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3화 (729/930)

붉은 전갈 용병단

언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을 하던 도중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이봐, 일어나!”

화들짝 놀란 라이는 눈을 번쩍 떴다. 어느새 날은 훤히 밝아 있었다. 급히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곰처럼 커다란 덩치의 소년이 서있는 게 보였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 정도인 듯 했다.

그런데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그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곤히 자고 있는데 깨워서 미안한데……. 너 어제 저녁밥도 안 먹었잖아. 아침까지 굶으면 안 될 거 같아서 깨웠어. 어제 왔으니까, 오늘 평가를 받아야 할 거 아냐. 그러니 식욕이 없더라도 먹어두는 게 좋아. 참, 난 로크라고 해.”

허물없는 로크의 말에 라이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잘 부탁해. 나는 라이야. 라이 위너스.”

로크는 이곳에 온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신병이라고 했다. 처음 용병단에 입소한 신병들은 낮에는 훈련소에 가서 훈련을 받고, 밤에는 대기대로 돌아와 잠을 잔다고 했다. 그러다가 일정 수준의 실력이 되었다고 판정을 받으면, 각자의 특기와 실력에 맞춰 자대(自隊)에 배치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쩔그렁! 하는 쇠사슬 소리가 들리더니, 신경질적인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새끼들아! 조용히 안 해? 여기에 너희들만 사냐? 개잡놈의 새끼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네!”

라이가 황급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험악하게 생긴 사내가 침대에 앉아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 사내의 발목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다.

재빨리 로크가 라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쪽으로 고개 돌리지 마. 저 사람은 노예병이야. 얽히지 않는 게 좋아. 어제도 일부러 시비를 걸어서 신병 하나를 반쯤 죽여놨다구.”

이때 사내의 으르렁거림이 또다시 들려왔다.

“야, 이 새꺄. 뭘 봐? 딴 데로 대가리 안 돌려? 확, 눈깔을 뽑아버릴라.”

라이가 노예 생활을 경험하다 보니, 진짜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은 말이 많지 않고 조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저렇게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으며 온갖 인상을 써대는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괜한 시비가 붙어봐야 좋을 게 없었기에, 라이는 슬며시 시선을 로크에게로 돌렸다. 그런 라이의 모습에 사내는 실망했는지 또다시 걸쭉한 욕설을 내뱉었다.

“에잇, 겁쟁이 새끼들! 저런 것들이 좆 달고 태어났다고, 사내새끼 대접을 받고 있다니…….”

쩔그렁, 쩔그렁…….

사내는 바닥에 침을 찍 뱉더니, 쇠사슬을 질질 끌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마도 아침을 먹으러 가는 모양이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실내 공기가 훨씬 가벼워졌다.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 노예병은 어제 실력 테스트를 받았으니까, 아침 식사 후에는 여기를 떠날 거야.”

“그런데 실력 테스트를 받는다는 게 무슨 말이지?”

“너는 여기가 처음이라서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싸울 줄도 모르는 사람을 용병으로 받아들여 줄 리는 없잖아. 이곳 훈련소에서 싸우는 법을 가르친 다음, 테스트를 해서 일정수준 이상의 실력이 되어야 써준다는 말이야. 그런데 저 사람은 우리들 같은 신참이 아니라, 포로 출신 노예라구. 싸우는 데는 이미 도가 터있다는 말이지. 인상을 보아 하니 수십 명은 죽인 것 같은데……. 훈련소에서 더 이상 가르칠 것도 없는 사람을 여기에 그냥 놔둘 리 없잖아. 곧 자대에 배치해서 부려먹게 될 거라는 거지.”

“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라이에게 로크는 자신의 배를 슬슬 문지르며 말했다.

“배고프다. 우리 얼른 아침부터 먹으러 가자.”

아침 식사를 한 라이는 로크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돌아온 로크는 곧바로 낡은 갑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훈련이 시작된다고 하면서 말이다.

“너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 행정과에서 곧 사람이 나올 거야. 그 사람을 따라가서 용병단 입단 절차를 밟으면, 갑옷과 무기 같은 것도 지급해 줄 거야.”

