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5화 (751/930)

복수를 위한 유희의 시작

알카사스 왕국의 수도 다란스에 도착한 후, 브로마네스가 아르티어스를 데리고 간 곳은 뒷골목에 위치한 허름한 술집이었다. 워낙 구석진 어두운 곳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단골이 아닌 한 찾아오기가 힘들 것처럼 보였다.

“용병단에 대한 정보와 용병 신분증이 필요하다더니… 왜 이리로 데리고 와? 혹시 저기가 도둑길드냐?”

“도둑길드? 흐흐, 그런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좋은 곳이지.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브로마네스는 자신만만하게 앞장서서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허름한 뒷골목에 위치한 술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실내는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슬쩍 손님들을 쳐다보는 중년의 바텐더는 학자라고 말해도 믿겨질 정도로 중후한 분위기의 소유자였다.

만약 우연히 들어온 사람이라면 바깥과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술집의 분위기에 눈이 휘둥그레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묘한 분위기에 당황하기에는 둘의 나이나 경험이 너무 많았다. 그들이 봤을 때는, 이놈이나 저년이나 다 쓰잘데기 없는 호비트일 뿐이었으니까.

“어서 오십시오, 손님. 자, 이쪽으로…….”

미모의 아가씨가 다가와 그들을 비어 있는 자리로 안내하려 했지만, 브로마네스는 그녀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곧장 바텐더가 있는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바텐더는 브로마네스의 우람한 근육질을 보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브로마네스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브로마네스는 바텐더 앞의 의자에 털썩 앉으며 느물거리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사이 바텐더가 바뀌었군.”

중년이 다 된 바텐더로서는 그 말이 꽤나 의외였다. 상대는 아무리 많이 봐 줘도 30대 중반 정도. 저놈이 코흘리개 시절인 열 살 때 여기에 와 봤다면 몰라도,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내뱉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이곳은 저런 머릿속까지 근육으로 꽉 찬 것 같은 용병 나부랭이가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어중이떠중이 손님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술을 꽤나 비싸게 팔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바텐더는 내심을 감추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예전에 오신 적이 있으십니까?”

대답 대신 브로마네스는 주머니에서 낡은 금화(金貨) 한 개를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금화에 새겨진 천사상(天使像)을 중심으로 십자가가 깊게 파여 있었다. 누군가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서 의도적으로 흠집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금화를 본 순간, 중년 바텐더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최고 등급인 VIP고객들에게만 지급되는 금화였기 때문이다. 이곳이 부유한 알카사스 왕국의 수도였지만, 금화를 지급받은 인물의 수는 80여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고객들의 신상은 자신이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온 고객인가?’

중년 바텐더는 최대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다시 물었다.

“누구의 소개를 받고 오셨습니까?”

“푸른 잔 속으로 사라지는 실리에르.”

그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바텐더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 놀라 당황한 자신의 얼굴을 사내에게 보이지 않도록.

잠시 후, 고개를 든 바텐더는 최대한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오랜만에 듣는 그리운 이름이로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바텐더는 여종업원을 한 명 불러 지시했다.

“이 손님들을 특실로 안내해 드려.”

“이쪽으로 오십시오, 손님.”

자리에서 일어난 브로마네스가 몸을 돌려 특실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한 그 순간, 바텐더는 사내의 등에 메여 있는 검을 살펴볼 수 있었다. 순간, 그의 얼굴이 놀라움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아주 단순한 디자인으로 제작되기는 했지만, 이 바닥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저 검은 엄청난 보검이었다. 그것도 드워프가 직접 세공했음 직한…….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저런 보검을 지니고 있지?’

최고 등급인 VIP고객인 만큼 보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부러 저렇게 공을 들여 싸구려처럼 보이도록 제작하지는 않는다. 사내가 그런 검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그의 경각심을 더욱 자극시켰다.

손님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그는 슬쩍 홀 주변을 둘러본 뒤, 카운터 위에 놓여 있는 인형 모양의 장식품들을 재빨리 살펴봤다.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장식품에 박혀 있는 7개의 유리조각들은 술집 주변에 설치되어 있는 경보(警報) 마법과 연동되어 있었다. 만약 침입자가 있다면 유리조각들이 붉은빛으로 빛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우려와는 달리, 그 어떤 이상 징후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이렇듯 예민하게 반응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손님의 등급에 따라 주어지는 표식은 금화, 은화, 동화로 총 세 가지다. 그리고 표식을 보이며 접선할 때의 암호는 1년마다 바뀌었다. 따라서 바텐더는 손님이 제시하는 암호만 들어도 그 손님이 언제 가입했는지를 손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그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뜻밖의 일을 당했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손님이 제시한 암호는 253년 전에 발행된 암호였던 것이다. 혹시 자신이 암호를 잘못 들은 게 아닌지 몇 번을 떠올려 봤지만 분명했다. 만약 수인족과 같은 고객들이 어쩌다 이곳을 찾는 경우가 없었더라면, 자신도 몇백 년 전의 암호를 외우려 개고생을 하지 않았으리라.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야?’

표식은 절대로 상속되지가 않는다. 만약 자신의 후계자가 있어서 그가 새롭게 조직에 접선하게 된다면, 기존의 표식은 회수되고 새로운 표식을 발급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의 등급과 함께 새로운 암호를 지정해 주게 된다.

그런 이유로 바텐더는 머릿속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만약 손님이 누군가의 대를 이어 표식을 물려받은 후계자였다면, 분명 어리숙하게 행동했을 것이다.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고 해도, 이 바닥에서 굴러먹은 자신의 눈을 속일 수는 없을 테니까.

만약 상대가 엘프와 같이 수명이 긴 아인족(亞人族)이었다면 그가 이렇게까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사람은 분명 인간이었다. 그것도 마법사나 신관이 아닌 전사(戰士).

물론 고도로 수련을 한 검객들의 경우 노화를 억누르는 신통한 재주를 부리기도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253년씩이나 되는 세월 동안 새파란 쌍판때기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했다.

바텐더는 점원 하나를 불러 자신을 대신하도록 한 다음, 주위를 슬쩍 살핀 뒤 지하로 내려갔다. 접객 담당인 레베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일단 레베카의 얘기를 들어 보고 결정하기로 하자. 만약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게 포착되면, 그때 없애 버려도 늦지 않을 테니까.’

사내들이 제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설혹 그 덩치 좋은 사내가 전설에 회자되는 영웅쯤 되는 실력자라고 해도 접객실에 비밀리에 설치되어 있는 함정이 발동되면 살아서 나갈 수는 없을 테니까.

조직이 창설된 지 이미 수백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비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이렇게 유사시를 대비한 기반 시설들을 잘 갖춰 놓은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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