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반드시 내가 죽여 주마!
드디어 적의 본대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전갈이 그려진 용병기(傭兵旗). 그 깃발을 선두로 2백여 기의 기마병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진격해 왔다. 착용하고 있는 갑주나 무장의 형태가 워낙에 다양하여, 정규군 병사들과 비교한다면 난잡스럽다는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용병들은 용병들만이 지니는 뭔가 독특한 거친 분위기가 있었다. 아름다운 의장용 갑옷과 투박한 실전용 갑옷의 차이라고나 할까…….
기마병들의 뒤를 이어 6백여 명의 노예병들이 쇠사슬을 철그렁거리며 뒤따랐다. 그리고 노예병들의 주변을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는 또 다른 2백여 기의 기마병들. 그들은 주위에 대한 경계는 물론이고, 노예병들에 대한 감시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붉은 전갈 용병단의 뒤로 3천여 명의 용병들이 뒤따르고 있긴 했지만 미하엘이 노리고 있는 적은 단 하나, 붉은 전갈 용병단 뿐이었다. 용병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고, 또 집단 전투에 능한 그들을 이번 전투에서 반드시 격멸해야만 했다. 대가리만 치면, 나머지는 그냥 오합지졸일 뿐이었으니까.
미하엘은 주위를 둘러봤다. 매복하고 있는 부하들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부하들이 자신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학수고대(鶴首苦待)하고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드디어 저 멀리 노예병들의 뒤쪽으로 마차 행렬이 보였다. 붉은 전갈 용병단의 치중대(輜重隊)였다. 이 길은 마차 1대가 통과하기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길 좌우로 여유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만약 선두가 기습을 당하게 된다면, 치중대의 우마차들은 도움을 주러 달려오는 후위 부대들의 길을 막아서는 장애물이 될 것이다.
“흐흐흣.”
미하엘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전투라는 게 이래서 재미있다. 이쪽보다 월등한 군세를 자랑하는 적들은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눈앞의 적병들은 이미 승리라도 거둔 듯 모두들 하나같이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들이 지금 죽음의 구렁텅이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미하엘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손이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뒤쪽에 대기하고 있는 나팔수들이 일제히 나팔을 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공격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미하엘이 막 손을 아래로 내리려고 할 때였다. 느긋한 표정으로 걷고 있던 적들이 화들짝 놀라 이쪽을 바라보며 허둥지둥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어리둥절해진 미하엘이 옆을 둘러봤을 때, 그는 볼 수 있었다. 일단의 기마병들이 산 아래쪽을 향해 용맹무쌍하게 돌진해 내려가고 있는 장면을.
미하엘은 이를 갈지 않을 수 없었다.
“저런 미친! 아직 공격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저거 어떤 새끼들이야?”
옆에 있는 부관이 채 대답을 하기도 전에 미하엘은 자신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급히 손을 앞으로 뻗으며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빨리 공격 신호를 보내!”
대기하고 있던 나팔수들이 황급히 신호음을 울렸다.
“뿌우우우~~.”
하지만 미하엘의 조급한 마음과는 달리, 부하들의 공격은 빨리 진행되지 않았다. 모두들 땅속 깊이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몸을 숨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구덩이의 앞쪽을 흙이나 낙엽, 수풀 따위로 완벽하게 위장을 해 놓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런 엄폐물을 다 치운 후에 밖으로 뛰쳐나가 사격 자세를 잡으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윽고 아래쪽을 향해 사격이 시작되었다.
슈슉, 슈슈슉.
미하엘의 부하들이 쏘는 가느다란 화살도 간혹 보였지만,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창처럼 크고 굵은 도렌 병사들이 쏘아대는 화살이었다. 무거운 화살을 멀리 날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위쪽에서 아래로 쏘는 경우에는 얘기가 다르다.
지형적 잇점까지 더해지자 도렌 병사들의 화살은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했다. 워낙에 무겁고 위력적인 화살이라 그런지, 방패나 갑옷 따위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했다. 방패를 들고 막으려 해 봐도, 방패를 뚫고 들어가 몸을 산적(散炙)처럼 꿰뚫었다.