“너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주 난감했을 거야. 정말 고마워.”

라이의 말에 로크는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정말이지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순진한 사람이었다.

“히히, 내가 너에게 뭘 해준 게 있다고 고마워 하냐?”

두 사람이 두런두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병사 한 명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포로 출신 노예라는 사람을 데려가 버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또 다른 병사 하나가 복도에 서서 사람들의 이름을 큰 목소리로 호명하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 동작 봐라! 빨리빨리 안 뛰어?”

그 와중에 이름을 불린 로크도 밖으로 뛰쳐나갔다. 갑옷을 입은 다른 훈련병들과 함께. 이름을 불린 것은 아니지만 라이는 문 앞까지 로크를 따라 나가 복도 밖을 바라봤다. 복도 앞쪽은 이미 수많은 신병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설마, 올란도가 나를 데리러 오는 것은 아니겠지?’

이때, 병사 한 명이 라이 옆을 지나쳐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병사는 당황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누구 찾으세요?”

“라이라는 사람 못 봤냐? 어제 들어왔을 텐데.”

“제가 라이인데요.”

라이의 대답에 병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라이의 아래위를 훑어봤다. 그러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말투로 물었다.

“허, 이거 참. 네가 정말 150골드짜리 라이 맞냐?”

병사의 말에 기분이 상한 라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제가 150골드인지는 모르겠지만, 라이인 것은 맞습니다.”

“이거야 원, 10골드만 줘도 충분할 것 같은데 대체 윗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 병사는 라이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를 따라와라.”

“예.”

붉은 전갈 용병단의 규모는 거의 5천에 달했다. 5천 명이라면 정규군으로 쳐도 여단 급에 해당될 정도로 거대한 규모다. 한낱 용병단이 이렇게 커다란 규모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지정학적인 영향이 컸다.

붉은 전갈 용병단이 자리 잡은 곳은 알카사스 제국의 서쪽 경계선으로, 광활한 사막지대였다. 그리고 이곳은 서쪽 대륙과의 무역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엄청난 양의 무역품들이 오가는 만큼 그것을 노리는 도적떼가 항시 출몰했기에 용병에 대한 수요가 넘쳤다. 그리고 사막을 주 무대로 하는 몬스터들도 득실거렸다. 그야말로 용병단이 성장하는데 있어서는 최적의 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이 일대에 둥지를 틀고 있는 용병단들 중에는 붉은 전갈 용병단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는 용병단이 한둘이 아니었다. 전갈성에는 용병단만이 거주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용병들의 월급은 꽤나 후한 편이다. 그런 만큼 그들의 돈을 노리는 장사치들 또한 득실거릴 수밖에 없었다.

술집이나 매춘부처럼 용병 개개인의 주머니를 털어먹으려는 것들부터 시작해서, 용병단에 각종 물품을 대주는 장사치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전갈성의 거리로 엄청난 사람들이 왁작거리며 오고가는 것을 본 라이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길 잃어버리지 않게, 잘 따라와.”

대부분의 용병단에서는 신입 지원자에 한해 단 한 번 기초적인 보급품을 지급해 준다. 돈이 없어서 갑옷이나 무기 따위를 갖추지 못한 신병이 맨주먹으로 싸우게 할 수는 없기에 취해진 조치였다. 물론, 자신의 장비를 갖추고 있는 용병에게까지 보급품을 지급해 주지는 않는다.

병사가 라이를 데리고 간 곳은 커다란 보급창고였다. 창고 앞에는 작은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고, 꽤 깐깐해 보이는 사내가 앉아 있었다. 병사는 그 사내에게 뭐라고 말을 하더니, 무슨 서류인가에 서명을 했다.

그런 다음 라이에게 돌아서서 손짓했다.

“이쪽으로 와.”

병사가 창고 문을 열자, 곰팡이 썩는 것 같은 쾌쾌한 냄새가 안에서 풍겨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서, 너한테 필요한 걸 골라서 가지고 나와라.”

“이 안에 있는 건 아무거나 다 골라도 되는 겁니까?”

