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3화 (719/930)

결국 두 사람은 음식을 절반도 먹지 못했고, 나머지는 싸가지고 나와야 했다. 식당을 나서며 올란도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투덜거렸다.

“에잇, 젠장. 입맛만 버렸네.”

그러면서도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계속 뒤로 돌아 여점원의 탱탱한 엉덩이를 쳐다본다. 결국은 저놈의 여종업원 때문에 선택한 식당이니, 자업자득인 셈인데 왜 그렇게 투덜거리는 것인지…….

“일단 시장으로 가자.”

시장이라는 말에 라이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시장바닥은 복잡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혼란한 틈을 타 도망친다면? 하지만 라이의 생각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곧이어 올란도의 얘기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식량부터 충분히 구입해야 해. 사막을 건너려면 최소한 일주일분의 식량은 있어야 하거든.”

그 말을 듣는 순간 라이는 시장에서 틈을 봐 도망치려는 마음을 버렸다. 그러다 괜히 성 경비대에게 쫓기느니, 차라리 사막이라는 곳에서 기회를 엿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랬기에 라이는 올란도의 뒤를 말 잘 듣는 개처럼 졸래졸래 따라다녔다.

식량을 충분히 산 올란도는 라이를 보며 씨익 웃은 뒤 말했다.

“자, 그럼 공간이동을 하러 가자.”

공간이동이라는 말에 라이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급히 물었다. 원래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이대로 성 밖으로 나가야 할 텐데, 뜬금없이 이상한 말을 하니 말이다.

“고, 공간이동이라고요? 그게 대체 뭡니까?”

“크크, 변방 태생이니, 잘 모를 수도 있겠구나.”

어리둥절해 하는 라이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웃던 올란도는 자세히 설명해 줬다. 알카사스 왕국은 마도왕국이라고 불릴 만큼 왕국 내의 주요도시들에 영구적인 공간이동 마법진들을 설치해 놨다고 말이다. 그 마법진을 이용해서 병력이나 물자를 주요도시로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다.

그러면서 그는 전국에 걸쳐 공간이동 마법진을 쫙 깔아놓은 나라는, 이 대륙에 오직 알카사스밖에 없다면서 은근슬쩍 자랑을 늘어놨다. 라이는 왠지 자부심까지 느껴지는 그의 말투에 혹시 올란도의 국적이 알카사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다.”

올란도는 길을 걷다 손가락으로 3층 규모의 파란색 건물을 가리켰다. 건물에 도착해 보니, 한쪽 방향으로 2개의 문이 나 있었다. 한쪽 문에는 ‘입구’, 다른 한쪽 문에는 ‘출구’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출구 쪽에는 무장한 병사 10여 명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올란도는 라이를 이끌고 입구라고 써진 쪽으로 걸어갔다. 통로 앞에는 탁자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곳에는 관리인 듯한 깐깐한 인상의 사내가 한 명 앉아 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링카 성(城), 말 한 마리에 사람 둘.”

관리인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두꺼운 책을 펼쳐서 이리저리 뒤적거리더니, 옆에서 푸른색 종이를 한 장 꺼내 뭔가 기록을 한 뒤 말했다.

“사람은 30실버, 말은 40실버입니다. 모두 2골드입니다.”

“여기 있소. 2골드.”

“감사합니다. 여기 있는 표를 가져가셔서 나중에 링카 성에서 보여주십시오.”

그러면서 관리인은 ‘링카, 사람2, 말1, 총 2골드’라고 쓰던 파란색 종이를 건네줬다. 올란도는 말을 끌고 입구라는 글자가 써진 곳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따라 오너라, 라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100명 정도는 너끈히 서 있을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바닥 전체가 이상한 문양과 글자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는데, 아마 그것이 공간이동을 시켜주는 마법수식인 모양이다.

라이가 마법진 안으로 들어오자 올란도는 주문을 외쳤다.

“링카, 이동!”

그와 동시에 주변이 뿌옇게 흐려지다가 암흑 속에 묻히는 것 같더니, 순식간에 또다시 뿌옇게 흐려지는 듯 하다가 원래대로 시력이 회복되었다. 뭔가 이동하는 것 같은 이질적인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봐도 변한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올란도는 밖으로 나가자고 채근했다. 라이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 다급히 물었다.

“벌써 링카 성에 온 거예요?”

“물론이지. 마법의 힘은 정말 경이롭거든. 내가 이런 마법진을 수십 번이나 타봤지만, 지금도 탈 때마다 이게 가능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란다. 자, 나가자.”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온 후에야 라이는 깨달았다. 올란도의 말이 맞다는 것을. 번화한 모습은 마찬가지였지만 거리에 있는 건물들의 모습이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전의 도시는 화려함을 중시했다면 이곳의 건물들은 상당히 실용적으로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뭔가를 잔뜩 실은 짐마차들이 거리를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출구 앞쪽에는 여러 명의 무장한 경비병들이 서 있었다. 그들 중에서 지휘자인 듯 한 인물이 아는 척을 했다.

“여어, 이거 올란도 중대장님 아니십니까. 어디 갔다 오시는 모양이죠?”

“아니, 자네가 여기는 어쩐 일인가?”

올란도는 말고삐를 라이에게 넘기며 지시했다.

