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용병 사내가 막사까지 업고 왔을 때도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있었던 라이. 워낙 지쳤었기에 기절한 것이 곧바로 깊은 숙면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한참을 곤하게 자고 있던 라이는 겨우 잠에서 깨어났다. 살며시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아직 한밤중인 모양이다. 무심결에 다시금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던 라이는 갑자기 깨달았다.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사막의 모래 위가 아니라는 것을.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살벌한 추위 대신, 따스한 공기가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응? 어떻게 된 거지?”
깜짝 놀란 라이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쿵!
“크윽!”
눈에서 불이 번쩍 했다. 아픈 머리통을 감싸 쥐며 더듬어 보니 머리 위쪽으로 나무의 질감이 만져졌다.
“아그그극, 머리야. 방금 전까지 사막이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여긴 어디지?”
두 눈에 힘을 주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니 어두운 실내였다. 불은 켜져 있지 않았지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 덕분에, 실내의 정경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이 머리를 박은 것은 천정이었다. 2층 침대의 위쪽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이 자고 있는 것과 같은 2층 침대가 4개 정도 더 있었다. 그러니까 층마다 침대 5개, 총 10명이 잘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방이다.
“드르렁…….”
“으드득, 뽀드득!!”
방에는 라이 혼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코를 고는 놈도 있고, 또 어떤 놈은 외나무다리 위에서 웬수라도 만난 듯 무서운 기세로 이빨을 갈아대고 있었다.
라이는 주위를 살피며 살그머니 침대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살금살금 걸어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귀를 기울여 밖의 동정을 살폈다. 밖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볼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라이의 눈에 띈 것이 작은 창문이었다. 라이는 재빨리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광경. 높은 성벽 위에는 주위를 환하게 밝혀주는 화톳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경계를 서는 보초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제서야 현 상황을 이해한 라이가 감격스런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렇지. 성으로 간다고 했었지. 성에…, 겨우 도착했구나. 도착했어.”
그러자 흐릿하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목이 타들어 가는 듯 했던 갈증.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올란도를 놓치지 않기 위해 라이는 필사적으로 걸었었다. 발이 마치 지면에 쩍쩍 달라붙는 것처럼 무거웠지만, 그래도 악착같이 올란도의 뒤를 따라갔었다. 그를 놓치면 죽는다는 생각에…….
결국 자신이 해 낸 모양이다. 라이는 스스로가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었다.
“그때는 괴로워서 죽을 것만 같았는데……?”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도 몸이 가뿐할 수가 있지?
침대라고는 하지만 딱딱한 나무 침상에 그저 이불 하나 덮고 잔 것이기에 편한 잠자리라고 말하기에는 어려웠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잠자리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올란도와 사막으로 들어선 이후부터 그랬다. 밤새도록 덜덜 떨면서 걸어야 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요 근래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오크족 노예 생활로 인해 피폐해진 체력이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빈약한 근육이 그걸 잘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즘 들어 아침에 쓰러지듯이 잠을 자고 일어나면, 온몸에 활력이 용솟음치는 걸 느낀다.
‘내가 옛날에도 그랬었나?’
라이는 잠시 자신의 앙상한 손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예전에 집에서 지내던 그 시절, 몸 상태가 훨씬 더 좋았던 그때도 이렇지는 않았었다. 아버지가 시켜 엄청나게 쌓인 장작을 패고 난 뒤, 온몸을 쑤시는 근육통에 며칠 동안 고생한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건 수련이라는 미명하에 받아야 했던 검술훈련 때도 마찬가지였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몸이 바뀌었어.”
잠을 자고 나면 활력이 샘솟는 듯한 이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더라? 기억을 더듬기 시작한 라이의 머릿속에 곧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이국적인 분위기의 여인.
곧이어 그녀의 비현실적인 검무가 떠오르자, 라이는 애써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런 개꿈은 떠올려 봐야, 정신만 사나워지고…….”
그때 머릿속에 번쩍하고 떠오르는 게 있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테귤러 씨가 내 몸의 활성도를 높여줬다고 했었지. 대신관에게 부탁해서 말이야. 그래, 그거야. 그것 때문인 게 분명해.”
라이는 오크 소굴에서 구출될 때 만났던 사제가 신성마법을 쓰는 것을 직접 경험한 이후, 신의 존재에 대한 것이라면 무조건 믿기로 했다. 예전에 마을에 있을 때 신의 존재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는 무슨 옛날 얘기 듣는 것처럼 무감동했던 게 사실이었지만,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게 되자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제보다 훨씬 지위도 높고, 신앙심도 깊다는 대신관이 자신에게 직접 신성마법을 걸었었지 않은가. 맞다! 그랬기에 요즘 잠만 자고 일어나면 몸이 개운해지고 활력이 샘솟는 것이리라.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의문이 해소되자 라이는 자신의 오줌보가 터지기 일보직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커다란 물통에 머리를 처박고 벌컥벌컥 물을 마셨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때 자신의 주위에는 말들 역시 코를 처박고 물을 마시고 있었다.
“우웩! 이런 젠장, 아무리 내가 정신이 없었다고 해도 그렇지. 말들이나 먹는 그딴 더러운 물을 머리까지 처박고 마셨다니…….”
지금은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슥거릴 정도지만, 그때는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로지 물을 마셔야겠다는 것 외에는.
“젠장,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뭐해. 이미 뱃속에서 소화가 끝나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하고 있는데 말이야.”
중얼거리던 라이는 살금살금 문 쪽으로 다가갔다. 오줌을 핑계로 문밖을 살펴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라이가 조심스럽게 문을 빼꼼이 여는 순간, 갑자기 어둠속에서 거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허억!’
