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2화 (718/930)

호색한 주인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즈음, 라이는 테귤러의 부름을 받고 그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집무실에는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손님 한 명이 테귤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내가 입고 있는 옷은 아주 고급이었고, 떡 벌어진 어깨를 지닌 그의 몸에 아주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런 점잖은 모습과는 달리 테귤러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연신 문 앞쪽에 서 있는 여자노예를 훔쳐보는 것이, 여자를 꽤나 밝히는 게 분명했다.

“주인님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이리로 오너라.”

테귤러는 낯선 사내에게 라이를 소개했다.

“이 아이라네.”

사내는 라이를 붙잡고 몸 여기저기를 더듬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주물렀다. 종아리는 물론이고, 허벅지까지도……. 누가 보면 변태라고 오해할 만한 장면이었지만, 알고 보면 그게 아니었다. 노예의 몸 상태를 확인하려는 것뿐이었으니까.

지금껏 이리저리 팔려 다녔던 라이다.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하여 치아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완전한 알몸 상태로 신체검사를 당한 적도 있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이 정도면 거의 애교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겉모습과는 달리 오크 소굴에 1년씩이나 잡혀 있었던 것 치고는, 그리 상태가 나쁘지 않군요.”

그 말이 마음에 드는지 테귤러는 한껏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이지. 나는 지금껏 신용 하나만을 지키며 장사를 해왔다네. 나 말고 누가 이렇게 시시콜콜한 정보까지 다 가르쳐 주며 노예를 판매하던가. 더군다나 내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라네. 만약, 내가 알려준 노예의 정보에 단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판매 금액의 2배를 배상해 주지. 지금껏 그렇게 해왔으니 말이야. 그건 자네의 상관께서도 잘 아실 게야.”

“테귤러 씨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상태가 생각보다 더 좋다는 거지요. 그건 그렇고 방금 전에 이 아이의 서류를 보니 꽤나 기본기가 충실하다고 적혀 있던데, 제가 직접 확인해 봐도 괜찮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게. 라이, 너는 빨리 나가서 대련 준비를 갖춘 뒤 기다리거라.”

“옛.”

라이가 명령에 따라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테귤러가 갑자기 여자 노예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엄한 어조로 질책했다.

“어허, 미사야! 손님의 잔이 비었지 않느냐.”

질책 당한 미사라 불린 여자 노예는 황홀할 정도의 미소를 지으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나으리. 천녀(賤女)가 미처 확인하지 못하여…….”

“핫핫, 괜찮습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미사는 얼른 얼음에 재워놨던 술병을 꺼내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술을 따르기 위해 그녀가 몸을 숙인 순간, 깊게 파인 옷 사이로 탐스런 젖가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일순 사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의 숨결이 점차 거칠어지는 게 문 근처에 서 있던 라이에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아직 밖으로 나가지 못했던 라이는 미사가 사내에게 하고 있는 짓을 다 훔쳐볼 수 있었다. 이미 저 미사라는 계집의 장난질에 혼줄이 났었던 라이였다.

‘못된 년, 사람을 가지고 놀고 있어.’

“나으리, 나갈 때 나가시더라도, 목이라도 시원하게 축이고 나가시지요. 밖은 너무 덥습니다.”

술을 따른 미사는 은근슬쩍 사내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애교 어린 콧소리를 내며 온몸을 완전히 밀착한 뒤 비벼대기 시작했다. 미사가 하고 있는 꼴을 훔쳐보던 라이의 시선에, 사내의 앞자리에 앉아 있는 테귤러가 잡혔다. 테귤러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라이를 향해 손짓을 휘휘 내저었다. 빨리 밖으로 꺼지라는 뜻이다.

재빨리 밖으로 뛰어나온 라이는 저택을 나오자마자 훈련장을 향해 꽁지가 빠지게 달려갔다. 대련하기 위한 무기를 가지러 가기 위해서다. 교관에게 사정을 말하고 목검 2자루와 방패 2개를 빌린 라이는 저택으로 돌아올 때도 미친 듯 달려왔다.

