 초대한 커밍스는 라이를 향해 짐짓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에 앉거라, 라이. 신관님께서 네 고통을 덜어주실 게다.”

고통을 덜어줄 거라는 말에 라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다면 노예 신분에서 풀어준다는 뜻인가? 그런데 자신에 대한 권리는 커밍스의 것인데, 왜 신관이? 라이로서는 커밍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커밍스도 라이의 대꾸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신관이 들으라고 한 얘기였으니까.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라이가 헛소리를 나불거려 산통을 깰 우려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라이가 대꾸를 할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신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부탁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신관님.”

“예, 자 가만히 앉아 계십시오, 형제님.”

신관은 앉아 있는 라이의 뒤편에 섰다. 신관의 손은 라이의 머리 위에서 우아하게 움직이며 주문의 수순을 밟아갔다. 주문이 점차 길어질수록 그의 손에서 뿜어나오는 빛의 강도는 조금씩 강해졌다.

“리멤브런스 실(Remembrance Seal;기억봉인)!”

신관의 주문이 완성되는 순간,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라이의 머릿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자, 어떠십니까? 형제님.”

라이는 눈을 멀뚱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신관님께서는 혹시 저한테 무슨 치료마법이라도 구사하신 겁니까? 저는 별로 아픈 데도 없는데요…….”

라이의 대답에 신관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이분이 누구시죠?”

신관의 질문에, 라이는 왜 그런 뻔한 질문을 하느냐는 듯 심드렁한 태도로 대꾸했다.

“제 주인님이시죠.”

“주인님의 이름이 뭔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커밍스님이십니다.”

“주인님이 하시는 일은 뭔지 아시나요?”

“검투사 양성소를 운영하고 계시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동안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던 신관은 커밍스에게 말했다.

“이상하군요. 신성마법이 듣지를 않습니다. 분명히 마법은 성공했는데…….”

커밍스는 곧바로 손을 들어 신관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은 다음, 라이에게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신관님께서 네게 치료마법을 베푸신 거다. 네가 요즘 많이 힘들어 한다고 내가 부탁드렸거든. 자, 이제 여기 일은 끝났으니, 훈련장으로 돌아가 보거라.”

“예, 주인님.”

라이가 돌아가고 난 다음, 커밍스는 신관에게 물었다.

“방금 하신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법이 실패했다는 겁니까?”

“이런 경우는 저도 처음 당해보기에 뭐라고 말씀을 드릴수가 없는데……. 뭔가가 마법을 방해했다고밖에는…….”

커밍스는 일순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마법을 방해했다고요?”

“예. 현 상황에서는 그렇게밖에는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어쩌면 마법을 방해하는 특별한 마법도구를 지니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노예 따위가 그런 귀중한 걸 지니고 있을 리가…….”

여기까지 말하던 커밍스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뭔가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게 떠올랐던 것이다. 녀석의 정체 자체가 왠지 조금 수상쩍은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녀석이 자신을 목표로 접근해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자신이 달려가서 억지로 사왔지.

‘딴 놈을 목표로 잡았었는데, 우연히 내가 먼저 구입해 버린 건가? 아니면 경기장에서 사고를 일으켜 그 일을 나한테 뒤집어씌우겠다는 것인가?’

마법이 통하지도 않는데 신관을 계속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실례되지 않을 정도의 금액을 신관에게 건넸다. 신관이 돈을 바라고 이리로 온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다음에 또다시 부려먹으려면 잘 보여 둘 필요가 있었다.

신관을 보내자마자 그는 교관을 호출했다.

“찾으셨습니까, 소장님.”

“그 녀석이 몸에 걸치고 있는 것들 중에서 뭔가 수상쩍은 게 없던가?”

“수상쩍은 거라뇨? 그런 걸 숨기면서 지낼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것을 소장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장담하건데, 불알 두 쪽 빼고는 아무것도 가질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커밍스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참 이상하네.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야.”

이때, 여자노예가 나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손님의 도착을 알렸다.

“마인 테귤러라는 분께서 주인님을 뵙기를 청하고 계십니다.”

