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6화 (742/930)

라이를 이끌고 숲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던 하리스는 수풀 사이로 뚫고 들어오는 햇빛의 각도를 가늠해 보더니, 라이에게 말했다.

“뺀질이, 오늘 수색은 이 정도에서 종료한다. 돌아가자.”

“예? 아직 훤한데 더 찾지 않고요?”

예전에 사막에서 자신을 고생시켰던 때의 그 악몽까지 겹쳐져, 라이로서는 올란도가 유능한 지휘관으로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부하들을 식사도 제대로 시키지 않고 숲 속으로 내몬 것을 보면, 성공을 위해서라면 부하들의 희생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지독한 지휘관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들은 노예병사들이 아닌가. 그런 만큼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가면 올란도가 신경질을 내며 문책이라도 가해오지 않을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라이가 이런 말을 꺼낸 이유를 몰랐던 하리스는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들려줬다.

“내가 계속 뺀질이 뺀질이 라고 부르니까 성실한 척 하는 모양인데, 그런다고 내가 속을 거 같냐? 자, 잘 봐라. 지금은 그래도 주위가 꽤 밝지만, 2시간 내로 해가 질 거다. 햇빛 한 점 없는 숲 속에서 오크와 만난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어.”

“나무 위에 숨어있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지금 돌아가 봐야 좋은 소리 듣기 힘들 거 같은데…….”

하리스는 별 헛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대꾸했다.

“크크, 나무 위라고 해서, 우리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는 못해. 놈들이 사람보다 나무를 더 잘 탄다는 말도 들었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평상시 하던 대로 해. 나는 지금껏 용병 생활하면서 너처럼 재주껏 뺀질거리는 놈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내가 그런 것에 대해 뭐라 하지 않는 건, 목숨을 유지하는데 있어서는 그것도 꽤 훌륭한 기술이기 때문이야. 명심해. 그 무엇보다 우리들의 목숨이 최우선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공을 많이 세워봐야 뭐해? 죽으면 그만인데.”

“그건 그렇죠.”

꽤 깊은 숲 속까지 들어가서 뒤지고 다녔던 것 같은데, 라이의 예상과는 달리 그리 깊게까지는 들어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30분도 채 걷지 않았는데, 숲에서 빠져나온 것을 보면 말이다.

라이는 모르고 있었지만, 하리스는 라이를 이끌고 숲 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 않고, 마을 주변 언저리만을 빙빙 돌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라이를 보고 뺀질이라고 놀리는 하리스였지만, 사실 하리스는 라이보다 훨씬 더한 뺀질이인지도 모른다.

마을에 도착해 보니, 같이 출발했던 수색조 동료들은 이미 벌써 돌아와서 식사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하리스는 라이를 데리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식사는 소대 단위로 실시했다. 식사를 준비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음식을 나눠먹는 것까지 모두 다. 중대장이 먹을 식사는 각 소대가 교대로 준비하는 게 관례였다.

거친 사내들이 음식을 해서 먹는 것인 만큼, 맛 따위는 아예 따지지도 않았다. 소대원 전체가 먹을 수 있을 정도 크기의 솥단지 한 개에 물을 펄펄 끓인 다음, 구할 수 있는 모든 재료들을 왕창 집어넣고 푹푹 끓여 걸쭉한 스튜를 만들어서 빵과 함께 나눠먹는 게 다였다.

솥 옆에 놓여 있는 재료들을 바라본 하리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야. 왜 이것밖에 없어?”

“촌장 녀석에게 부탁해 봤는데, 자기들 먹을 것도 없다면서 닭 한 마리 내주지 않더라.”

기욘의 말에 하리스는 분개했다.

“뭐라고? 이런 개새끼!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숲 속을 박박 기는 게 누구 때문인데?”

“참아! 어쩔 수 없지. 주민들하고 분란을 일으켜 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잖아. 저쪽을 봐. 중대장 안색이 영 안 좋잖아. 촌장 늙은이가 얼마나 딱딱거려대는지, 중대장도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야.”

하리스는 재빨리 올란도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다음 라이에게 속삭였다.

“오늘 조심해. 괜히 중대장한테 걸려서, 시범 케이스로 작살나지 말고.”

“예.”

“그나저나 야외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은 처음이지? 잘 봐. 다음부터는 네가 해야 할 테니까.”

라이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중얼거렸다.

“요리는 잘 못하는데…….”

