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하리스는 머리통을 틀어쥐며 비명을 내질렀다.
“끄으윽! 술을 너무 마셨는지 아주 죽겠구먼.”
머릿속에 지진이 난 것처럼 지끈지끈 아프고, 속은 뒤집어질 듯 울렁거렸다. 오랜만에 마신 데다가, 라이 녀석을 달랜다고 평소보다 조금 더 과음을 한 게 결정적이었다. 푹신한 침대에서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오줌보가 터지기 일보 직전인 상황이었으니까.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들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빌어먹을, 빨리 싸고 돌아와서 조금 더 자야지.”
급히 화장실로 달려간 하리스는 화산이 터지듯 막혔던 오줌을 개운하게 뿜어내며 만족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어~ 시원하다. 그런데 물을 빼고 나서 그런지, 배도 고프고 쓰리고 아주 난리가 났군. 으구구, 머리통까지 더 지끈거리는 것 같네. 젠장, 이놈의 숙취!”
하지만 이때,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참, 그러고 보니 술 마시는 게 처음이라고 했었지? 흐흐흐, 녀석도 지금쯤 숙취라는 게 뭔지 확실히 체험하고 있겠군. 맞아. 숙취를 느껴야 술을 제대로 마신 거고, 술을 제대로 마셔야 사나이라 할 수 있지.”
하리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아침을 먹는 라이의 얼굴은 전혀 숙취에 절어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녀석은 왕성한 식욕으로 음식을 배가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뱃속에 쓸어 넣고 있었다.
그런 라이를 보자 하리스는 왠지 모를 배신감까지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라이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퉁명스럽기만 했다.
“야, 뺀질이.”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당최 제가 뭘 뺀질거렸다고 자꾸 그렇게 부르는 겁니까?”
불퉁한 라이의 대답에 하리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어제 술을 처음 마셔 본 거라며? 게다가 한두 잔 마신 것도 아니고, 술에 취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 정도로 마신 놈이 어떻게 이렇게 쌩쌩할 수 있냐?”
“헤헤, 제가 아직 어리다 보니 회복이 빠른가 보죠, 뭐. 아니면 술 체질이거나.”
“그, 그런가?”
떨떠름한 얼굴로 다시 아침을 먹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하리스의 머릿속으로 안 좋은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저렇게 쌩쌩할 수는 없지. 혹시 저놈이 술에 취한 척 능청을 떤 게 아닐까? 그래, 맞아. 그럼 눈물을 질질 흘리며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조차도 사기란 말이잖아!’
하리스는 불끈 치솟는 분노에 고개를 치켜세우고 라이를 째려봤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어리숙한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애가 아닌가.
‘허, 이거 참. 저놈 얼굴을 보면 순진한 것 같은데, 가만히 이리저리 생각해 보면 마치 내가 농락당한 기분이 드니 원. 하기야 이 험악한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리숙해서는 제명에 못 죽지.’
그렇게 생각하니 치솟는 분노가 서서히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래, 교활해져서라도 살아서 이 용병단을 나가야지. 그래야 가족들이 있는 고향엘 갈 수 있잖아.’
다시 고개를 숙이고 아침 식사를 하는 하리스의 눈가에 왠지 모를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시비를 거는 하리스를 라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젠장. 왜 또 시비는 걸고 야단이야. 무슨 일로 심사가 뒤틀린 거지?’
그 전날 밤에는 야영을 했고, 어제는 하루 종일 강행군에 시달렸다. 오크와의 전투보다도 오히려 장시간의 행군이 더 그들을 힘들게 한 게 사실이다.
임무를 완수한 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안락한 잠자리에 누웠으니, 꿀잠을 잘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 이치.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후의 상쾌한 아침에 왜 저렇게 시비를 걸어대는지 그로서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식사를 마친 뒤 라이는 침대가 있는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관 뒷마당으로 가 아침 운동을 시작했다. 몸을 혹사시킨다고 할 정도로 혹독한 훈련을 계속해 왔던 것이 인이 박인 것이다.
묵직한 전투도끼였지만, 라이에게는 너무나도 가볍게 느껴졌다. 루톤식 도살식에 따라 도끼와 방패를 휘두르며, 어제 아침에 있었던 전투 장면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를 향해 창을 찔러대던 오크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뇌리를 잠식해 오는 것은 암컷과 새끼 오크들의 절망 어린 눈동자들뿐이었다.
“젠장!”
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더욱 힘차게 도끼를 휘둘렀다. 마치 악몽과도 같았던 그 장면들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깨부숴 버리기라도 하듯.
창문에 비스듬히 기댄 채 마당에서 수련을 하고 있는 라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올란도였다.
라이가 아직 탈영을 할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는 걸 그는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그렇기에 라이가 이른 아침부터 완전무장을 갖춘 채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그가 그냥 지나칠 리 없지 않은가.
‘어쭈? 모두들 간밤에 떡이 되도록 술을 퍼마셨으니, 지금이 찬스라는 건가? 저놈을 그냥…….’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라이는 도망치지 않았다. 기특하게도 혼자서 수련을 시작했던 것이다. 여관의 뒷마당으로 간 라이는 대련 상대는 없었지만, 마치 상대가 앞에 있는 것처럼 공격과 방어 동작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기본 동작들이었지만, 그 동작 하나하나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공격과 방어의 흐름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을 보고 올란도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호오, 제법인데? 하리스 녀석이 큰소리칠 만도 해.”
하지만 그의 감탄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곧이어 라이의 움직임이 왠지 산만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 시작할 때의 그 날카롭고 절도 있던 기세는 다 어디로 갔는지, 그저 무작정 크게 휘둘러대기만 했다. 만약 전장에 투입되어 저딴 식으로 움직였다가는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을 게 뻔했다.
“츳, 5급이라고? 뭐, 5급 정도는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적을 상대로 저따위 공격을 하다가는, 그날로 바로 모가지가 날아갈걸?”
더 이상 라이의 수련을 지켜보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판단한 올란도는 식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 독한 브랜디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인지 목구멍이 까칠했던 것이다.
식당으로 가 보니 소대장들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둘 다 부스스한 얼굴로 음식은 그저 깔짝거리기만 할 뿐,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중대장님.”
인사를 건네는 소대장들에게 건성으로 답을 하며, 올란도는 점원을 불러 시원한 물 한 잔을 부탁했다.
“출동 준비 상태는?”
“서너 달은 족히 걸릴 임무인데, 서두를 필요 있습니까?”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게, 하루라도 빨리 끝내는 방법이야.”
“그건 그렇죠. 식사 끝내시기 전까지 준비 완료해 놓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