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딜의 안내를 받으며 아르티어스는 마법물품 창고부터 천천히 둘러보았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각종 마법재료들. 과연 그랜딜이 자신있게 말했을 정도로 수많은 종류의 마법재료들이 용도별로 분류되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랜딜은 흐뭇한 표정으로 창고 안을 둘러보는 아르티어스에게 현재 마법재료들의 수량과 지금까지 엘프들이 마법공부를 하느라 소비한 마법재료의 숫자를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혹시 드래곤이 뭐라고 할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우려와 달리 아르티어스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엄청난 양의 마법재료들을 소비하긴 했지만, 대신 엘프들의 마법실력이 좋아지지 않았는가. 엘프들의 마법 실력이 뛰어날수록 부려먹기는 더 좋다. 알아서 열심히 공부를 하겠다는데, 그걸 왜 말리겠는가.
마법물품 창고를 둘러본 후, 아르티어스가 향한 곳은 재물들을 쌓아놓은 창고였다. 창고 앞에 도착하자 그랜딜은 얼른 품 안에서 서류 한 묶음을 꺼내 내밀었다.
“이것은 그동안 드워프들이 주인님께 바친 물품을 적은 목록입니다.”
묵향을 만난 후, 아르티어스가 다시금 활동을 재개한 이래 그 지배하에 있는 드워프들은 매년 한 가지씩 공물을 만들어 바치고 있었다. 다른 드래곤들처럼 영토 내의 드워프들을 달달 볶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의 창고는 빠른 속도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자신의 영토라고 우기고 있는 말토리오 산맥은 엄청나게 광활했고,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드워프들의 숫자 역시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다.
목록을 슬쩍 훑어본 아르티어스가 흐뭇한 표정으로 창고 안에 쌓여있는 물품들을 살펴보고 있을 때 그랜딜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그런데…, 산맥의 가장 동쪽에 있는 5개 드워프 마을에서 9년 전부터 공물이 올라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어찌 처리해야 할지……?”
그 말을 들은 아르티어스의 얼굴에 피식 조소가 어렸다. 감히 드래곤에게 바칠 공물을 빼먹을 간 큰 드워프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원인은 뻔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 한 마리가 산맥으로 기어 들어온 모양이다.
“가장 동쪽에 있는 마을들이라고?”
그랜딜은 9년 전의 목록과 10년 전의 목록을 비교하여 보여주며 대답했다.
“예, 바로 여기에 있는 5개 마을들 입니다.”
“그놈들이 왜 공물을 안 보냈는지 가서 살펴봤느냐?”
심드렁한 어조로 묻는 아르티어스. 하지만 그 질문을 들은 그랜딜은 당혹감에 식은땀을 주르륵 흘려야 했다.
‘예리한 놈. 자는 동안 내가 여기저기 돌아다녔다는 것을 눈치 챘다는 것인가? 아니면, 나를 떠보는 건가?’
아르티어스의 의도를 알 수 없었던 그랜딜은 최대한 책잡히지 않도록 두리뭉실하게 대답했다.
“감히 주인님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제 임의대로 그렇게 먼 곳까지 갈 수가 없어서…….”
그랜딜의 대답에 아르티어스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의 영토는 과할 정도로 너무 넓었으니까.
“앞으로 그런 일이 있을 때는 나한테 즉시 보고하도록 해라. 물론 자고 있을 때는 빼고.”
“예, 주인님. 그럼 지금 바로 정찰대를 파견할까요?”
그랜딜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다. 뻔한 거 아니겠냐.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놈이 하나 기어들어온 거겠지. 그 일은 내가 직접 처리하겠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흠, 그나저나 지금쯤이면 식사 준비가 끝났겠지?”
아르티어스의 말에 급히 수정구를 통해 식당에 연락을 취해 본 그랜딜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방금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주인님. 그럼 식당으로 모시겠습니다.”
드래곤들은 드워프 외에도 여러 종족들을 노예로 부렸다. 경비를 세우는 데는 힘이 좋은 오크나 트롤, 오우거 따위를 썼고, 시중을 들게 하는 데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수인족(獸人族)이나 엘프 따위를 썼다. 오크나 드워프처럼 땅딸막하고 투박하게 생긴 놈에게 시중을 받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더 눈이 즐거운 게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밖으로 싸돌아다니는 것을 즐기던 아르티어스는 레어에 노예들을 끌어들이지 않고 살아왔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랜딜이나 얼스웨이를 시작으로, 엘프들을 노예로 부리고 보니 꽤나 편리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예전에는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해야 했지만 지금은 엘프들이 요리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식탁까지 꽃으로 예쁘게 장식해 놨으니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버지의 던전을 탐색할 때, 얼스웨이 후작을 실험용으로 던져버린 것은 그의 실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하찮은 용도로 쓰고 버리기에는 너무 과분한 엘프였으니까.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 일에 대해 후회는 전혀 하지 않았다. 정 필요하면 나가서 몇 마리 더 잡아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그가, 엘프 한 마리 죽은 정도로 후회할 리가 있겠는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음식을 천천히 먹고 있는 아르티어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금단의 비술을 썼으니, 아들놈은 오래전에 태어났을 것임에 틀림없다. 별 탈 없이 성장했다면, 지금쯤 15살이 되었으리라. ‘별 탈 없이’라는 단서가 붙어있다는 게 문제였다. 만약 무슨 사고라도 당해서 죽어버렸다면, 그로서는 도저히 돌이킬 방법이 없었으니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향긋한 육즙이 흘러내리는 맛있던 사슴고기가 마치 모래를 씹는 것처럼 까칠하게 느껴졌다. 그는 나이프와 포크를 툭 내던지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끄응, 제기랄!”
