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정난 여우
따가닥, 따가닥.
목적지인 전갈 성에 도착했을 때, 라이는 기절한 채 말 등에 실려 있었다. 올란도가 성문 앞에 도착하자, 경계병들은 곧바로 그를 알아보고 얼른 성문을 열었다.
성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말들에게 곧바로 물을 먹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커다란 물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풍차를 통해 길어 올려진 물이 끊임없이 흘러들고 있었기에 물은 비교적 깨끗했다.
물통 언저리에는 이미 수십 필의 말들이 묶여있었다. 올란도는 안장과 짐, 그리고 라이를 말 등에서 내린 다음 자신의 애마를 그 말들 옆에 묶었다. 말은 물을 보자마자 주둥이를 틀어박고 열심히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만큼 목이 말랐던 것이다.
“성에 도착했으니 라이를 깨워야겠군.”
올란도가 고개를 돌렸을 때, 라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 녀석이 어디로……?”
첨벙, 첨벙.
이리저리 뒤쪽을 둘러보던 올란도가 요란한 물소리에 고개를 그쪽으로 돌려보니 물통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라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언제 깨어났는지 라이는 말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한 물통을 부여잡고 게걸스럽게 물을 마시고 있었다. 엄청나게 목이 마르긴 말랐던 모양이다.
올란도는 급히 달려가 라이의 허리를 붙잡고 물통 밖으로 끌어냈다.
“놔! 이거 놓으라고. 물! 물을 마시게 해줘. 물~~.”
“짜식아! 그렇게 갑자기 물을 잔뜩 마시면 죽어, 임마. 아무리 목이 말라도 조금씩 마셔야 하는 거라구.”
하지만 이미 갈증에 눈이 뒤집힌 라이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 죽을 힘을 다해 물통으로 다시 기어가려는 라이와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던 올란도는 짜증이 슬슬 치밀기 시작했다. 눈이 뒤집혀서 물통으로 기어가는 놈을 끌어당기자니, 힘도 들었고 말이다.
“젠장, 도저히 말로 해서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군.”
올란도는 주먹으로 라이의 뒤통수를 힘껏 가격했다.
“큭!”
단 한 방이었다. 라이는 기절해서 축 늘어졌다. 올란도는 급히 품속에서 소금을 꺼내 가루로 만들어 라이의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런 다음 주위를 둘러보다 심부름을 시키기에 적당해 보이는 용병 하나를 찾아냈다.
“이봐, 자네.”
“예?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너 말이야.”
그 말에 주춤주춤 다가오는 덩치가 큰 사내. 제법 용병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벌써 올란도가 자신에게 귀찮은 일을 시킬 것 같다는 짐작에 인상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같은 용병들인 만큼, 자신의 직속상관이 아닌 이상 굳이 올란도의 명령을 따라야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올란도는 덩치가 큰 사내가 마치 자신의 부하인양 주저하지 않고 지시를 내렸다.
올란도는 축 늘어져 있는 라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을 대기대(待期隊)에 넣어둬. 나는 지금 단장님께 보고 드리러 가야 하니까.”
그러자 사내는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손사래를 쳤다.
“하, 하지만 저도 바쁜데…….”
사내의 반응에 올란도는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호오, 꽤나 한가해 보였는데, 그렇게 바빴었나? 참, 나는 마틴 올란도라고 한다네. 들어보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일세.”
올란도의 이름을 듣자마자 사내는 마치 똥 씹은 것처럼 인상을 왈칵 일그러트렸다.
“서, 설마 그 발정난 여우라는……?”
사내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올란도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어허, 낭만 여우라고 불러주게. 남의 별명을 자네 마음대로 그렇게 함부로 바꾸면 안 되지.”
그 말에 자신이 알고 있는 올란도가 확실하다는 걸 깨달은 사내는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명령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젠장, 알겠습니다. 이 녀석을 대기대에 넣어두기만 하면 되는 거죠?”
사내가 이렇게 금방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용병단에 자자하게 퍼져있는 올란도의 악명 때문이었다. 올란도는 자신이 낭만 여우라고 불리길 원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그를 발정난 여우라고 불렀다.
