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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토리오 산맥에 거주하고 있는 드워프 마을들에는 영구적인 공간이동 마법진이 구축되어 있었다. 그랜딜이 엘프들을 이끌고 건설해 놓은 것이다. 영구적인 공간이동 마법진의 경우 처음에 구축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구축만 해놓으면 이것만큼 편리한 게 없었다. 이로서, 드워프 마을들은 각기 생산한 방대한 물품들을 효과적으로 공유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모든 드워프 마을의 촌장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도, 다 이 공간이동 마법진의 덕분이었다. 물론, 그게 드워프 마을에 득이 되지만은 않았지만 말이다.
“엘프들이 거주할 마을 3개를 더 건설해 주십시오. 규모는 예전과 동일하게 말입니다.”
“지금까지 건설한 마을의 숫자만 해도 벌써 20개가 넘는데, 또 3개를 건설해 달라는 말이오?”
불만 가득한 항의가 날아왔지만, 그랜딜은 무덤덤한 어조로 대꾸했다.
“하기 싫다면 나한테 뭐라 하지 말고, 주인님께 직접 따지는 게 좋겠군요. 지금 당장 주인님께 말씀드릴까요?”
그러자 격렬하게 항의하던 촌장의 안색이 핼쑥하게 질렸다. 그는 자신이 언제 항의했냐는 듯 다급하게 변명했다.
“그, 그런 뜻은 아니었소.”
순식간에 꼬리를 마는 드워프 촌장을 살짝 째려본 그랜딜은 다시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또 누구 이의가 있으신 분 안계십니까?”
“…….”
상대는 드래곤이다. 이미 착취당하는 데 이골이 난 드워프들인지라, 이의가 있을 턱이 없었다. 이의를 제기해 봐야 돌아오는 것은 처참한 죽음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마을 건설에 따른 인원 동원에 대해서는 촌장님들끼리 협의하여 결정하시도록 하십시오.”
“그 외에 더 지시하신 사항은 없소?”
“예, 없으십니다.”
그 말에 드워프 촌장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나마 다행이군. 또, 보석 같은 걸 더 내놓으라고 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귀금속 종류야 이쪽에서 아무리 노력한다고 쑴풍쑴풍 쏟아지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다. 그랜딜은 이런 식으로 드워프들을 쥐어짜고 있는 중이었다. 모든 것은 ‘주인님께서 원하신다.’는 한 마디로 끝이었다. 예전에는 1년에 1개씩 가져다 바치던 예술품의 숫자가 1달에 1개로 늘어나 있었고, 그 외에 다른 귀중품들도 따로 바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드워프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바친 엄청난 양의 재물들이 드래곤에게로 가지 않고, 엘프들의 새로운 왕국을 건국하는 데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버 드래곤의 심술
출동한 지 2개월 하고도 8일째가 되었을 때, 올란도가 거느린 중대원들이 전갈성으로 복귀했다. 처음 출동할 때만 해도 약 1개월 정도 걸릴 거라 예상했었지만, 도중에 새로운 임무가 하달되는 바람에 이렇게 늦어지게 된 것이다.
2개월간 야외 생활을 한 다음이라, 모두들 후줄그레한 모습들이다. 짐을 줄이느라 옷가지도 거의 가져가지 않은 탓에, 그들의 몸에서는 노린내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중대원들은 도착하자마자 지금껏 입었던 냄새나는 옷들을 모아 작은 보따리를 만들었다. 곧이어 세탁소에서 일하는 노예들이 와서 그 보따리들을 가지고 갔다.
도착하자마자 침대로 파고 들어가 늘어지게 잠에 빠진 사람은 겨우 한 명. ‘새침데기’ 모라이어스라고 불리는 미남자 한명 뿐이었다. 그 외에 나머지는 부랴부랴 옷장에서 새 옷을 꺼내 멋지게 차려입으며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이야, 뺀질이! 이제 너하고 하는 훈련도 끝이다. 룰루, 내 3골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하리스를 향해 라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모두 어디로 가려고 저러는 거죠?”
“뻔하잖아. 술 마시러 가는 거지. 임무 수행 중일 때는 술이라고는 거의 마시지 못하니까 말이야…….”
그러면서 하리스는 한쪽 손의 엄지와 검지로 작은 원을 만든 다음, 다른 손의 검지손가락으로 그 원 안을 슉슉 쑤시면서 음흉스런 어조로 말을 이었다.