매복 공격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게 최초의 화살 공격이다. 일제 사격을 통해 적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 놔야, 그 다음에 진행되는 백병전에서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격 시작부터 틀어져 버렸다. 일단의 기마병들이 미하엘이 아직 공격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적을 향해 돌격해 들어간 것이다.
현재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간 일단의 부하들은 적과 맹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등 뒤에서 날아오는 아군의 화살비에 고스란히 노출된 상태로.
작전이 틀어졌을 때 최대한 빨리 상황에 맞는 결정을 내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지휘관의 중요 덕목이다. 그런 점에서 미하엘은 지휘관의 자격이 충분했다. 그는 지체 없이 나팔수들에게 명령했다.
“돌격 신호를 보내라!”
1개 소대 정도만 달려 내려간 상황이었다면, 눈 딱 감고 모른 척했을 것이다. 하지만 1개 중대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무리 그가 냉혈한이라고 해도, 50여 명이나 되는 부하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몰 수는 없었던 것이다.
브로마네스는 초조했다.
자신들이 이곳에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적들은 사지(死地)를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느긋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표정만 봐도 앞으로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당연히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브로마네스가 초조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하나. 이런 상황에서는 적 지휘관을 죽이는 영웅적인 전공을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하들은 참호 안에 완벽히 몸을 숨긴 상태에서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소대장인 그는 틈새로 밖을 내다보며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브로마네스는 적 대열의 중간 부분에서 눈에 확 띄는 존재를 찾아냈다. 짙은 밤색 말을 몰고 있는 중년 사내였다. 주위의 다른 용병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멋진 갑옷만 봐도, 그가 적군의 지휘관이라는 것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브로마네스는 무심결에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들 몸을 얼마나 잘 숨기고들 있는지 단 한 놈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공격 명령이 떨어지면, 빗발치듯 화살이 적군을 향해 날아가리라. 그러면 저 적군 지휘관은 자신이 손을 쓸 새도 없이 목숨을 잃을 게 아닌가.
브로마네스는 유희의 첫 단추를 이렇게 허망하게 끝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럴 수는 없지. 저건 내 먹잇감이란 말이다!’
브로마네스는 참호 입구를 가리고 있던 위장물들을 조용히 치우기 시작했다. 보병이 위주인 도렌 영지병들은 자신들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참호만 파면 되었지만, 기마병 위주인 용병들은 말과 함께 들어갈 수 있도록 참호를 크고 넉넉하게 파야만 했다.
그와 그의 부하들이 판 참호는 두 개. 각기 다섯 명씩 자신의 말과 함께 들어가 앉아 있었다.
부하들은 브로마네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참호 밖으로 나가는 것은 공격을 뜻하는 나팔 소리가 들려온 후라고 알고 있었는데…….
참호 앞에 놓인 위장물을 모두 제거한 브로마네스는 부하들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우리 소대는 적군을 향해 제일 먼저 돌진한다. 알겠나?”
“저, 하지만 소대장님…….”
반론을 제기하려던 부하는 브로마네스의 광기 어린 눈과 마주치자마자 숨을 죽여야만 했다. 몸서리가 쳐질 만큼 아찔한 공포와 함께 상관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죽는다! 그 이외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를 따라 나와라. 그리고 너, 옆 토굴에 가서 나머지 대원들도 다 밖으로 나오라고 해.”
브로마네스와 그의 부하들이 자기들 딴에는 살금살금 은밀히 움직인다고 애를 쓰기는 했지만, 그들의 움직임을 눈치 채지 못할 중대장이 아니었다. 그 역시 참호 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는, 주위 상황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로마네스의 난데없는 돌발 행동을 눈치 챈 중대장은 질겁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 소리조차 지를 수도 없었다. 바로 코앞에서 적군이 통과하고 있었다. 이 중차대한 시점에 자칫 적군에게 아군이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되면 곤란했기에, 중대장으로서는 초조함에 입술을 질끈 깨물며 브로마네스만 노려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브로마네스가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아래쪽으로 돌진하기 시작한 것은.
중대장은 입이 떡 벌어진 채 아래쪽으로 질주하는 인마(人馬)들을 바라봤다.