‘헉헉, 이미 손님이 밖으로 나와 있으면 어쩌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라이는 테귤러가 정말 좋은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며칠 지내는 동안 다른 노예들에게 들어보니,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겉모습과 달리 그의 내심은 음흉한 데다가 잔인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손에 맞아 죽은 노예가 한둘이 아니라는 말에 라이는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자신의 움직임이 늦어 만약 손님을 기다리게 한다면 테귤러가 가만히 있을까? 나중에 경을 치게 될 게 뻔했다.

헐레벌떡 달려 저택에 도착해 보니, 다행히도 손님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미사 년이 손님을 제대로 붙잡고 있는 모양이다. 순간, 미사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뭉클 일어나는 라이였다.

“다음에 만나면 고맙다고, 말이라도 해줘야지.”

하지만 라이의 그런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짜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손님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라이의 살갗이 뜨거운 햇빛에 벌겋게 익을 지경이 되었을 때쯤, 사내가 미사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그의 발걸음은 휘청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술을 얼마나 처먹인 거야?’

사내는 테귤러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라이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끄윽! 너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떠날 준비는 다 된 거냐?”

대련을 한다더니, 떠날 준비 운운하는 것을 보면 이미 거래가 성사된 모양이다. 즉, 라이가 밖에서 뜨거운 햇빛을 애써 참으며 기다린 것이 말짱 헛수고였다는 말이다. 짜증이 불끈 치솟았지만, 그걸 밖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라이는 공손하게 새로운 주인에게 대답했다.

“준비는 이미 끝났습니다, 주인님.”

사실 준비를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노예인 라이에게 짐이라고는 자신의 몸뚱이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호오, 제법인데?’ 하는 듯한 눈으로 잠시 라이를 바라보던 사내는 고개를 테귤러 쪽으로 돌렸다.

“별로 마신 것도 아닌데, 꽤 취기가 오르는군요. 제가 오늘 실례를 저지른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실례라니, 그 무슨 당치도 않은 말인가. 하룻밤 묵어간다면 좋으련만,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이렇게 서두르는지.”

“흐흐, 저도 하룻밤 묵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만, 갈 길이 멀다 보니 테귤러 씨의 호의를 거절할 수밖에 없군요. 다음에 또다시 이런 기회가 온다면 필히 시간적 여유를 듬뿍 만들어서 오도록 하겠습니다.”

‘놀고들 있네. 허우대는 제법 그럴듯하더만, 알고 보니 완전히 호색한에 멍청한 놈이잖아.’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라이는 속으로 이죽거렸다. 새로 주인이 된 저 멍청한 사내놈은 테귤러의 술수에 빠져, 이미 뼈까지 흐물흐물하게 녹은 상태였다. 아마 자신을 산다고 꽤나 바가지를 쓴 게 틀림없을 거라고 라이는 확신했다. 뭐, 바가지를 쓰건 말건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렇게 사내를 내심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던 라이였지만,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돌려졌다. 그렇다.

‘맞아! 그러고 보니 이건 내게 절호의 기회잖아. 술에 취한 저 상태라면 잘하면 도망칠 수도 있겠는데?’

자신을 산 사내가 멍청이든 아니든 그건 상관할 바가 아니다. 자신은 반드시 이 빌어먹을 상황에서 탈출을 해야 했으니까. 문제는 저 사내가 자신을 끌고 가기 위해, 어떤 종류의 구속구를 채우느냐 하는 것이었다.

‘제발 좀 열쇠 있는 걸로 채워라.’

열쇠로 채우는 구속구라면 한적한 곳에서 저 주정뱅이를 기절시키고 열쇠를 뺏으면 된다. 그렇기에 라이는 신께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자신이 도망칠 수 있도록 한 번만 도와달라고…….

이때, 건장한 노예 하나가 쇠사슬 뭉치를 들고 왔다.

“나으리, 어떤 구속구를 채울까요? 여러 종류가 있으니 취향대로 선택하십시오.”

