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급품을 다 고르자, 병사는 라이를 훈련소로 데리고 갔다.
“따라 들어와라.”
교관들의 사무실로 라이를 데리고 간 병사는, 교관들 중 한 명에게로 라이를 안내했다.
“루베르크 교관님, 이번에 실력 테스트를 받아야 할 신병을 데리고 왔습니다.”
병사의 말에 라이를 힐끔 쳐다본 루베르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설마, 이런 뼈다귀가 150골드짜리야?”
훈련소 교관들은 150골드씩이나 되는 돈을 주고 사오는 노예가 있다는 소문에 모두들 경악했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놈이기에, 그렇게 엄청난 거금을 주고 사온다는 말인가.
‘포로로 잡힌 전쟁 영웅쯤이라도 되나?’
놈의 출신성분이야 어찌되었건, 코앞에 닥친 문제는 누가 그놈의 실력을 평가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만약 놈의 성격이 잔인하고 거칠다면, 평가에 임하는 교관은 목숨을 걸어야 하리라. 당연히 교관들 모두가 하기 싫다며 뒤로 내빼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차에 어젯밤에 올란도가 술 한 병을 들고 갑자기 찾아와, 자신보고 평가를 해달라며 정중하게 부탁을 해왔다. 물론 루베르크는 그것을 부탁이 아닌, 협박으로 받아들였지만.
라이의 삐쩍 마른 모습을 본 루베르크는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미친놈! 이래서 실력이 좀 떨어지더라도, 평가를 좋게 내려달라고 내게 협박을 한 거였군. 허, 이런 놈이 무슨 150골드짜리야. 아마 최소한 130골드 이상은 삥땅을 쳤겠지. 그래놓고 그게 뽀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좋은 평가를 내려달라며 내게 협박을 해? 젠장! 나중에 들통 나면 나까지 골로 가는 거 아냐?’
순간 루베르크는 갈등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단장에게 달려가 발정난 여우새끼의 비리를 고자질하느냐, 아니면 녀석의 협박에 넘어가 주느냐. 한참을 고민하던 루베르크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발정난 여우에게 협조하기로.
녀석의 성격상 130골드를 혼자 처먹을 리 없는데다가, 왠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단장이 여우놈을 꽤나 총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고자질을 했다가 단장이 놈을 징죄하지 않고 그냥 봐주고 끝낸다면, 되려 여우놈에게 자신만 박살날 게 아니겠는가. 그놈이 얼마나 뒤끝이 더러운 놈인데…….
루베르크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젠장, 어쩔 수 없지.”
루베르크는 병사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손을 흔들었다.
“너는 돌아가 봐.”
하지만 병사는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루베르크에게 우물쭈물 말했다.
“실력 테스트가 끝난 다음, 데리고 오라는 행정관님의 명령이 있어서…….”
“그럼 나중에 일과 끝난 다음에 데리러 와.”
“옛, 교관님.”
루베르크가 병사를 돌려보낸 것은 완전범죄를 위해서였다. 만약 라이의 진짜 실력을 병사가 봐버리면, 자신이 엉터리 평가서를 쓴 게 곧바로 들통이 날 게 아니겠는가. 그놈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소문이라도 퍼뜨리는 날에는 자신은 끝장이었다.
병사를 돌려보낸 후, 뒤로 돌아서는 그의 시선에 라이가 들고 있는 녹슨 도끼가 보였다.
“호~, 도끼를 들고 있군. 잘 쓰냐?”
“아뇨. 처음입니다.”
라이의 대답에 루베르크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뭐야? 도끼도 다룰 줄 모르는 녀석이, 무기로 도끼를 택했다는 말이냐?”
“예, 저희들이 주로 상대해야 하는 것은 몬스터라면서요? 그렇다면 얄팍한 장검보다는, 도끼가 훨씬 더 좋을 거 같아서 선택했을 뿐입니다.”
그 말에 루베르크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호오, 그런 이유로 도끼를 선택하는 놈이 있을 줄이야……. 뭐, 어쨌건 그건 네가 알아서 할 문제니까.”
중얼거리던 루베르크는 사무실 벽면에 걸려있는 무기들 중에서 방패와 도끼를 꺼냈다. 물론 라이가 들고 있는 것들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고급품들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따라오너라.”
루베르크는 일단 훈련장으로 나갔다. 그 뒤를 졸졸 따라가는 라이. 훈련장에는 많은 신병들이 훈련을 받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아침이라 서늘했지만, 얼마나 빡세게 훈련을 받는지 그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루베르크는 훈련장 한쪽 구석으로 간 뒤 왼손에 든 방패로 몸을 가리고, 오른손에 든 도끼로 자세를 잡으며 라이에게 말했다.
“한번 공격을 해 보거라.”
“예.”
쉭!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라이의 도끼가 허공을 갈랐다.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일격이었다. 검과 도끼는 엄연히 다른 무기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끼로 싸우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아직 손에 익지 않아서 힘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방패의 경우는 꽤 오랫동안 다루는 기법들을 익혀온 상태였다. 그렇기에 공격은 조금 어설펐지만, 루베르크의 공격은 수월찮게 막아내는 라이였다.
그런데 문제는 라이의 몸이 아직 완벽하게 회복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얼마 싸우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얇고 가벼운 검도 아니고, 묵직한 전투도끼를 들고 설치다 보니 체력 소모가 훨씬 컸던 것이다.
루베르크는 라이가 도끼 말고 다른 무기를 다루는 법을 오랜 세월 수련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 챘다. 도끼 공격은 어설펐지만, 방패를 다루는 기술은 대단히 뛰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놈을 구입하는데 150골드씩이나 줬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다만 여우놈이 삥땅쳤을 거로 예상되는 액수가 조금 줄어들었을 뿐이다.
