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3화 (759/930)

아르티어스는 중대원들이 포위망을 구축한답시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을 바라보며 갈등했다. 사실, 자신이 손을 쓴다면 순식간에 고블린을 정리할 수 있을 거라는 것쯤은 잘 안다.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실력을 보이면 중대원들이 자신을 의심하게 될 것은 당연한 사실. 물론 이 정도 병력의 용병들 따위가 자신을 의심하는 것쯤이야 신경도 쓰지 않지만, 혹시라도 이놈들이 사방에 소문이라도 퍼뜨리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재수가 없다 보면 그 소문이 실버 드래곤의 귀에도 들어갈 수 있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멍하니 시간만 보내고 있자니 답답함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조금만 도와주면 모를 거야. 그래, 웬만한 호비트 마법사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그런 마법을 쓴다면, 내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어떤 놈이 눈치 채겠어?’

결국 마음을 정한 아르티어스는 중대장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이봐, 중대장.”

“예, 디겔님, 무슨 일이십니까?”

“고블린의 본거지가 어디쯤인 것 같나?”

중대장은 앞쪽에 보이는 들판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일대 전체입니다. 이쪽에서부터 시작해서, 저쪽에 보이는 커다란 나무 보이시죠? 제 생각에는 거기까지가 녀석들의 세력권인 것 같습니다.”

들판의 북쪽에는 야트막한 산이 솟아올라 있어, 겨울에는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막아 줘 꽤나 따뜻할 게 분명했다. 설명을 듣고 가만히 살펴보자 과연 고블린들이 자리를 잡음 직한 그런 지형이었다.

“놈들이 제 발로 기어 나올 때까지 한없이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내가 저 위쪽에다가 마법진을 몇 개 설치할까 하는데, 자네가 나를 좀 도와줘야겠어.”

순간 중대장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법진을 설치하시겠다고요? 그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저쪽을 보십쇼. 수풀이 우거져 있어 놈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 저 안으로 들어가셨다가 놈들이 쏜 독침이라도 맞으신다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절대 안 됩니다.”

방어막을 치고 들어가면 된다며 반박하려던 아르티어스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저급한 마법사가 고난도의 마법진을 그리러 들어가면서, 자신의 몸을 물리 방어막으로 감싸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면 어쩌지?’

잠시 궁리하는 아르티어스. 그리고 그는 곧이어 해답을 찾아냈다. 다년간의 유희를 통해 쌓은 경험 덕분이었다.

“저 위를 불태우게.”

중대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불을 질러 봐야 놈들에게는 그 어떤 타격도 줄 수가 없는데…….”

“물론 연기나 화기가 땅굴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겠지. 하지만 놈들이 은폐할 수 있는 수풀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내가 저 안으로 들어가서 마법진을 그리기가 훨씬 쉬워지지 않겠나?”

이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들을 도와 마법진을 그리겠다는 말에 중대장은 아르티어스를 다시 봤다. 지금껏 자진해서 자신들을 돕겠다고 나선 마법사는 이 사람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중대장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 언제나 마법사나 신관에게는 공손하긴 했지만, 지금 그의 언행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 그러시다면 그렇게 해 드리지요.”

중대장은 마법사가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하자마자 부하들을 집합시켰다. 그리고 우선 한 개 부대를 차출하여 목표로 하는 지점에 불을 지르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런 뒤 중대장은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그리시겠다는 마법진이 대체 어느 정도 크기입니까?”

아르티어스는 막대기를 들고 흙바닥에 커다란 원을 하나 그린 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 정도 크기요.”

중대장은 즉각 부하들을 불러서 그 원의 외곽에 빙 둘러서라고 지시했다. 널찍한 방패를 들었다고 가정하고 촘촘히 자리를 잡게 하고 보니, 32명이나 되는 병사가 필요했다. 중대장은 그들에게 각자 널찍한 사각형 방패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고블린의 독침 공격만 막으면 되는 만큼, 그리 튼튼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독침이 들어올 작은 간격도 있으면 안 되었다.

중대장이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페가수스 용병단을 선택한 자신의 혜안에 스스로 감탄했다.

‘용병단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는 중대장들의 실력이 모두 다 저 정도라면, 예상보다 빨리 주변 용병단들을 통합할 수 있겠어. 어쨌거나 브로마네스 이놈이 좀 눈치껏 잘해 줘야 할 텐데…….’

지금쯤이면 브로마네스도 용병단에 들어와 있을 것이다. 꽤나 오랜 세월 유희를 즐겨 왔던 놈인 만큼, 실수는 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녀석에게는 쓸데없는 똥고집이 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아직까지도 제정신을 못 차렸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에 그런 고집불통인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고집을 피울 때가 따로 있지, 지금은 실버 드래곤들에게 자신들의 행적이 탄로 날까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그런 중차대한 시점에 화려한 갑옷과 무기를 들지 못해 안달이라니! 도저히 안심이 안 되는 것이다.

결국 불안감을 참지 못했던 아르티어스는 수정 구슬을 꺼내 통신을 보냈다.

“뭐 하냐?”