“끄윽, 아닐세. 구속구는 무슨. 나 혼자서도 충분히 이런 놈쯤은 감당할 수 있다네. 끅!”

그 말을 듣는 순간 라이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간절히 바랬던 기회가 드디어 자신에게 찾아왔음을 느낀 것이다.

‘신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드디어 제게 탈출할 기회를 주시는군요. 흑흑…….’

라이가 감격해 하고 있을 때, 테귤러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사내에게 묻고 있었다.

“정말 구속구를 안 채워도 괜찮겠나?”

“아, 괜찮습니다. 어린놈이 까불어 봤자지요. 그건 그렇고, 오늘 대접 잘 받고 갑니다, 테귤러 씨.”

그러면서 사내는 노예에게 자신의 말을 가지고 오라고 명령했다.

‘마차가 아니라 말이라고?’

순간 라이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라이의 시선은 사내의 허리띠에 꽂혀 있는 단검을 힐끗 훑고 지나갔다. 단검의 위치를 정확히 확인하려는 것이다. 만약 말 뒤에 자신을 태운다면, 사내의 단검을 빼앗아 찔러버리면 만사 OK다. 물론 사내가 갑옷을 입고 있다고는 하지만, 갑옷으로 가려지지 않은 부분도 수두룩하니까.

하지만 라이는 눈치 채지 못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는 사내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는 사실을. 그것은 절대 술에 취한 사람이 보일 수 없는 서늘하고 차가운 미소였음을.

곧이어 지시를 받은 노예가 사내의 말을 끌고 왔다. 잡털 한 올 없는 밤색 준마였다. 힘이 넘칠 것만 같은 당당한 체구. 말을 본 후, 라이는 사내에 대한 평가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겉멋만 잔뜩 든 바람둥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훌륭한 말을 보니, 말을 보는 안목 하나만큼은 꽤나 대단한 모양이다. 아니면 엄청난 부자이거나…….

‘정말 멋진 말인 걸? 저걸 타고 달아나면, 감히 쫓아올 수 있는 놈이 없을 거야.’

“너 말은 탈 줄 아냐?”

“예.”

사내는 라이의 대답에 잘됐다는 듯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흠, 그렇다면 잘됐군. 먼저 타라.”

먼저 타라는 말에 라이는 내심 실망했다.

‘젠장, 앞에 타면 기습공격을 하기가 힘든데.’

하지만 앞에 타라는데 어쩔 것인가, 타는 수밖에. 라이는 먼저 말에 올라탔다. 곧이어 사내가 올라와 라이를 꼭 껴안듯 자리를 잡았다.

“좋은 거래와 이렇게 절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테귤러 씨.”

“핫핫, 겨우 그 정도 가지고 무슨 말을. 다음에는 충분한 시간 여유를 가지고 들러주게. 환대라는 것이 어떤 건지, 내 확실히 가르쳐 줄 테니 말일세.”

“그날이 기다려지는군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라이는 말을 타기 전에 사내의 뒤에 앉게 되기를 내심 기대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찮은 노예 따위를 어느 누가 안고 가려고 하겠는가. 가까운 가족이나 연인이면 몰라도, 보통은 뒤에 태우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예상을 깨고 앞자리에 앉고 보니 기습 공격을 하기만 난감해졌다. 물론 팔꿈치로 상대의 배를 가격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 봐야 사내가 갑옷을 입고 있다 보니 큰 효과를 보기 힘들 듯 했다.

‘어떻게 하지? 어디를 어떻게 공격하면 좋을까?’

사내가 숨을 쉴 때마다 지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술 냄새를 계속 맡고 있다 보니, 자신까지 술을 먹은 것처럼 어지러워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라이는 좋은 방법을 떠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사내의 집에 도착하게 되면, 또 다시 이런 좋은 기회가 생긴다는 보장이 없었으니 말이다.

한참을 고심하던 라이는 결국 마음을 굳혔다. 고삐를 뺏은 다음, 뒤에 있는 사내를 등으로 힘껏 밀어버리기로. 그러면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사내는 뒤로 낙마하게 되리라. 말이 달리는 순간에 땅바닥으로 낙마를 하게 되면, 갑옷의 무게까지 더해져 아마 살아남기 힘들 게 분명하다.