“인사 좀 하고 올 테니,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아, 예.”

올란도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지휘관에게로 다가갔다.

“단장님의 지시로 몇 가지 처리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서로 꽤 친한 모양이다. 쑥덕쑥덕 재미있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라이는 내심 갈등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도망칠까?’

‘아냐. 바로 코앞에 경비병들이 우글거리고 있는데, 어떻게 도망을 쳐. 도망쳐 봐야 곧 잡힐 거야.’

‘하지만 나한테는 말이 있잖아. 말을 타고 도망친다면…….’

‘여기 지리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떻게 도망쳐. 말을 타고 도망친다고 해봐야 독 안에 든 쥐 신세야.’

긍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으로 라이가 갈등하고 있는 동안에 두 사람의 대화는 끝나버렸다. 올란도는 라이에게로 돌아와 말고삐를 받아 쥐었다.

“자, 가자.”

“예.”

말을 타는 순서는 전과 똑같았다. 라이가 올란도에게 안기듯 앞쪽에 탔다. 말을 타고 가면서 도시 밖으로 벗어나기까지 꽤나 먼 길이었기에, 라이는 용기를 내어 질문을 던졌다.

“올란도님, 한 가지 여쭤볼 게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올란도는 혹시 예쁜 여자가 있나 싶어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리면서도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해 줬다.

“괜찮아. 물어봐.”

“방금 전의 마법진 말입니다. 무장한 경비병들은 신분 조사를 위해 거기에 서 있었던 것이겠죠?”

“물론이지. 나야 그들과 안면이 있었기에 무사통과였지만, 다른 사람이었다면 신분증명서를 제출해야 하지.”

“원래 마법진으로 이동하기 전에 신분검사를 하는 게 맞지 않나요? 만약 흉악범이 신분을 감추고 공간이동을 한 뒤 저들을 때려눕히고 도망쳐 버리면…….”

라이의 물음에 올란도는 피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네가 잘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공간이동을 한 직후에는 아무리 뛰어난 무사라고 해도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어. 그리고 마법사도 마법을 쓸 수 없지. 왜냐하면 마법진을 그렇게 만들어 놨거든. 그러니까 그때가 신분검사를 하기에는 최적의 순간이라는 말이지.”

“그렇다면 입구 쪽으로 달아나면요? 그쪽에도 문이 있지 않습니까?”

“당연히 문이 있긴 하지. 그런데 무슨 마법진을 구축해 놨는지는 모르겠지만 입구 쪽을 통해서는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그쪽으로 나가려고 하면 투명한 막 같은 것이 문을 가로막아 더 이상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어 있거든.”

“그, 그렇군요.”

라이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대충 짐작한 올란도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너, 혹시 마법사를 만나본 적이 있냐?”

“아뇨.”

“마법사란 족속들은 엄청나게 머리가 좋은 놈들이거든. 그런 놈들이 마법진을 설치하면서 아무 대비책도 마련…….”

그때 올란도의 말이 갑자기 뚝 끊어졌다. 잠시 기다려 봤지만 더 이상 말이 없었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뒤로 돌아봤다. 올란도의 시선은 다른 쪽을 향해 있었다. 커다랗게 부릅떠진 눈, 분명 얼이 빠져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라이가 그쪽으로 급히 시선을 돌려보니, 화려한 가마 하나가 지나가고 있는 게 보였다. 노예 8명이 매고 가는 커다랗고 화려한 가마. 일순 라이의 눈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사람이 수레를 끄는 것도 아니고, 어깨에 매고 가다니. 저렇게 비효율적인 탈것이 있다는 것은 오늘 처음 알았던 것이다.

가마에는 투명할 정도로 하늘거리는 천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그 사이로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가마 안쪽은 꼭 침상처럼 꾸며놨는데, 요염하게 생긴 한 여인이 반쯤 눕다시피한 자세로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참으로 고혹적인 모습이었다.

천천히 두 사람의 시야에서 멀어지는 가마. 그 모습을 입을 헤 벌리고 바라보고 있던 올란도는 이윽고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방금 그 여자 봤냐?”

“예? 예.”

“저 정도 미인은 이 근처에는 정말 드문데……. 어느 집 여자지? 분명 처음 보는데…….”

“여자를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뭐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래 그거야.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다고 치자. 그걸 아무도 봐주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리면, 꽃의 입장에서는 무척 속이 상할 거 아니겠냐?”

“아항~, 그러니까 주인님께서는 꽃이 속이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렇게 넋이 빠져서 보신다는 거군요?”

살짝 빈정거리는 말투가 느껴졌던 모양이다. 올란도는 라이의 뒤통수를 쥐어박았다.

“큭!”

“짜식이 좀 풀어줬더니 감히 맞먹으려 드네. 인생 선배가 말을 하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야지.”

순간 라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올란도의 왠지 모르게 풀린 듯한 분위기에 휩쓸려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은 아직까지도 노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죄, 죄송합니다, 주인님.”

“거참, 주인님이 아니라 올란도라고 부르라니까. 에잇, 네가 편한 대로 불러라. 어차피 용병대에 들어가게 되면 어느 부대에 소속될지 아직 모르지만, 용병대에서는 직속 상관이 아닌 한 그렇게 깍듯이 대할 필요는 없다. 그만큼 자유롭다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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