‘발정난’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여자를 엄청나게 밝히는 주제에, 왜 그렇게 잔머리는 뛰어난 것인지. 더군다나 워낙에 뒤끝이 강한 인간이라서 한번 찍혔다가는 두고두고 괴롭힘을 당해야만 했다. 타고난 잔머리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마수에 걸려 고생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투덜거리는 사내를 바라보던 올란도는 그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준 뒤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가 자진해서 협조해 준다니, 정말 고맙군.”
축 늘어져 있는 라이 문제가 해결되자 올란도는 단장에게 복귀 신고를 하기 위해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마침 단장은 집무실에 있었다. 올란도는 군례를 올리며 단장에게 보고했다.
“71중대장, 마틴 올란도. 단장님의 명을 받아 신입 부대원 한 명을 노예상으로부터 인수한 후 지금 귀대하였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올란도의 경례를 받은 단장은 탐탁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질책했다.
“왜 이렇게 늦었나?”
“신입 부대원의 실력을 테스트 할 겸, 사막을 한 바퀴 빙 돌았습니다.”
계집질을 하다 늦은 게 아니라, 사막을 한 바퀴 빙 돌았다는 말에 단장의 딱딱했던 표정이 약간은 풀어졌다.
“그래? 수고했구먼. 그런데 본관은 자네에게 실력 테스트를 해보라는 명령을 내린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나간 김에 노예를 하나 인수해 오라고 했을 뿐이지.”
“흐흐, 150골드나 주고 사오라고 하신 노예가 너무 볼품이 없어 보여서, 어떤 놈인지 살짝 맛을 봤을 뿐입니다.”
자신의 질책에도 태연하게 대꾸하는 올란도의 태도에 단장은 그저 피식 웃기만 했다. 사실 올란도는 이런 곳에서 중대장이나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단장은 지금도 올란도를 볼 때마다, 그를 자신의 수하로 부릴 수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저놈의 개차반 같은 성격만 바꿔도…….’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단장은 애써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그런 올란도를 과연 자신이 감당할 수나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사실, 올란도는 이런 용병단에 머물만한 그릇이 결코 아니었으니까.
잠시 올란도를 바라보며 입맛을 마시던 단장은 곧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래, 녀석의 검술 실력은 어떻던가? 테귤러가 호언장담을 할 정도니, 제법 쓸 만하겠지?”
그 말에 올란도는 속이 뜨끔했다. 그러고 보니 노예상에 있는 미모의 여자노예에게 홀딱 빠지는 바람에 검술 실력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게 그제서야 떠오른 것이다. 물론 용병단으로 데리고 오는 도중에도 대련을 할 만한 시간적 여유는 충분히 있었지만, 깜빡 잊어버리고 하지 않았다.
라이를 괴롭히는 것에 재미가 들리는 통에…….
하지만 올란도는 임무를 소홀히 했다는 점을 시인하기 보다는, 곧 자신의 특기인 화려한 말빨로 화제를 은근슬쩍 돌렸다.
“150골드씩이나 주고 산 놈이니, 당연히 그 정도 값어치는 해야죠. 문제는 그게 아니라, 녀석을 우리 용병단의 일원으로 회유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단장님께서도 그런 생각을 하셨으니까, 150골드라는 거금을 배팅하신 거겠지요. 주위에 널려있는 전쟁노예라면 그 반값만 줘도, 녀석보다 훨씬 더 대단한 실력을 지닌 놈을 구입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올란도의 말에 단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우려하는 바를 정확히 짚었기 때문이다.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수하를 둔 기쁨 때문인지, 단장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자네의 말이 옳아. 그래,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녀석이 쓸 만하더란 말이지?”
‘어,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는데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상태였다. 올란도는 썩은 미소를 애써 지으며 어색하게 말했다.
“무, 물론이죠. 괜찮지 않다면 제가 단장님께 이런 말은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단장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든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니, 녀석을 한번 키워보고 싶다는 뜻인 것 같군.”
당연히 올란도로서는 그런 생각은 전혀 해본적도 없었다. 그런데 왜 얘기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을까? 그건 단장이 올란도를 용병단에 붙잡아두고 싶었던 마음에 그 노예를 구입했고, 또 그런 이유로 올란도에게 노예를 인수해 오라고 보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올란도가 자신의 게으름을 변명하기 위해 말한 것이, 단장에게는 노예에게 꽤 관심이 있다고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물론 그건 엄청난 오해였지만, 어쩌다 보니 올란도로서는 그 말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젠장, 얘기가 어쩌다가 이렇게 꼬인 거지?’