“흠, 확실히 도끼를 다루는 게 어설프긴 하군. 도끼를 다룰 줄 모른다고 했으니, 내가 도끼술 하나를 가르쳐 주마. 루톤식 도살법(屠殺法)이라고 하는 건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기본적인 도끼술들 중 하나지. 기본기이긴 하지만, 이것만 잘 익혀둬도 큰 도움이 될게다.”
예정에도 없던 도끼술을 가르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어제 저녁 여우놈에게 좋은 술 한 병을 얻어먹었다는 죄 때문이었다. 이걸 꼬투리로 녀석에게 술 한 잔을 더 얻어먹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행정과에서 나온 병사 녀석을 내쫓아버렸으니, 녀석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때울 필요도 있었다.
루톤식 도살법은 기본적인 도끼술인 만큼, 아주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공격과 방어 기법만을 다루고 있었다. 물론 초식의 숫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 루베르크는 루톤식 도살법의 자세들을 라이 앞에서 천천히 시연해서 보여줬다. 방패로 적의 공격을 막고, 그와 동시에 도끼로 적을 찍어버리는 게 동작의 핵심이었다.
루베르크는 루톤식 도살법의 초식들을 2번에 걸쳐 천천히 시연해서 보여준 후, 라이에게 물었다.
“기억하겠냐?”
“어느 정도는…….”
“한번 해봐라. 틀린 점이 있다면 내가 교정해 주겠다.”
처음 배우는 도끼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의 동작은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아버지로부터 검술을 익혀왔던 그였기에, 도끼술에 대한 적응 또한 빨랐던 것이다.
대충이나마 초식을 외웠다고 판단한 루베르크는 대련을 통해 그 초식들이 어떤 방식으로 실전에 응용되는지를 가르쳐주었다. 처음에는 시간이나 대충 때운다는 생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지만, 라이가 무서운 속도로 배워나가자 그는 가르치는 재미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다. 배우는 사람이 잘하면, 가르치는 사람 역시 신이 나는 법이니까.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빨리 흘러갔다. 가르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루베르크는 라이를 대기대 식당으로 보내지 않고, 간부 식당으로 데리고 가 영양가 있는 음식들로 듬뿍 먹였다.
식사가 끝난 후 곧바로 교육이 이어졌다. 식후 바로 대련을 하기는 힘들었기에, 잠시 동안은 이론수업을 했다. 그런 다음 이어진 대련. 시간이 흐를수록 라이의 어설펐던 도끼술은 급속도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겨우 반나절을 배웠을 뿐인데, 이 정도까지 적응을 해내다니! 루베르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루베르크는 훈련을 중단했다. 그리고 사무실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봉투 하나를 라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행정관님을 뵈면 이걸 전하도록 해라.”
“예.”
“그리고 이건 네 용병패다.”
루베르크가 라이에게 내민 것은 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용병패였다. 용병패 앞쪽에는 붉은 전갈이 새겨져 있었고, 그 뒤쪽에는 6급이라고 써져 있었다. 처음 입단한 햇병아리가 곧바로 6급 용병패를 받았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지만, 라이는 용병패를 힐끗 쳐다본 후 그냥 주머니 속에 쑤셔 넣어버렸다. 6급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감흥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6급 용병패를 주머니 안에 쑤셔 넣는 라이의 모습을 보며 루베르크는 오해했다. 자신에게 겨우 6급밖에 주지 않았다며 라이가 서운해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급히 덧붙였다.
“당분간은 체력을 기르는데 최선을 다하도록 해라. 체력만 받쳐준다면 네 재능으로 4급으로의 승급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게다. 알겠냐?”
“예.”
이번에도 심드렁한 표정이다. 그렇기에 루베르크는 좀 더 인심을 쓰기로 했다.
“혹시 뭐라도 좀 더 배우고 싶은 생각이 들면 언제든 나를 찾아오너라. 용병의 몸값은 실력이 좌우한다. 어느 정도 배웠다고 자만하거나 게으름 피우지 말고, 기회가 되는 대로 최대한 배우고 익히도록 해라. 알겠냐?”
“예, 교관님.”
해가 질 때쯤 와서 기다리고 있던 병사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행정관님과의 약속시간이 다 되어서 말입니다.”
“데리고 가라.”
“예, 교관님. 수고하셨습니다.”
병사와 함께 점차 멀어지는 라이의 뒷모습을 보며, 루베르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6급 용병패를 줬는데도 전혀 기뻐하지 않다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는 놈이군. 어쨌건 대단한 놈이야. 정말 재능을 타고났다고 할 수밖에는…….’
여기까지 생각하던 루베르크는 아차 싶었다.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이다. 라이의 몸값이 150골드였다는 것을. 그렇다. 단장이 150골드씩이나 되는 거금을 주며 그를 구입해 온 것은, 현재의 실력이 아니라 장래성을 본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젯밤에 올란도가 보여준 행동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평가를 후하게 내려달라며 좋은 술 한 병을 뇌물로 건네준 것도 모자라, 그렇게 협박까지 퍼부어댔으니 말이다.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는 놈이군.”
교관실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루베르크. 하지만 그의 걸음은 얼마 가지도 않아 딱 멈췄다. 여우놈이 왜 그런 짓을 한 것인지, 그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개새끼! 내가 그런 인재도 몰라볼 정도로 멍충이라고 생각했다는 거잖아. 지가 아쉬울 때는 친구친구 하며 알랑거리더니, 속으로는 날 그렇게 깔보고 있었어? 어디 두고 보자! 뿌드드득!”
올란도가 왜 자신에게 술을 가져다가 바치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알지 못했던 루베르크였기에 이렇게 오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