“허~, 이놈 시작도 하기 전에 뺀질거릴 궁리부터 하네. 잘 봐둬. 이 정도는 오크도 할 수 있는 거니까.”

솥의 물이 펄펄 끓기 시작하자 하리스는 옆에 쌓여 있던 재료들을 몽땅 다 한 번에 쓸어 넣어버렸다.

“허억, 그 그렇게 한꺼번에 때려 넣어도 되는 겁니까?”

“뭐가 어때서? 다들 이렇게 해.”

끓는 물에 재료가 적당히 풀어지자, 하리스는 곱게 빻은 곡물가루를 붓고는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그러자 멀건 물 같던 스튜가 얼마 지나지 않아 걸쭉해지기 시작했다.

“잘 저어줘야 해. 안 그러면 솥에 눌러 붙거든.”

대충 다 되었다고 생각될 무렵, 하리스는 소금을 넣고 간을 맞췄다.

“자, 식사준비 다 되었으니 모두들 이쪽으로 와!”

소대원들은 각자 가방을 뒤져 그릇과 숟가락, 그리고 커다란 빵을 한 덩어리씩 가지고 솥단지 가까이로 다가왔다.

“많이 있으니까 천천히들 먹으라구.”

그다지 맛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만족스러웠다. 안 그래도 숲 속을 뒤지고 다니느라 모두들 배가 고픈 상태였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형편없는 식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맛있게 식사를 했다.

커다란 빵을 스튜에 열심히 찍어먹고 있던 라이는 문득 깨달았다는 듯 하리스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모라이어스씨가 안보이네요.”

하리스는 숲 쪽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입안에 빵을 가득 물고 있어서인지 발음이 이상하긴 했지만, 알아듣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당연하지. 지금쯤 숲 속을 박박 기면서 오크 소굴을 찾고 있을 테니까.”

그 말에 라이는 어이가 없었다.

“예? 혼자서 말인가요?”

“혼자는…, 옆 소대의 아스탄도 그러고 있을 텐데 뭘.”

그게 뭔 큰일이냐는 식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하리스의 모습에 라이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재차 질문을 던졌다.

“겨우 둘이서 이 밤중에 숲 속을 뒤진다고요?”

“그래. 그 둘은 레인저 교육을 받았거든.”

“레인저요?”

라이가 레인저라는 말에 어리둥절해 하자, 하리스는 부지런히 빵을 스튜에 찍어먹으면서도 자세히 설명을 해줬다.

“너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레인저라는 것은 숲 속에서의 전투에 특화된 병과야.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적을 찾아내어 죽이는데 있어서, 그들을 따를 자가 없지. 그래서 오크 놈들 소굴을 찾는데 있어서, 그들만큼 적임자도 없다는 얘기야.”

“아,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스튜를 몇 숟가락 더 떠먹던 라이는 그제서야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그들이 그토록 오크 소굴을 잘 찾는다면, 왜 낮에 자신들이 숲 속을 헤매고 다녔던 것일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오늘 낮에 우리가 했던 수색 작업은 뭐예요?”

“뭐긴 뭐야. 그들이 좀 더 원활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오크들의 이목을 끄는 역할을 한 거지. 그럼 너는 중대장님이 우리를 숲 속으로 보낸 게, 우리보고 숲 속에서 오크 소굴을 찾아오라고 한 줄 알았냐?”

그제야 오늘 올란도가 행한 전체적인 작전이 머릿속에 그려진 라이였다.

“그럼 저희가 미끼였다는 건가요?”

“당연하지. 우리들끼리 숲 속에 들어가서 뭘 하라고? 아차하면 바로 저승행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뻔한 사실인데 말이야.”

“그건 그렇죠.”

잠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던 라이. 하지만 곧 그의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오크의 시력은 그리 좋은 게 아니다. 대신, 놈들은 후각이 뛰어났다. 따라서 제아무리 숲 속에 잘 숨어있어 봤자, 자신의 냄새를 숨기지 못한다면 곧바로 오크들에게 발각될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라이는 재빨리 물었다.

“그런데 오크들의 이목을 피해서, 숲 속을 뒤지는 게 가능하기는 해요? 그놈들이 냄새를 얼마나 잘 맡는데…….”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레인저들은 자신의 냄새를 숨기는 훈련도 받았을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새침데기 녀석은 벌써 죽었을 테니까. 녀석이 오크 소굴을 찾겠다고 숲 속으로 들어간 게 그동안 얼마나 되는데…….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야. 그런데 녀석은 아직도 살아 있잖아. 그 녀석, 용병대에서 몇 년이나 살았는지 알아?”