“흐흐, 그리고 오랜만에 이 짓도 해야 할 테고.”
예전에는 저 행동이 뭘 뜻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올란도를 만난 후 그게 뭐를 뜻하는지 알게 된 라이다.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라이. 그 표정을 보며 하리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뒤 이죽거렸다.
“허엇? 뺀질이! 겨우 이 정도 가지고 얼굴이 새빨개지다니, 너 혹시 숫총각이냐?”
“누, 누가 숫총각이라고 그래요?”
그러자 하리스는 무척 안타깝다는 듯 혀까지 차며 계속 이죽거렸다.
“쯧쯧, 척 보면 내가 다 안다. 설마 그 나이가 될 때까지 여자와 섹스 한번 못해본 못난이가 존재할 줄이야. 더군다나 그런 놈이 내 밑으로 기어들어오게 될 줄은 내 상상도 못했다.”
라이는 창피함에 시뻘게진 얼굴로 황급히 화제를 돌리려 애를 썼다.
“뭐, 어쩌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그건 그렇고, 용병이라고 하지만 여기도 엄연히 군기(軍紀)가 살아있는 군대잖아요? 그런데 저렇게 마음대로 술 마시러 다녀도 괜찮은 거예요? 더군다나 여자와 잠까지 자고…….”
“어허, 이놈 은근슬쩍 말 돌리는 거 보게. 아주 능구렁이가 따로 없구먼. 누가 뺀질이 아니랄까 봐서……. 딴 놈들 신경 쓰지 말고, 네 녀석 얘기나 해보자. 너 여자한테 관심이 없는 거냐?”
“…….”
“설마 고자였던 거야?”
“누, 누가 고자라는 겁니까?”
발칵 성을 내는 라이의 양쪽 볼을 붙잡아 쭈욱 잡아 늘이며 하리스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에구, 귀여워라. 이런 숫총각이 내 직속 쫄따구로 들어올 줄이야. 좋아, 기분이다. 이번에 수당으로 3골드 받으면 네 총각 딱지를 떼게 해주마. 흐흐, 짜식. 넌 이런 마음씨 좋은 선배를 모시게 된 걸 행운이라고 생각해야 돼.”
“그,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얼굴이 새빨개져서 당황해 하는 라이가 귀여운지 계속 짓궂은 장난을 치던 하리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씻으러 나갔던 라이언 소대장이 얼굴을 닦으며 막사로 들어오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는 곧장 라이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지금 외출하실 겁니까?”
“응. 그런데 왜?”
“외출하기에 앞서 저 녀석 실력 테스트부터 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자 무슨 소리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는 라이언.
“뭔 테스트?”
“어허, 이거 왜 이러십니까? 저 녀석이 5급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테스트부터 해보셔야죠. 그래야 제 수당 3골드를…….”
그제서야 라이언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2개월 동안 벼르고 있었던 말을 후련하게 토해냈다. 뒤끝이 강한 중대장 밑에서 구르다 보니, 그 또한 한 뒤끝 하는 성격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봐, 상대를 잘못 골랐어. 아무 권한도 없는 나한테 테스트 받아봐야 뭐하겠나? 그런 거라면 중대장님에게로 가야지. 안 그래?”
라이언의 대꾸에 하리스는 몸이 후끈 달아 소리쳤다.
“정말 유치하게 이러시깁니까!”
라이언은 열 받은 하리스의 모습에 비릿하게 웃으며 이죽거렸다. 마치 십년 묵은 체증이 쑤욱 내려가 개운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못 믿겠다며? 그러니 믿음이 가는 중대장님에게 가서 테스트를 받아야지. 뭐, 중대장님이 오늘 시간을 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킥킥.”
그제서야 하리스는 라이언이 예전 일로 앙심을 품고 일부러 테스트를 안 해주는 것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그때 그 일을 아직까지 꽁하니 마음에 품고 있었단 말이지? 이런 썩을 새끼!’
“이, 이보십쇼, 소대장님. 그러지 마시고…….”
“아, 난 몰라, 몰라.”
라이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잽싸게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런 망할! 덩치는 곰처럼 커다란 놈이, 어째 속은 저렇게 밴댕이처럼 좁으냐. 젠장, 어쩔 수 없지. 이봐, 중대장님 어디 계시지?”
“아마 중대장실에 계실 걸.”
그 말을 듣자마자 하리스는 쏜살같이 중대장실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