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 강한 실버 드래곤
쟈크레아는 아르티어스라는 ‘먹이’를 완전히 포기한 게 아니었다. 그때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냥 물러설 수밖에 없었지만…….
아르티어스가 실버 드래곤을 ‘덩치만 큰 돌대가리’쯤으로 치부할 정도로, 실버 일족이 마법 공부에 등한시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대충 공부한다고 해도 고룡이 될 정도의 장구한 세월이 흐르다 보면 웬만한 마법은 다 마스터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쟈크레아는 노룡답게 고차원적인 마법을 이용하여 아르티어스의 레어를 2중, 3중으로 감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 주제 파악도 제대로 못하는 노랑 도마뱀 새끼가 밖으로 기어 나오기만을. 그리고 그때가 바로 놈의 제삿날이 되게 해 주기를.
하지만 그로서도 아르티어스가 이토록 빨리 레어 밖으로 나올 거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허, 정말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이로군. 설마 내가 손가락이나 빨면서 자신에게 손을 대지 못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건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쟈크레아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 교활하기 짝이 없는 아르티어스란 놈은, 말썽만 부리지 않는다면 자신이 개입하지 못할 거라 판단한 거라고 말이다.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일족의 로드로서의 체면이 있지, 명확한 증거도 없이 자신보다 어린 드래곤을 핍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더군다나 그놈과는 종족도 다르지 않은가. 놈을 이유도 없이 박살 내 놨다는 사실이 밖으로 새 나간다면, 골드 일족의 로드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놈도 이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로드의 권능을 이용하여 놈을 함정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즉, 자신의 뒤끝이 얼마나 강렬한지 몰랐다는 게 놈의 치명적인 실책이라는 말이다.
“큭큭큭, 제까짓 게 뛰어 봤자 벼룩이지…….”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쟈크레아가 손을 쓱 휘젓자, 방금 전까지 그의 모습을 비추고 있던 거울에 다른 존재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것은 은빛 드래곤의 형상이었다. 그 드래곤은 자신에게 통신마법을 걸어온 상대가 쟈크레아임을 알아보고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로드(Lord)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저에게 연락을 다 주시고.」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다.”
「말씀만 하십시오, 로드시여.」
“아르티어스라는 놈을 알고 있느냐?”
이름을 듣는 순간 은빛 드래곤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건 오랜 세월 쌓인 깊고 깊은 원한이 서린 눈빛이었다.
「알긴 하는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놈을 찾아가서 시비를 걸어라.”
시비를 걸라는 말에 은빛 드래곤의 두 눈에서 원한 어린 눈빛이 푸시시 사라지고, 곧바로 침통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이런 말씀 아뢰게 되어 원통합니다만, 놈은 저보다 월등하게 강합니다.」
그가 예전에 아르티어스에게 박살 났었다는 것은 쟈크레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이런 제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쯧, 한심한 녀석. 그렇게 패기가 부족하니 하찮은 골드 따위한테 쥐어 터지고 다니는 거야.”
자존심이 무척 상했겠지만 상대는 감히 티를 내지 못했다. 그런 상대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쟈크레아가 지시했다.
“넌 내가 시키는 대로 놈을 찾아가서 시비만 걸면 된다. 놈이 너에게 솜털만큼이라도 피해를 주면, 내가 직접 놈에게 지옥을 경험하게 해 줄 테니까.”
그제서야 상대는 쟈크레아의 의도를 눈치 챘다. 드디어 복수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상대는 흥분해서 외쳤다.
「로드의 지엄하신 명령이신데, 제가 어찌 감히 거부하겠습니까.」
“호오, 내 명령이라서 따르시겠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른 놈을 시키지 뭐. 네놈 아니더라도 놈에게 이를 갈고 있는 녀석들은 많으니까.”
「헤헤, 그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 제가 그 일을 꼭 하고 싶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쟈크레아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은빛의 실버 드래곤을 잠시 바라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놈은 방금 전에 레어에서 나왔다.”
「그럼 목적지가 어딘지……?」
쟈크레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 어린 말투로 소리쳤다.
“그것까지 내가 알아내서 네놈에게 알려 줘야만 하겠느냐? 네가 알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알 수 있는 방법은 널리고 널렸잖아!”
매서운 쟈크레아의 질책에 은빛 드래곤은 납쭉 고개를 조아리며 황급히 말했다.
「제가 놈의 행방을 알아보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로드시여.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 * *
삐익, 삐익.
요란한 경보 소리와 함께 통신용 수정구에 엘프의 모습이 나타났다. 외곽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엘프였다.
“무슨 일인가?”
그랜딜 공작의 물음에 수정구 안의 엘프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전하.」
“손님?”
수정구를 자세히 보니, 엘프의 뒤편으로 반쯤 가려져 있는 오크의 모습이 보였다. 은빛 머리털을 멋지게 기른 오크였는데, 머릿결이 풍성하고 윤기가 자르르 도는 것이 늙어서 탈색된 백발과는 차원이 달랐다.
엘프가 가장 혐오하는 게 바로 무식한 오크다. 그렇기에 경비를 서고 있는 엘프가 오크를 보고 손님이라며 자신에게 보고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저 오크는 오크로 변신한 드래곤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그것도 실버 드래곤이…….
“손님을 최대한 정중하게 식당으로 안내하도록 해라. 주인님께서는 지금 식당에 계시니까 말이다.”
「옛.」
그랜딜 공작은 통신을 끊자마자, 곧바로 식당 쪽 담당자를 호출하여 명령했다.
“주인님께 손님이 오셨다고 전해라. 아마도 실버 드래곤인 것 같다고 말이야.”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식당 담당자가 핼쑥하게 질린 얼굴로 그랜딜 공작에게 연락을 취해 왔다.
「식당 안에는 아무도 안 계십니다.」
그랜딜 공작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브로마네스님과 술잔을 기울이고 계셨던 게 조금 전이었는데, 그럴 리가 있나?”
「제 말이 믿어지지 않으신다면 직접 와서 확인해 보십시오. 지금 식당 안에는 아무도 안 계신 게 틀림없습니다.」
“보물창고로 다시 가셨나?”
하지만 보물창고에서도 아르티어스와 브로마네스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제서야 당황한 그랜딜 공작은 여기저기 통신을 넣어 주인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주인이 계시다는 답신은 오지 않았다. 심지어 아르티어스의 침실까지 다 뒤졌는데도 말이다.
그랜딜 공작은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다른 드래곤이 왔을 때 어딘가로 가 버릴 건 또 뭐람.’
어쩌면 브로마네스의 레어에 놀러 갔는지도 모른다. 그랜딜 공작은 곧바로 다시 식당 담당자를 통신으로 불러 지시했다. 그쪽으로 조금 있으면 오크로 변신한 드래곤이 갈 건데, 그에게 주인께서 지금 자리에 안 계시다는 사실을 전하라고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랜딜 공작은 오크로 변신한 손님의 방문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