아르티어스의 물음에 브로마네스는 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런 젠장. 뭐 하냐고? 훈련소에서 멍충이들 가르치느라 아주 미쳐 버리겠다.」

뜬금없이 들어온 특급 용병이다. 신원이 확실하게 파악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중요 임무를 맡기지 않는다. 당연히 기밀 사항에 접근할 수 있는 자리는 더더욱.

그렇기에 본부에서 브로마네스를 훈련대 교관으로 발령 낸 모양이었다. 일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지켜보며 감시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상대의 성격도 가늠해 볼 수 있다. 더군다나 가르치는 모양새를 보며 실력까지 살펴볼 수 있으니 가히 일석삼조라고 봐야 했다.

“킥킥, 그래 열심히 해 봐라. 누가 아냐? 조만간에 네 능력을 알아보고 중대장 시켜 줄지 말이야.”

아르티어스의 농담에 브로마네스는 더욱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젠장. 감히 호비트 따위가 나를 뭐로 보고!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단장을 찾아가서 협박을 해 볼까?」

“아서라. 쓸데없는 짓 하지 마. 그러다가 네가 거기에 있다는 게 밖으로 새 나가기라도 하면 엄청나게 껄끄러워져.”

「그 정도는 말 안 해도 나도 알고 있어. 짜증이 나서 한번 해 본 소리지.」

이때, 성난 듯한 우렁찬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크레스터 교관! 지금 어디에 있나?」

그러자 브로마네스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이만 끊자.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들! 내가 쉬는 꼴을 못보는구만.」

“킥킥, 어쨌거나 수고해라. 건투를 빈다.”

브로마네스를 좀 더 놀려 주고 싶었지만, 아르티어스는 서둘러 통신을 끊었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중대장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목표 지역에 대한 소각 작업을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방패도 준비되었구요.”

“수고했소.”

아르티어스는 품속에서 두툼한 마법책 한 권을 꺼낸 뒤,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너무 오래전에 배웠던 마법이라, 제대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물론 들으라고 한 소리였지만, 아르티어스의 혼잣말에 중대장은 어떤 마법을 쓰려고 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성공하면 그때 가서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도 늦지 않다. 괜히 이것저것 물어본 뒤, 자칫 실패라도 하게 되는 날에는 서로 난처해지는 것이다.

“자, 이제 출발 준비! 모두들 위치로!”

중대장의 지시에 따라 크게 원형으로 둘러선 중대원들의 손에는 널찍한 나무판이 들려 있었다. 각자가 휴대하고 있는 방패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블린을 상대로 작고 탄탄한 방패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고블린의 주 무기는 독침이다. 독침을 막는 데는 방어력 따위는 의미가 없었고, 최대한 넓은 면을 막을 수 있기만 하면 족했다. 그렇기에 몇몇 병사들은 어디서 떼어 왔는지 문짝 같은 것을 들고 있는 자들도 있을 정도였다.

중대장은 그들 중에 제2소대장에게 지시했다.

“쿠르다인! 자네가 책임지고 마법사님이 안전하게 일을 끝마치실 수 있도록 보좌해 드리게.”

“옛, 중대장님.”

아르티어스는 언덕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쿠르다인을 향해 말했다.

“저곳을 중심으로 해서 마법진 5개를 그리려고 하는데, 좀 도와주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마법사님.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아르티어스가 원형방진의 중앙으로 들어오자 쿠르다인이 다시 말했다.

“어느 방향으로 가면 좋을지 말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쪽으로 병사들을 인도하겠습니다.”

“앞으로.”

아르티어스의 주문에 쿠르다인은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앞으로 갓!”

척척척…….

“빨리 갈 생각하지 말고, 좌우 동료의 방패와 자신의 방패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해라.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원형방진(圓形方陣)을 유지한 채 이동하기란 대단히 힘들다. 평탄한 지형만 있는 게 아니라 높낮이가 심한 지형도 있고, 어떤 곳은 타다가 만 굵은 나무나 바위 등 방해물들까지 있기 때문이다.

틱, 틱.

대형을 유지하며 천천히 나아가고 있을 때, 나무 방패에 뭔가가 부딪치는 듯한 가벼운 소리가 몇 번인가 들렸다. 고블린들이 날린 독침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하지만 곧이어 그런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중대 내에 정밀사격이 가능한 저격수만 5명이다. 그들은 조그마한 움직임만 포착되어도, 곧장 그쪽으로 화살을 날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위는 짙은 수풀이 우거져 있어, 고블린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수풀을 모두 태워 버린 지금은 훤히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고블린들이 아무리 조심스럽게 움직인다고 해도 눈에 띄기 쉬웠다.

물론 은폐된 땅굴 안쪽에서 살짝 대롱만을 내밀고 독침을 쏴대는 고블린을 일격에 쏴 죽인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 놓고 독침을 쏠 수 있는 것과, 한 발 한 발 쏠 때마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쏘는 것은 천지 차이가 난다.

고블린들은 독침을 몇 발 날려 본 다음, 사정이 여의치 않자 공격을 포기하고 다시금 굴속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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