다그닥, 다그닥…….

그 순간에도 경쾌한 울림을 만들며 달려가는 준마, 속보(速步) 정도였다.

‘이 자를 즉사시키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속력을 내는 게 좋은데…….’

물론 지금보다 속력을 더 낸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사내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아직 시내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으니까. 사내를 죽이는 것은 인적이 없는 곳에서 해야만 했다.

테귤러의 저택은 중심가에서 벗어난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말을 달릴수록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새로운 주인은 중심가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외곽으로 빠질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예상이 틀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라이가 내심 당황하고 있을 때, 뒤쪽에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으로 보아하니 과묵한 성격인 게냐? 아니면 자신의 앞날에 관심이 없는 게냐?”

갑작스런 사내의 질문에 라이는 내심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크크, 노예로 길들여진 놈이라면 재미없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완전 애늙은이로군.”

사내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는 말에 라이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또다시 사내의 뜬금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 안 고프냐?”

“저는 괜찮습니다, 주인님.”

물론 많이 고팠다. 수련을 하던 도중에 테귤러가 부른다고 해서 쫓아갔고, 또 사내가 대련을 한다고 해서 식사도 하지 못하고 마냥 기다려야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라이는 솔직하게 배고프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라이가 겪었던 세상은, 노예가 배가 고프다고 주인이 얼른 식사를 챙겨줄 만큼 정이 넘쳐 흐르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배가 등가죽에 붙은 주제에, 괜찮기는. 마침 저기 괜찮은 식당이 하나 있군. 멀리 가야 하니 배를 든든히 채우고 가자.”

식당 앞으로 다가가자 안에서 점원인 듯한 소년 하나가 후다닥 튀어나와 맞이한다.

“어서 옵쇼, 손님.”

잽싸게 말고삐를 받아쥐는 소년에게 사내는 동전 몇 개를 던져주며 말했다.

“여물을 든든히 먹여. 콩을 듬뿍 넣어서 말이야.”

“예, 손님.”

뜻밖의 공돈이 생긴 것에 점원이 고개를 팍 숙이며 좋아라 하자, 사내는 피식 웃으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꽤나 술에 취한 듯 보였는데, 지금 그의 걸음걸이는 전혀 술에 취한 것 같지가 않았다.

‘설마 나를 시험하기 위해 취한 척 한 건가?’

라이는 사내의 뒤를 따라가며 좀 더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선은 새로운 주인의 성격과 실력을 파악하는 게 먼저다. 탈출은 그 후의 일이다. 그동안 라이가 수없이 많이 탈출을 시도하며 경험을 한 바로는, 어설픈 탈출은 매만 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사내가 입고 있는 고급 옷만을 봤을 때, 식당은 그런 사내가 들어갈 만한 고급 식당과는 거리가 먼 허름한 곳이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어머, 그러고 보니 아침에 길을 물으셨던…….”

사내가 갑자기 왜 이런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왔는지, 주문을 받기 위해 달려온 여점원을 보자 라이는 곧바로 이해했다. 이런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눈에 띄는 미인이었던 것이다.

사내는 여점원을 향해 곧바로 한쪽 눈을 찡긋하며 수작부터 걸었다.

“아침에 봤을 때부터 언니의 모습이 계속 눈에 아른거려 참을 수 없어서 찾아왔지. 혹시 시간 있어?”

여점원은 새침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손님, 주문이나 해 주세요. 아직 고르지 못하셨다면, 나중에 다시 올게요.”

“거참, 딱딱하기는. 어디보자. 라이, 넌 뭘 좋아하냐? 아, 그리고 거기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앞자리에 앉거라.”

노예 주제에 주인과 같이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식탁 옆에 서 있던 라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주인님. 그리고 전 서 있는 게 편합니다.”

“내가 앉으라면 앉아. 그리고 앞으로 날 주인님이라 부르지 말고, 올란도 씨라고 부르도록 해라.”