그러자 옆에서 식사 시중을 들고 있던 그랜딜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음식이 입에 안 맞으십니까? 주인님.”
“그건 아니니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다. 식사는 됐고, 포도주나 한 병 가지고 와!”
“옛, 주인님.”
잠시 후, 식탁 위의 음식들이 치워지고 포도주 한 병과 과자가 놓였다.
아르티어스는 포도주 마개를 신경질적으로 딴 뒤 잔에 따라 벌컥벌컥 마셨지만, 그의 머릿속은 온통 아들놈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빌어먹을, 도무지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군. 그래! 브로마네스에게 물어보자. 그놈이라면 뭔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낼지도 모르니 말이야.’
아르티어스가 포도주를 마시다 말고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주변에서 시중을 들기 위해 서있던 엘프들은 겁에 질려 바닥에 납쭉 엎드렸다. 상대는 포악하기 짝이 없는 드래곤이다. 얼굴 표정을 보아하니 식사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했다. 식사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어쩌면 식사를 준비한 자신들을 쓸모가 없다고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모두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들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창백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리고 서있는 그랜딜을 향해 말했다.
“수정구를 내놔 봐.”
아르티어스의 의도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던 그랜딜. 하지만 그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품안에서 수정구를 꺼내 건네는 그의 두 손이 두려움으로 인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랜딜이 내민 수정구를 받지 않았다. 그저 그랜딜이 들고 있는 수정구에 손바닥을 살포시 올린 뒤 뭔가 주문을 외웠을 뿐이다.
스팟!
곧이어 수정구가 밝은 색으로 빛나는가 싶더니 본래대로 돌아갔다.
“나에게 바로 연락되도록 마법을 걸어뒀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도록.”
그제야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랜딜 공작.
“예, 주인님.”
“참, 그리고 어지간한 일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 날 귀찮게 하지 말고 말이야. 알겠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희뿌연 빛 무리에 감싸지는 아르티어스의 몸체. 뿜어져 나오던 빛이 사라졌을 때, 그의 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휴우~.”
아르티어스가 어딘가로 공간 이동해 버렸다는 것을 눈치 챈 그랜딜 공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허리를 꼿꼿이 편 그랜딜 공작은 바닥에 납쭉 엎드리고 있는 엘프들을 향해 명령했다.
“주인님께서는 어딘가로 출타하셨다. 식탁을 정리하고 돌아가서 쉬도록 해라.”
아르티어스가 자리를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조는 공손하기 짝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곳은 드래곤의 레어 안이다. 마법의 원조라고 불리는 드래곤이니 만큼, 아르티어스가 레어에 뭔 수작을 부려놨는지 모르지 않는가. 따라서 그저 조심, 조심 또 조심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랜딜의 지시에 따라 식탁 위를 치우며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엘프들.
“이번에는 또 뭔 짓을 저지르려고 하는 거지?”
그랜딜은 텅 빈 레어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사라진 아르티어스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드래곤은 절대 강자였고, 그 어디에도 얽매이는 것이 없는 자유로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의 주인인 골드 드래곤은 그런 상식에 위배되는 행동을 지금껏 숫하게 저지르고 있었다. 다크 폰 치레아 대공을 양자(養子)로 삼는 파격을 저지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국가 간의 일에까지 깊숙이 개입했다.
지금껏 드래곤이 인간의 도시를 파괴한 적은 많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호비트를 위해서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짓을 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자신의 조국을 대상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때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엘프 또한 잿더미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크루마 제국의 모든 엘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티란 엘 그린레이크 공작을 말이다.
‘이번에도 뭔가를 저지르려고 하는 게 틀림없어. 바깥세상의 일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는 드래곤. 그가 집착하는 게 뭘까? 그게 뭔지만 알아낼 수 있다면, 우리 엘프족에 커다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텐데…….’
물론, 드래곤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계기로 드래곤의 도움을 조금만이라도 얻어낼 수 있다면…, 그것만 해도 세상의 역사가 뒤바뀔 것이다.
브래스 한방 날리는 게 드래곤으로서는 별 일도 아니겠지만, 그 한방으로 크루마 같은 강대국이 휘청거린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흐흐, 어쨌든 어느 정도 행동의 자유를 허락받았으니 살맛이 나는구나.’
이제 아르티어스로부터 공식적으로 자치권을 위임받은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린 그랜딜 공작. 그는 드래곤이 깨어났다는 부하의 보고를 받았을 때만 해도 최악의 상황을 각오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것은 오히려 커다란 기회였다.
‘드래곤이 나를 이 정도로 믿어줄 줄이야……. 이렇게 되면 놈의 이목을 속이고 일을 꾸미는 게 더욱 쉬워진다고 봐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