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스가 중대장실에서 돌아왔을 때, 라이는 침상에 앉아 갑옷에 기름을 먹이고 있었다.
“뭐하고 있냐?”
“갑옷에 기름 먹이는 중인데요.”
하리스는 라이의 갑옷을 뺏어들고 대충 살펴보더니, 다시금 라이에게 던져준 뒤 말했다.
“시간 낭비하지 마라. 그런 쓰레기에다 기름을 먹여봐야 어디에다가 쓰겠냐. 이미 수명이 다한 갑옷이야.”
“그래도 갑옷이라고는 이거 밖에 없는데 어쩝니까. 이렇게라도 해서 써야지.”
“네 두세 달 월급을 모아서 중고품을 구입하도록 해. 아무리 싸구려라고 해도 저것보다는 백배 나을 테니까.”
그 말에 라이는 답답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럴 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어요. 행정관님한테 얘기 들었는데, 월급은 직접 주는 게 아니라, 통장에 입금된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니까 그 통장에 입금된 돈으로 사라는 거잖아.”
“아, 정말. 행정관님께서 말씀하시길, 돈은 나중에 제대할 때가 돼야 찾을 수 있다고…….”
이런 식의 동문서답이 계속되자, 하리스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라이에게 물었다.
“너 은행에 한 번도 가본 적 없지?”
“예. 아직까지 한 번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라이. 하리스는 한심하다는 듯 라이의 뒤통수를 내리치며 말했다.
탁!
“에라이! 그게 자랑이냐?”
“제가 언제 자랑했다고 그래요. 지금껏 묻는 말에 성실히 대답했잖아요.”
“에이, 빌어먹을! 이런 촌놈한테 그따위로 설명을 해주다니. 잘 들어. 그 말은, 통장의 돈을 현금으로 빼서, 현찰로 들고 다닐 수 없다는 말이야. 대신, 이곳 성내에 있는 모든 상점에서는 물건을 살 때 통장만 들이밀면 알아서 그 안에 들어있는 돈을 빼간다고.”
그 말에 라이는 황급히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통장을 꺼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단순한 종이뭉치인데, 그 속에 돈이 들어갈 수도 있고, 또 그 돈을 빼내는 재주가 있다니. 정말 놀랄 노자였다.
“와, 신기하네. 어떻게 이 안에 들어있는 돈을 빼갈 수 있지?”
옆에서 듣고 있던 하리스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라이의 뒤통수를 다시 한번 쥐어박았다.
딱!
그리고는 속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쿵쿵 치며 말했다.
“이런 무식한 새끼! 말이 그렇다는 말이야. 그 속에 돈이 어떻게 들어가 있겠냐? 돈은 은행이라는 곳에 있지. 대신 여기에는 은행에 보관되어 있는 네 돈의 액수가 기록된다는 말이야. 상점에서 네가 물건을 구입한 다음에 통장을 내밀면 물건 값만큼을 통장에 기록된 금액에서 제외한 다음, 그만큼의 금액을 은행에서 찾아가는 거야. 이제 이해가 가냐?”
하리스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야 라이는 월급을 어떻게 빼서 쓰는지 그 방법을 알 수 있었다.
“나중에 네 월급이 좀 모이게 되면 갑옷부터 사러 같이 가자. 그놈의 통장을 어떻게 쓰는 건지 내가 직접 가르쳐 주지. 가만히 보니 너 혼자 갔다가는 바가지를 왕창 뒤집어쓸 게 뻔하니 말이야.”
“그렇게 해주시면 저야 고맙죠.”
두 사람이 통장을 사이에 두고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중대장실이 있는 방향에서 올란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대장들 집합!”
“이런 젠장, 또 무슨 일이야?”
라이가 고개를 들어 보니, 불만 가득한 어조로 투덜거리며 중대장실로 걸어가는 라이언 소대장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설마 또 출동하라는 것은 아니겠지?”
“이런 젠장,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게 며칠 전인데, 또야?”
“윗사람들이 우리를 그냥 놀려 둘 리가 있겠냐? 놀고 있는 놈들에게 돈 줘야지, 밥 줘야지……. 배가 아플 수밖에 없겠지.”
짜증스런 어조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소대원들의 말대로라면 출동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출동 명령이 떨어질 거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들의 예상대로 출동을 나가는 것일까? 그 해답은 곧이어 밝혀졌다.
라이언 소대장이 거칠게 문을 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들 출동 준비해라. 새로운 임무가 떨어졌다.”
“예? 무슨 임무인데 그러십니까?”
그러자 딴 쪽에서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돌아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출동이야.”
“야야, 바트. 그 주둥이 닥치지 못해!”
연신 투덜거리는 바트라는 사내에게 인상을 왈칵 일그러트리며 매섭게 쏘아붙인 라이언 소대장은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이번에는 상단 호위 임무다. 예정기한은 약 1개월! 성공 수당은 월급의 100%다. 20분 내로 출발할 예정이니, 알아서 짐들 챙기도록! 알겠나?”