여자노예의 말에 커밍스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인 테귤러. 이쪽 업계에서는 꽤나 전설적인 인물이다. 어린 노예를 교육시켜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데 있어서는 서로가 비슷했지만, 그 분야는 완전히 달랐다. 테귤러는 상류층을 상대로 하는 최고급품만을 취급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커밍스가 취급하는 주된 품목은 검투장용 노예였다.

취급 품목이 다른 만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커밍스는 테귤러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그가 나를 찾아왔다는 것일까? 하지만 궁리하느라 시간낭비를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기에는 테귤러는 너무나도 거물이었으니까.

“어서 안으로 드시라고…, 아니지. 내가 직접 나가보는 게 좋겠구나.”

사람 좋아 보이는 소탈한 미소를 만면에 짓고 있는 중년인. 꽤나 살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련해 보이지 않는 것은, 그만큼 원판이 잘 생겼기 때문이리라.

“바쁘신데 찾아뵌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

“아닙니다. 자자, 자리에 앉으시지요.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테귤러 씨.”

서로 간에 인사가 오고간 후, 테귤러는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그만큼 커밍스가 만만하다는 뜻이리라.

“이번에 구입하신 노예가 있다고 들었소이다. 라이라고 하는…….”

“아, 검투장에서 구입한 그 녀석 말씀이시군요.”

“예. 그 아이를 저에게 넘겨주실 수는 없으시겠소?”

굉장히 무례한 요구였지만, 커밍스는 감히 따지지 못했다. 그만큼 테귤러는 이곳 시에서 차지하고 있는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검투 노예는 취급하지 않으신다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물론 검투용 노예는 취급하지 않소. 하지만 호위용 노예는 키우고 있지요. 나는 그 아이를 호위용으로 키워볼까 생각했소.”

노예를 호위로 쓰면 유리한 점이 아주 많다. 특히 비밀유지에 있어서 말이다. 그렇기에 호위 노예의 가격은 아주 비싼 편이었다. 그리고 노예의 실력이 높을수록, 그 가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호위 노예의 가격이 비싼 걸 뻔히 알면서도, 커밍스는 호위용 노예 시장에 감히 뛰어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상류층 인물을 밀착해서 호위해야 하는 만큼 무예도 뛰어나야 했지만, 상류층의 예절 또한 확실하게 몸에 배도록 만들어놔야 했기 때문이다. 커밍스는 무예라면 몰라도, 예절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 아이는 타고난 검투사입니다. 귀족들 호위나 한다고 처박혀 있기에는 그 재능이 아깝지요. 제 대답은 거절입니다.”

방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테귤러의 낯빛이 변했다. 어느새 사람 좋은 미소는 사라지고, 탐욕에 가득 찬 얼굴이 드러났다. 테귤러는 심히 불쾌하다는 듯 짜증 어린 어조로 위협했다.

“크흠! 내 청을 거절하는 건 귀하의 신상에 썩 이롭지 않다는 것을 잘 아실 텐데? 40골드 드리겠소. 두 번 권하지는 않겠소. 이번에는 잘 생각해서 대답하는 게 좋을 거요.”

30골드 주고 놈을 사왔으니, 40골드에 판다면 10골드는 이익인 셈이었다. 하지만 라이의 가치가 겨우 40골드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면, 테귤러 같은 거물이 직접 달려와서 협박을 하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커밍스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행동은 하지 못했다. 여기서 ‘NO’를 한다면 한순간의 기분이야 좋을지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은 폭삭 망하게 될 게 뻔했으니까. 그만큼 이 도시에서 테귤러의 위치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커밍스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 그 정도라면 고, 공정한 것 같군요. 테귤러 씨.”

화가 치밀다 보니 목소리마저 떨린다. 그 떨림을 테귤러도 눈치 챘을 것이다. 씨익 미소 짓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에 대해 가타부타 말은 하지 않았다.

“여기 있소. 녀석에 대한 서류 일체를 넘겨받고 싶소.”

이미 준비해 왔는지, 그는 품속에서 작은 돈주머니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툭 하고 던졌다. 그러면서 그는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