너무 놀라 하마터면 오줌을 싸버릴 뻔 했다.
‘기왕에 들킨 것.’
라이는 당당하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긴 복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복도를 중심으로 그 양쪽 끝에 중무장한 병사들이 2명씩 서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 중 라이의 방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병사들 중 한 명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수고하십니다. 저, 소변이 마려워서…….”
병사는 손가락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화장실은 저쪽에 있다. 왼쪽에서 3번째 문이야.”
“감사합니다.”
‘휴우, 이제 살겠네.’
오줌을 누면서도 라이는 이곳이 성은 성이라고 생각했다. 잠자는 방 앞에도 중무장을 한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니. 지금까지 그가 잡혀있었던 그 어떤 곳보다도 탈출하기 힘든 곳일 가능성이 컸다. 더군다나 성 밖은 뜨거운 사막! 도저히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
볼일을 마친 라이가 힘없는 발걸음으로 자신이 깨어난 방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방금 전의 그 병사가 말을 걸었다.
“좀 더 자두도록 해라.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예.”
병사의 조언대로 라이는 좀 전에 일어났던 침대를 찾아 드러누웠다. 잘 수 있을 때 푹 자서 체력을 비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건 오랜 시간 노예생활을 하며 체득한 경험에서였다.
꼬로로록…….
오줌을 누고 나니, 이번에는 배가 격렬하게 고파오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 밥을 먹었었지?’
물통에 머리를 처박았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그 이전의 기억도 반쯤은 정신이 나간 상태였기에 가물가물하기만 했다.
‘내가 물통에 머리를 처박은 게 아침때였나, 점심때였나? 그런데 지금은 오밤중이니 도대체 몇 시간을 잔거야? 그러니 몸이 가뿐할 수밖에 없네.’
정신을 잃기 시작했을 때에는 물이 거의 다 떨어진 상황이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 허기가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라이는 애써 잠을 청하려고 노력했다. 오크족의 감옥에 갇혀있을 때, 배고픔을 잊는 데는 잠자는 게 최고라는 것을 배웠으니까.
하지만 잠을 자려고 노력할수록 정신은 더욱 맑아지고 있으니 그게 문제였다. 배는 고프고, 더군다나 주위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코고는 소리와 이빨 가는 소리. 소음에 신경이 거슬릴수록 잠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졌다. 정말이지 미칠 지경이다.
라이는 양쪽 귀를 손으로 콱 틀어막으며 중얼거렸다.
“다른 걸 생각해야 해. 오크 소굴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잘만 생활했었잖아.”
이럴 때는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게 좋았다. 그편이 시간도 훨씬 잘 흘러갈 것이고 말이다. 그렇기에 라이는 이리저리 다른 것들을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비관적인 생각들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어릴 때 들었던 영웅담이 떠올랐다. 아무도 병역을 이행하지 않으려는 산골 오지를 지키기 위해, 죄수들이나 노예들을 병사로 써먹었다는 얘기. 그 얘기에 나왔던 노예들처럼 자신도 도적떼나, 아니면 사막에 서식하는 몬스터나 때려잡다가 생을 마치게 되리라.
‘말도 안 돼!’
갑자기 라이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긍정적인 생각만을 해야 한다. 영웅담에도 나오지 않던가. 비관적인 생각만 해서는 난관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영웅담의 주인공들은 모두들 하나 같이 활기찼고, 긍정적인 사람들뿐이었다.
‘그래!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대로 노예로 죽을 줄 알아? 나를 잘못 봤지. 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반드시 여길 탈출하고 말거야. 아니, 탈출할 수 있어!’
라이는 이곳에서 탈출하려면 뭘 해야 하는지부터 생각했다. 우선 상관들의 환심을 사 그들을 안심시키는 동시에, 주변의 지리를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사막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는, 이곳에 오는 도중에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이리저리 잡다한 생각을 하던 라이의 머릿속에 문득 이국의 여인이 등장했던 그 꿈이 떠올랐다. 그녀가 췄던 아름다운 칼춤. 그리고 그녀가 몸속의 기운을 수련하던 괴이한 방법. 꿈에서 깼을 때는 마치 방금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났었던 것처럼 뇌리에 선명했었는데, 그새 며칠이나 지났다고 모든 게 희미해져 버린 상태다.
“그것 참, 예쁜 여자였는데……. 그나저나 내가 그런 여자를 언제 본적이 있었나? 아니면 예전에 들었던 영웅담들 중에서 그런 여자가 나온 대목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왜 그런 괴이한 꿈을 꾸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이, 관두자. 개꿈이 달리 개꿈이겠어?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 개꿈이지. 그건 그렇고, 그 여자가 나오는 꿈을 다시 한 번 더 꾸고 싶어. 정말 예뻤는데 말이지.”
중얼거리며 라이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얼굴은 거의 생각나지 않고, 그녀가 입고 있던 옷차림의 윤곽만이 어렴풋이 떠오를 뿐이다. 오늘밤에도 그녀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을까? 그러면 좋겠는데…….
하지만 라이의 생각은 오랜 시간 그녀에게 고정되지는 못했다. 좀 더 현실적인 부분으로 생각이 옮겨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먼저 성 주변의 지리부터 파악하는 게 우선이야.’
올란도! 그 호색한 인간은 여기까지 오는 내내 여자 얘기만 했지, 탈출에 도움이 될 만한 얘기는 거의 해주지 않았다. 밤에 걷고, 낮에는 잠을 자야 한다는 것. 그리고 모래뿐인 사막이라고 하지만, 어딘가에는 오아시스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줬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오아시스의 위치는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거기를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다. 능구렁이 같은 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