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를 테귤러에게 넘겨줘 버렸다는 말에 교관은 굉장히 아쉬워했다.
“아니, 소장님. 저놈을 테귤러 같은 악당에게 넘겨주시다니…….”
커밍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놓친 고기가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하지만 놈은 놓친 게 아니라, 잡아놓은 걸 뺏긴 게 아닌가. 커밍스로서는 미칠 지경일 것이다.
“나도 잘 알고 있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말게.”
“하, 하지만…….”
“됐어. 어쩌면 녀석은 테귤러에게 갈 운명이었는지도…….”
여기까지 말하던 커밍스는 갑자기 이마를 탁 치며 외쳤다.
“그렇구나! 바로 그거였어.”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장님.”
커밍스는 혹시 주위에 엿듣는 자가 없는지 슬쩍 둘러봤다. 있는 거라고는 테귤러를 접대하느라 내왔던 다과(茶果)를 치우고 있는 여자노예뿐이었다. 즉, 아무도 없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라이 같은 녀석이 나한테 넘어왔다는 게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어쩌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커밍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아니야. 그럴 수가 없어. 자네는 모르겠지만 무슨 짓을 해놨는지 녀석에게는 신관의 기억봉인 마법이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았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아나?”
교관은 깜짝 놀랐다. 그는 아직 기억봉인을 실행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하지 않으신 게 아니라,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아, 그래서 그때 녀석이 뭔가 이상한 걸 지니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물어보셨던 거군요.”
“그래. 정말 수상하기 짝이 없는 놈이지. 그런데 오늘, 녀석을 테귤러에게 강탈당하고서야 깨달았어. 녀석은 테귤러를 목표로 어딘가에서 키워진 놈이라는 것을 말이야.”
“암살자…, 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가능성이 절대적이지.”
“어쨌건 소장님의 원수는 그 녀석이 갚아주겠군요.”
“그래, 그 망할 테귤러 놈만 사라져 준다면 이 도시도 좀 더 살 만해질 텐데 말이야.”
라이를 테귤러에게 뺏긴 커밍스는 불타는 복수심에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하지만 그로서는 더 이상의 행동은 할 수 없었다.
테귤러가 상류층에 납품하기 위해 키우는 호위용 노예의 절대 다수는 늘씬한 미녀들이었다. 미녀들은 무예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아도 서로 데려가려고 야단이었으니까. 최소한의 노력을 투자하여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는 데는 여자 노예만 한 게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남자 노예를 취급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경우처럼 재능이 뛰어난 놈일 경우에는 중간매매만 해도 충분한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가 중간매매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정도 인재를 제대로 키울 만한 검법도, 또 교관도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던 탓이다.
커밍스의 집무실이 소박함의 극치를 보여줬다면, 테귤러의 집무실은 호화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바닥은 물론이고 벽면, 천장까지도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차가운 돌의 느낌을 완화해 주는 아름다운 그림과 조각상들, 가구들도 모두 다 최고급품들뿐이다.
테귤러를 시중들기 위해 문가에 서서 대기하고 있는 여자노예들. 몸매도 늘씬할뿐더러, 두 명 다 보기 드문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거의 반나체에 가까울 정도로 간소한 옷차림만을 하고 있다. 테귤러를 찾아온 손님들 중에서는 여자노예를 보고 한눈에 홀딱 빠져가지고는 즉석에서 거금을 지불하고 사간 사람까지 있었을 정도다.
하지만 테귤러의 사무실에 들어선 무술교관은 그녀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들은 팔기 위해 전시해 둔 상품들로서, 모두 다 순결한 처녀들이었다. 멋모르고 찝쩍거렸던 놈들치고 단 한 명도 살아남은 놈은 없었다. 그들의 처리에 직접 관여까지 했던 무술교관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타고난 전사의 기질이 엿보이는 놈이라고 하던데, 자네가 데리고 있어 보니 과연 그렇던가?”
테귤러의 물음에 무술교관은 신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뭔가 좀 수상쩍은 부분이 있습니다, 소장님.”
“수상쩍은 부분?”
테귤러의 무술교관은 과거 용병으로 꽤나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고급검술을 익히지 못했다는 한계로 인해 그래듀에이트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 실력에 있어서 그리 뒤처지는 인물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인물이 커밍스가 알아낸 사실을 모르고 지나칠 리가 없었다.
“흐음…, 이미 검술을 익혔다는 말이지? 그것도 꽤나 깊은 수준까지.”
“예. 제 느낌으로는 틀림없습니다. 녀석은 일부러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있습니다.”
잠시 궁리하던 테귤러. 그는 신음성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크흠…, 암살자라는 말이로군.”
“십중팔구는 그렇습니다.”
“어떤 놈이 보냈을까?”
“커밍스란 놈일 게 뻔하지 않습니까.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그놈을 당장…….”