지금까지 겪어왔던 주인들과는 전혀 다른 올란도의 말에 라이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여태까지는 자신을 마치 돈덩어리나 벌레같이 취급하는 사람들만 만나봤기 때문이다. 그건 당연했다. 얼마 전에 경기장에서 고블린과 오크와 싸우며 이미 뼈저리게 느꼈지 않은가. 노예는 원래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서 앉으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올란도는 얼른 여점원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눈웃음을 치며 능글맞게 물었다.

“보다시피 일행과 같이 식사를 해야 하는데, 언니가 추천하고 싶은 요리는 뭐야?”

“메뉴판에 쓰여 있는 건 다 맛있어요. 그리고 저 바쁘거든요. 그러니 빨리 주문하세요.”

“흠, 근데 메뉴판에 언니는 없네. 어떻게 안 될까?”

눈가를 반달 모습으로 만들며 음흉하게 말하는 올란도에게 여점원은 쌀쌀맞게 대꾸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파는 게 아니에요. 주문 안 하실 거면 저 가요.”

“아, 아니야. 그럼 이거랑 이거…….”

여점원에게 환심을 사려는 게 목적인지, 올란도는 두 사람이 먹기에는 꽤나 많은 음식을 시켰다. 그러자 여점원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올란도를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그걸 다 드시겠다는 건 아니겠죠?”

“괜찮아. 꽤 먼 길을 가야 하거든. 그러려면 배가 든든해야지. 그리고 먹다 남으면 싸 가면 되니까 상관없어.”

“그럼 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손님.”

주문을 받은 여점원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올란도를 쳐다보다 주방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그런 여점원의 뒷모습을 따라 올란도의 눈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일 만도 하련만, 올란도는 그런 건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고 노골적으로 군침을 흘리며 여점원의 가슴과 탱탱한 엉덩이를 쳐다보았다.

식당 안에는 꽤 많은 손님들로 득실거리고 있었는데, 문제는 대다수 손님들의 시선이 올란도와 비슷하다는 데 있었다. 쉽게 말해 여점원의 움직임을 따라 사내들의 엉큼한 시선 또한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잠시 후에 그걸 뒤늦게 눈치 챈 올란도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젠장, 그러고 보니 식당 안에 손님들이라고 앉아 있는 것들이 다 나 같은 사내놈들뿐이잖아. 어쩐지 이런 허름한 곳에 있을 만한 미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더니만, 주인놈의 수작에 당했군.”

올란도가 연신 투덜거리며 불만을 토해내고 있을 때, 여점원이 쟁반 가득 음식을 들고 다가왔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식탁 위에 차곡차곡 놓여지기 시작하는 음식들. 구운 닭, 빵, 파이, 스튜, 맥주 등등……. 주문을 받을 때 여점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을 만도 했다. 네다섯 명이 먹어도 남을 만큼 음식의 양이 많았으니까 말이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뒤돌아서서 걸어가는 여점원의 살랑거리는 엉덩이를 홀린 듯 바라보던 올란도는 입맛을 다시며 맥주잔부터 집어들었다. 물론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가면서도, 그의 눈은 여점원의 엉덩이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인상을 팍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크으, 맥주 맛이 왜 이렇게 미적지근해? 저장시설이 꽝이로군.”

투덜거리면서도 손은 먹음직하게 구운 닭을 향해 움직인다. 닭다리를 쭈욱 찢어 곧바로 입으로 가져가는 올란도.

“우물우물…, 쩝쩝…….”

닭고기를 씹을수록 올란도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그는 입속의 음식을 억지로 꿀떡 삼키더니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젠장. 이게 닭다리야, 고무 덩어리야? 왜 이렇게 질겨, 질기긴?”

손님이 와글거리는 것에 비해 음식 솜씨는 썩 좋은 식당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계속 불평을 하면서도 올란도는 음식을 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와구와구 음식을 먹는 모습만으로, 이곳 식당의 음식이 꽤나 괜찮은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넌 왜 안 먹어? 먹기 싫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허물없이 다가온 주인은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다. 마치 어렸을 적 같은 마을에 살았던 옆집 형과 같은 편안함과 친근감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그, 그건 아닙니다.”