“물론이지. 앞으로 네가 쭉 쓸 장비들이니까 잘 골라보도록 해라.”

창고 안으로 들어간 라이는 왜 병사가 따라 들어오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공기가 너무 안 좋았던 것이다. 창고 안은 나름대로 정리가 되어있기는 했다. 정리라는 게 갑옷은 갑옷대로, 투구는 투구대로, 온갖 장비들이 종류별로 수북이 쌓아놓은 것 정도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장비들은 거의 다 낡은데다가 손질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자신이 오랫동안 써야 할 물건들인 만큼, 라이는 장비들을 고르는데 꽤나 정성을 들였다. 하지만 창고 안쪽 깊숙이까지 뒤져봐도 좋은 물건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공기도 잘 통하지 않는 곳에서 무거운 장비들을 뒤적이다 보니, 어느새 온 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올랐다.

‘하기야, 노예한테 좋은 것을 줄 리가 없지. 젠장, 괜히 뒤진다고 힘만 썼네.’

라이는 상태가 괜찮은 게 있는지 찾는 것을 포기했다. 이리저리 뒤져보니, 모두들 상태는 거기서 거기인 상황. 그래서 대충 자신의 몸에 맞을만한 것들만 끄집어내는 것으로 만족했다.

방어구의 선택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이 적당히 타협할 수밖에 없었지만, 무기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라이는 세심하게 무기들을 살펴봤다. 각종 도검들부터 시작해서 도끼, 창, 철퇴 등등…….

라이는 그 무기들 중에서 검 종류를 세심히 살펴봤다. 자신이 할 줄 아는 것은 검술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선뜻 고르기가 힘들었다. 워낙에 상태가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갑옷이라면 몰라도 무기까지 이 모양이라면 도저히 싸울 수가 없기에, 라이는 일단 창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병사에게 물었다.

“이곳에 있는 거 말고, 다른 무기는 없습니까?”

“용병단에서 무상으로 지급해 주는 무기는 이곳에 있는 게 다야. 좀더 고급품을 가지고 싶다면 네 돈으로 대장간에 가서 구입해라.”

결국 이곳의 무기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말이었다. 라이는 지금 땡전 한 푼 없는 빈털터리였으니까.

“저, 한 가지 질문드릴 게 있는데요. 우리들이 싸워야 하는 대상은 누굽니까? 산적인가요? 아니면…….”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은 몬스터들이지.”

몬스터가 상대라면 길고 날렵한 장검보다는, 짧지만 두꺼운 브로드 소드(Broad Sword)와 같은 무기가 유리하다. 몬스터가 휘두르는 두꺼운 몽둥이를 얇은 장검으로 막았다가는 바로 두 토막이 나버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묵직한 도검은 한 자루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들보다 좀 더 무겁고 두꺼운 검이나 도는 없습니까?”

병사는 기다리기 지겹다는 듯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좀 전에도 말했다시피 그런 건 대장간에 가서 직접 구입해. 모두들 그런 무기를 원하는데, 이런 데서 신병들에게 무상으로 지급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냐. 뭐, 저런 싸구려 검들이야 전투를 한 번만 해도 거의 폐품이 되어 버리지만, 중검(重劍)은 그렇지 않거든.”

“아,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국 라이가 선택한 무기는 한손으로 휘두를 수 있는 도끼였다. 날은 뭉툭하기 짝이 없어 이걸 가지고 과연 장작이나 제대로 팰 수 있을까 싶긴 했지만, 날의 폭이 넓은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뭉툭한 날의 공격력을 보완해 주는 것은 도끼날 반대편의 뾰족한 부분이었다. 날 부분으로 몬스터의 공격을 막고, 그 반대편의 뾰족한 걸로 찍어버린다면 충분히 사냥이 가능하리라.

예전에 아버지로부터 중장보병(重裝步兵)들 중에는 도끼를 주무기로 쓰는 사람들이 꽤 많다며, 그런 적을 상대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거꾸로 적용해 본다면, 그런대로 쓸 만할 것 같았다. 그러다가 운이 좋아, 나중에 중검이라도 한 자루 획득하면 더욱 좋은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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