이 시대 대부분의 세력가들이 그러하듯, 테귤러 또한 사병(私兵)들을 키우고 있었다. 물론 대놓고 도심지 내에서 무장한 병력을 대량으로 키우는 것은 곤란했기에, 용병대라는 형식을 빌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테귤러는 손을 슬쩍 들어 교관의 말을 막았다.
“경거망동할 사안은 아닐세. 그렇게 대놓고 암살자를 넣는 경우가 있던가? 더군다나 커밍스에게서 놈을 내가 뺏어왔지 않나. 아마, 뛰어난 인재라면 내가 곧장 달려들 줄 알고, 어떤 놈인가가 함정을 판 것일 게야.”
자신이 하고 있는 노예사업의 폭은 대단히 넓었고, 원수진 놈들 또한 그만큼이나 많았다. 도대체 어떤 놈이 암살자를 보낸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테귤러의 입가에는 여유 있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크크, 겨우 암살자 따위로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가소로운 것들.”
“녀석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까?”
“당연히 죽…….”
여기까지 말하던 테귤러는 급히 말을 바꿨다.
“아니, 그것보다 더 좋은 게 있군.”
테귤러가 사용하려는 방법은, 우연히도 커밍스가 쓴 방법과 똑같았다. 물론 거기에 초대된 신관의 질은 테귤러 쪽이 한 등급 높았다. 그는 대신관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물론 종파는 달랐지만…….
“허어, 그것 참 이상하군요. 이럴 리가 없는데…….”
기억봉인 마법을 두 번씩이나 썼음에도 불구하고 먹혀 들어가지 않자, 대신관은 라이가 뭔가 신성마법을 막는 특별한 마법도구를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의심 많은 테귤러는 그 자리에서 라이의 옷을 남김없이 벗겨버리는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찾아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정말이지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대신관님.”
테귤러의 말에 대신관은 난감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어, 그것 참…….”
이때, 옆에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교관이 끼어들었다.
“혹시 몸속에 숨긴 게 아닐까요?”
“참,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 몸속에 그런 걸 집어넣고 꿰매 버리면 감쪽같을 테니까.”
교관은 라이의 몸을 샅샅이 훑어봤다. 하지만 아무리 꼼꼼히 살펴봐도 그 어느 곳에서도 꿰맨 흔적 따위는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손으로 직접 몸을 더듬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실패였다. 몸 전체를 이 잡듯 주물렀는데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이물감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런 흔적도 없는데요, 대신관님.”
대신관으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실력이 떨어져 제대로 마법을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비쳐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대신관은 곧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잠깐 비켜보시구려. 다른 마법을 써보게.”
대신관은 기억봉인이 아니라, 다른 마법을 써봤다.
“불의 힘으로 세상을 정화해 주소서. 화이어!”
대신관의 주문이 끝나자마자 허공에 시뻘건 불덩어리 하나가 둥실 떠오르더니 라이에게로 달려들었다. 난데없는 불벼락에 라이는 기절초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으아아악!”
순식간에 라이의 온몸에 불길이 옮겨붙었다. 그 모습을 본 대신관은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라이가 뭔가 마법도구를 사용하여 자신의 마법을 막았다고 주장했었는데, 라이의 살이 노릇하게 익어버렸으니 무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 마법이 통하는군요.”
대신관은 급히 치료마법을 시전하여 라이의 상처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리고는 대신관은 황급히 둘러댔다.
“아마 특이체질인 모양입니다. 보십시오. 다른 마법은 몽땅 다 먹혀 들어가지 않습니까?”
테귤러는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대신관님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특이체질만으로 이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조금 억지가 있는 듯 싶습니다만…….”
난감한 표정으로 입술을 곱씹던 대신관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급히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신의 가호를 받고 있을 수도 있겠군요. 저 아이를 총애한 어떤 신이, 자신을 떠받드는 저 아이의 이성이 사라지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겠지요.”
암살자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큰 놈이 신의 가호를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대신관에게 대놓고 그렇게 따질 수는 없었다.
“고위 신관도 아닌데, 신의 가호를 받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저 아이는 신관도 아니고, 한낱 노예일 뿐인데 말입니다.”
“글쎄요. 이래서 어찌 한낱 인간이 깊고 깊은 신의 뜻을 알 수 있겠느냐 하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닐런지요.”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갔지만, 대신관이 와서 해준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아니, 한 가지는 있었다. 녀석의 기억을 봉인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 것 말이다.
“끄응, 저놈을 어떻게 하지?”
“그냥 죽여버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편이 뒤끝도 깨끗하고 말입니다.”
교관의 말에 테귤러는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대꾸했다.
“뒤끝이야 그쪽이 깨끗하겠지만, 나는 생돈 40골드를 날리게 된다는 게 문제지.”
“고문을 해볼까요?”
“고문을 한다 해서 놈이 실토할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고문도 안 하고 그냥 넘어가 버릴 정도로 어수룩했다면 테귤러는 지금의 이 엄청난 부를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교활한 두뇌와 재빠른 행동력! 그게 오늘의 그를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으니까.
“녀석을 다시 이리로 데려와.”
“옛, 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