“있을 때 먹어. 나중에 배고프다고 징징대지 말고.”

올란도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던 라이는, 일단은 그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굶는 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탈출을 하려면 체력이 있어야 할 테니, 먹기로 한 것이다.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있다 보니, 올란도의 행동 하나하나가 확실하게 눈에 들어온다. 멋진 옷에다가, 근사한 말. 라이는 새로운 주인이 처음에는 부잣집 아들일 거라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음식을 먹는 것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자신이 먹어도 억세고 맛없는 음식을, 그는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라이의 시선이 빠르게 올란도가 허리에 차고 있는 장검과 단검으로 향했다. 상당한 고급품이었다.

거친 음식도 잘 먹고, 자신의 경제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고의 무기와 말을 소유하기를 원하는 집단을 라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건 바로 백작의 부하인 기사들이었다. 라이의 얼굴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한다.

‘기사라는 말인가? 젠장, 탈출하기가 쉽지 않겠네. 어쩐지 구속구를 안 채우더라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어. 괜히 혼자 좋아했네.’

올란도의 평가를 빠르게 끝내고 나서야 라이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올란도는 투덜거리며 음식을 먹고 있지만, 라이는 너무나도 맛있다는 듯 음식들을 입에 쓸어 넣고 있었다. 라이에게 있어서 음식은 배를 채울 수 있으면 됐지, 그 맛을 따진다는 건 사치였기 때문이다.

거의 1년이라는 세월을 오크 소굴에서 아무 양념도 안 한 고기만을 먹어야 했던 걸 생각한다면 이건 꿀맛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요리 실력이 엉망인 아버지가 만든 개밥에 길들여져 있었던 라이의 입맛으로는 이 정도는 아주 맛있는 음식들이었던 것이다.

“맛있냐?”

“예, 주인님.”

“핫핫, 주인님이 아니라 올란도라 부르라니까. 내가 소속되어 있는 곳은 붉은 전갈(Red Scorpion) 용병단이다. 나는 네 주인이 아니고, 단장님의 명령에 따라 너를 인수해오기 위해 파견되어 온 사람이지.”

용병단이라는 말에 라이는 자신의 예상이 틀렸음을 알았다. 하지만 검투사나 용병이나 이름만 바뀌었을 뿐, 결국은 싸우는 노예로 팔린 것이다. 어렸을 적, 쫓기는 백작을 따랐던 아버지를 두었던 탓에 전쟁의 쓴맛이 뭔지를 톡톡히 겪어온 라이였다. 백작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기사들이 죽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간신히 정착한 야만의 대지에서는 몬스터들과 싸우다가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따라서 용병단의 노예로 팔렸다는 소리는 곧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

자신의 말에 라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올란도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용병단에는 최소한 희망이라는 게 존재하지.”

라이는 내심 콧방귀를 끼었다. 자신의 이름의 뜻이 바로 희망이라는 북방 계열의 토속어가 아닌가. 하지만 지금 자신의 꼴을 보면 어쩌면 절망이라는 단어를 희망으로 아버지가 잘못 알아들은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올란도는 라이의 얼굴 표정을 유심히 지켜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곳이라면 평생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우리 용병단에서는 10년만 복무하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

“물론 목숨을 걸어야 되겠죠?”

라이의 질문에 올란도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올란도의 모습이 라이에게는 무척 솔직하게 느껴졌다. 만약 온갖 미사여구로 자신을 현혹하려 했다면 콧방귀도 안 뀌었겠지만, 올란도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노예인 이상, 다른 선택권이 없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용병단에서는 네가 하기에 따라 그 신분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만은 말해두마.”

그 말을 끝으로 올란도는 다시 음식을 먹는 데 열중했다. 하지만 그가 한 말의 파장은 제법 컸다. 라이의 머릿속이 무척 복잡해졌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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