“옛!”
아침이 되어 해가 뜨면 더욱 이동하기 힘든 게 사막이다. 그렇기에 이 한밤중에 바로 출발하는 모양이다. 지금 출발하면 최소한 덥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성공 수당을 퍼센트 단위로 발표하는 이유는, 각 용병들마다 월급의 액수가 틀렸기 때문이다. 즉, 성공수당이 100%라면, 월급 1골드 받는 자는 1골드를, 2골드 받는 자는 2골드를 추가로 받게 된다는 말이었다. 물론, 임무 수행에 실패했을 때는 땡전 한 푼 받지 못하고 말이다.
출동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게 짐을 싸고 있는 동료들을 부러운 듯 바라보는 하리스. 여기에 남게 된다는 것은 곧 이번 수당을 날리게 된다는 것과 똑같은 의미였다.
“젠장,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이 중대한 시점에 이런 꼬맹이한테 발목이 잡히다니…….”
투덜거리던 하리스는 라이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신경질적인 어조로 외쳤다.
“뭘봐, 새꺄!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빨리 자. 내일 아침부터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될 만큼 박박 굴려줄 테니까.”
“예.”
동료들과 같이 출동할 수 없다는 답답함에 괜히 라이에게 신경질을 내는 하리스였다.
크라레스의 속셈?
“루겔 다란스?”
“예. 그 녀석도 포함시켰으면 합니다.”
교관의 말에, 상급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녀석은 그동안 배운 검술조차 제대로 구사하지도 못하는데……?”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는, 검술을 얼마나 완벽하게 익혔느냐가 아니라 검술에 대한 이해도입니다. 루겔 다란스는 검술을 숙달시킬 시간이 부족해서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것일 뿐, 검술에 대한 이해도는 여기에 있는 아이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허, 참. 정말 이해를 못하겠군. 자네 말대로 그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면 왜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못한 거지?”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코린트에서 2년 동안 지낸 게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을 겁니다. 아마, 그 때문에 기사학부 입학시험에 탈락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코린트에 감으로 인해서 잃어버리게 된 세월을 검법만 새롭게 익힌다고 해서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코린트에서 검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몰라도, 배웠다면 미묘한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
상대편 기사와 조금만 검을 섞어 봐도 상대가 어느 나라에서 어떤 검술을 배웠는지를 파악하는 게 가능한 이유는, 그만큼 나라마다 각기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검을 쥐는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미세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스텝을 밟는 간격이나 공격하는 타이밍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사소한 차이점들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다른 나라에서 검술을 배워오게 되면, 거기에서 무심결에 몸에 배여 온 자세를 교정하는 것만으로도 족히 몇 년이 필요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코린트 쪽에서는 권장되는 자세가, 크라레스 쪽에서는 고쳐야 되는 나쁜 자세인 경우까지 있었다.
사실, 이것도 다 실전검술로 따진다면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는 문제겠지만, 학교 수업이라는, 실전과는 거리가 먼 우물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보니 한번 그곳의 선생들에게 눈 밖에 나게 되면 두고두고 고생을 하게 되는 것은 뻔한 사실이다.
“흠, 자네가 그렇게까지 추천하는 것을 보면 재능이 있긴 있는 모양이군. 그런데 신분 조회는 의뢰했나? 코린트에 가있었다고 하니 조금 미심쩍어서 말일세.”
그러자 교관은 곧바로 대답했다.
“이미 정보부에 다란스의 신분 의뢰를 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없다는 답장을 얼마 전에 받았고 말입니다.”
부하의 꼼꼼한 일처리가 마음에 든 듯 흐뭇한 표정을 짓던 상급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겨우 아카데미에 특례 입학시키는 것 정도 가지고, 다른 나라의 정보부가 관심을 가질리는 없겠지. 알겠네. 자네의 말대로 그녀석의 이름도 승급자 명단에 포함시키도록 하지.”
하지만 이들은 모르고 있었다. 위쪽에서 원하는 것은 ‘재능’이었을 뿐, 이 아이들을 어떻게 써먹겠다는 것에 대해서는 하달된 바가 없었다. 그들도 여기에서 뽑힌 애들이 아카데미 기사학부에 특례입학 된다는 정도밖에는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곳 아카데미에 가서 조금만 더 ‘재능’이라는 것을 드러내게 되면, 그 다음 과정부터는 그들을 가르치게 되는 교관들이 크라레스의 정규 기사들이 된다는 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만약 그 정보가 조금이라도 새나갔다면 크라레스의 상층부에서는 난리가 났으리라. 기사들을 투입해서 테스트를 한다는 말은 곧 ‘오러(氣)’의 수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정규 기사들만이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