여자를 꼬시기에도 바쁜 자신이 왜 눈치를 보며 도망칠 궁리만 하는 꼬맹이를 키워야 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바짝 말린 멸치 같은 체형을 가지고 있는 형편없는 놈을 말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50골드나 주고 산 노예의 실력도 파악하지 않고, 녀석을 데리고 노는 재미에 너무 농땡이를 피운 것이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무엇보다 변명을 하느라 주저리주저리 헛소리를 한 게 결정적인 화근이었다.
“그렇게 해주시면 저야 고맙죠.”
올란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단장은 씨익 미소 지었다.
“알겠네. 그렇다면 노예의 정확한 실력 평가가 끝난 뒤, 자네 중대에 배속시켜 주겠네. 한번 잘 키워 보게나.”
“감사합니다, 단장님.”
귀찮음에 일그러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얼른 고개를 숙인 올란도는 용건이 모두 마무리 되자 더 이상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게 잽싸게 단장실을 빠져 나가려 했다. 그런 올란도를 단장이 불러 세웠다.
“참, 한 시간 후에 간부회의가 있을 거야. 자네도 참석해 줬으면 하는데…….”
“중대장급까지 모두 다 모이는 회의입니까?”
“그건…, 아니고 지휘관 회의일세.”
지휘관 회의라면 용병단 내의 독립부대 지휘관들을 말하는 것이다. 5명의 연대장들과 그리고 3명의 독립대대장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아직 거기에 참석할 계급이 되지 못해서 말이지요. 헤헤…….”
“쯧, 자네의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만 가보게.”
“옛!”
올란도가 단장실 밖으로 나가자 단장은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대며 그와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올란도가 용병단에 가입하고 싶다며 처음 자신을 찾아왔던 그날을.
그를 봤을 때 단장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다. 처음에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황실에서 파견한 기사인 줄 알았다. 온 몸이 저릿저릿할 정도의 패도적인 기운. 그런 기운을 그는 숨기지도 않고, 고스란히 내뿜고 있었다.
‘내 실력이 이 정도니, 알아서 항복하라는 뜻인가?’
하지만 놀랍게도 그게 아니었다. 상대는 지금 자신의 존재감이 고스란히 밖으로 뿜어져 나가고 있다는 것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침울하게 가라앉아있는 우울한 눈빛. 이건 세상 다 산 듯한 그런 눈빛이 아닌가. 한눈에 단장은 올란도에게 뭔가 깊은 사연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사람을 구한다고 들었습니다.”
그가 내뿜는 기세가 워낙에 강했기에, 부하들도 설마 이런 사람이 용병단에 입단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정규기사단에 들어가고도 남을만한 기세의 소유자가 무슨 할 짓이 없어서 용병단에 가입하겠다고 찾아왔겠는가. 그것도 이런 변방에 위치한 용병단에 말이다.
“벌써 10년이나 되었군.”
그가 이곳에 오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전혀 용병단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임무를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지만, 평범한 용병 중대장의 실력 그 이상은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게 단장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과연 무슨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기에, 저러고 있는 것일까…….
‘그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150골드를 쓴 값어치는 있군.’
하지만 곧이어 단장은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정신을 차리는 것은 좋지만, 기사단에 들어가겠답시고 떠나버리면 나만 손해잖아.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단장은 자신의 결정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만큼 올란도를 아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장실을 나선 올란도는 곧바로 훈련장으로 달려갔다. 자신과 친한 교관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용병단 내에 신입이 들어오면 훈련소 교관이 실력 테스트를 행한다. 어느 정도 실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아야, 그에 맞는 곳에 써먹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라이를 자신의 부대에 배속시켜 주겠다는 말에 올란도가 뜨끔한 이유는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훈련소에서 실력 테스트를 받았는데, 평가가 영 형편없이 나온다면 방금 전에 자신이 단장한테 거짓보고를 올린 게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지 않겠는가. 물론, 몸값이 몸값인 만큼 놈의 실력이 쓸 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놈의 멸치 같은 몸매로 봤을 때는 영 못미더운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런 만큼 무슨 짓을 해서라도 실력 테스트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무슨 짓’ 중에서 가장 손쉬운 방법은 평가를 사전에 조작하는 것이라는 것은 올란도에게는 진리와 같은 해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