“모르겠는데요.”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아마 몇 년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라이는 생각했다. 모라이어스의 얼굴이 워낙에 동안(童顔)이라서, 자신보다 몇 살 많아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9년이 넘었어. 즉, 이제 제대할 때가 다 되어간단 말이지.”

그 말에 라이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나 오래 있었어요? 아무리 봐도 나하고 나이 차이도 몇 살 나지 않는 것 같던데……?”

“아, 난 또 뭐라고. 그 녀석은 엘프야. 그러니 어리게 보이는 거지.”

엘프라는 말에 라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엘프요? 그건 옛날 얘기에나 나오는 헛소리…….”

빵을 먹다말고 멍청한 표정으로 되묻는 라이의 모습에 하리스는 킥킥거리며 웃다가 대답해 주었다.

“이거 정말 미치겠네. 이건 완전히 시골 촌구석에서 올라온 멍텅구리 아냐? 잘 들어. 엘프는 이 세상에 엄연히 실존하는 종족이야. 그 녀석 얼굴을 보면 모르겠냐? 물론 순종은 아니고, 물이 조금 튄 정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엘프는 엘프지. 뭐, 녀석은 엘프의 엘자만 들어도 신경질을 팍팍 내긴 하지만 말이야.”

“아, 예…….”

모라이어스가 엘프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기에 지금껏 다른 소대원들이 ‘엘프’라는 말 자체를 꺼내지 않았다. 그 덕분에 라이는 아직까지도 그가 엘프와의 혼혈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너도 노예로 끌려 다녔으니까 잘 알게다. 얼굴 반반한 녀석들이 어떤 꼴을 당하게 되는지 말이다.”

라이의 안색이 순간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잘생긴 사내아이들이 끌려가서 무슨 짓을 당하는지를……. 여자애들 같은 경우 처녀성이라는 게 상품으로서 필요했기에 가급적이면 건드리지 않았지만, 남자애들은 얘기가 틀렸던 것이다.

“자신이 엘프라는 것을 증오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겠지. 알고 보면 불쌍한 녀석이야.”

“예, 그렇군요…….”

“얘기가 옆으로 잠시 샜는데…, 엘프는 가녀린 몸매와는 달리 아주 뛰어난 근력을 지니고 있는 종족이야. 숲 속에서의 삶에 특화된 종족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겠지. 나무 위에서 원숭이처럼 날렵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몸은 가벼워야 하지만 강한 근력 또한 지니고 있어야 하거든. 그리고 시력도 아주 뛰어나지. 그 뛰어난 시력을 이용해서 활을 쏴대니 누가 숲 속에서 엘프를 당할 수 있겠냐?”

“몬스터들이 있잖아요. 숲의 유령이라는 트롤, 그리고 숲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오우거.”

라이는 예전에 트롤에게서 느꼈던 공포가 떠올랐다. 순식간에 나무 위를 타고 날아다니던 트롤의 그 놀라운 움직임. 더군다나 한밤중에 빛도 거의 없는 숲 속이다 보니, 트롤의 모습은 거의 찾아내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하리스는 라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담담한 어조로 반박했다.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식한 자들이나 하는 소리지. 트롤이나 오우거가 강한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어. 하지만 너는 트롤이나 오우거가 수십, 아니 수백 마리씩 떼를 지어 연합작전을 펼친다는 소리 들어봤냐?”

“아뇨.”

“엘프는 그렇게 해. 더군다나 장거리 무기인 활까지 가지고 말이야. 그러면 누가 더 위험한지 이해하겠지?”

트롤이 훨씬 더 위험할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엘프 쪽이 숫자가 많다고 하니 무조건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라이는 순순히 인정했다.

“예.”

“먼 옛날, 엘프들이 대륙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거야. 네가 앞으로 용병으로 살아남으려면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좀 더 주위를 살펴볼 수 있는 시야가 필요할 게다. 알겠냐?”

무식한 용병인 줄만 알았는데 하리스의 말에는 그만의 경험과 철학이 녹아 있었다. 라이는 그제서야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라이가 용병이 된 후, 첫 번째 맞이하는 야외에서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