신참 소대장놈이 전투가 시작되기 전의 극한 긴장감을 못 이겨 어설픈 행동을 한다고 여겼지, 설마하니 겨우 10기로 몇천 명이나 되는 적군을 향해 돌진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아직 대대장의 공격 명령조차 떨어지지 않은 상황이 아닌가.
이윽고 정신을 차린 중대장은 가까스로 입을 열어 터질 듯한 분노를 토해 냈다.
“저, 저런 미친 새끼!”
전력으로 질주하는 말 위에서 몸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산속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가는 경우에는 더더욱 힘들다. 길이 가파른 것도 문제였지만, 나무나 바위와 같은 장애물에 부딪치기라도 하면 어디 한두 군데 부러지는 정도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브로마네스의 머릿속에는 그런 위험에 대한 걱정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말을 몰며 장애물을 피해 달려 내려갔다.
브로마네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오로지 적장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멋있게 저놈을 죽일 수 있을까? 그렇다. 그냥 죽이는 게 아닌, ‘멋있게’ 죽여야 한다는 점이 아주 중요했다.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되는지, 브로마네스는 등에 메고 있던 장검을 거칠게 뽑아 들었다.
“크흐흣! 기다려라. 넌 내 거야.”
브로마네스를 뒤따르던 부하들 중 하나가 옆으로 뻗어 나온 나뭇가지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부딪쳤다.
퍽!
“으아악!”
그리 굵은 나뭇가지도 아니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부딪치는 순간 목이 부러져 버린 것이다. 이미 시체가 되어 버린 그의 몸은 뒤로 붕 날아 떨어지더니, 흙먼지를 피워 올리며 데굴데굴 구르다가 나무 덤불 사이에 처박혀 버렸다.
갑작스런 기습을 당한 상황이었기에, 브로마네스 쪽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적병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적진에 도착했을 때, 브로마네스의 뒤를 따르고 있는 부하는 겨우 네 명밖에 되지 않았다.
중대장이 기가 막혀 잠시 멍하니 있던 바로 그 시간, 대대장 미하엘의 사격 명령이 떨어졌다. 요란한 나팔 소리와 함께 참호 속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병사들은 저마다 자리를 잡는 대로, 아래쪽에 보이는 적들을 향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활이라는 무기의 특성상 발사된 화살은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적에게 꽂히게 된다. 그렇기에 브로마네스가 이끄는 소대가 적을 향해 달려갈 때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적들과 부딪쳐 접전을 벌이기 시작하자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활은 정확도가 그렇게 뛰어난 병기가 아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장거리 사격을 하는 경우의 정확도는 더욱 떨어진다. 적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브로마네스의 부하들 중 한 명이 갑자기 말에서 떨어져 나뒹굴었다. 적의 칼에 맞은 게 아니라, 운 나쁘게도 뒤에서 날아온 아군의 화살에 등판이 꿰뚫린 것이다.
이대로라면 적이 아닌 아군까지 쏴 죽이게 될 게 뻔했다. 중대장은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눈을 질끈 감고 아군이 맞든 말든 계속 화살을 쏠 것이냐, 아니면 사격을 중지시키느냐.
“사, 사격 중지!”
중대장의 외마디 비명과 같은 명령에 대원들은 사격을 멈췄다.
“빌어먹을! 어쩔 수 없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이를 으드득 갈아붙인 중대장은 황급히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각자 말을 꺼내 와! 적진을 향해 돌격해. 저 개 같은 새끼들을 구하러 간다.”
중대장의 명령에 부하들은 황급히 참호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말들을 데리고 나왔다. 말들은 모두 눈가리개가 씌워져 있었고, 입에는 소리를 낼 수 없도록 헝겊으로 막아 놓은 상태였다.
부하가 건네준 자신의 말고삐를 받아 쥔 중대장은 먼저 말의 눈을 가리고 있던 눈가리개를 풀어 주고 입에서 헝겊을 빼냈다. 그런 다음 말에 올라타며 큰 소리로 명령했다.
“전원 승마!”
부하들이 말에 오른 것을 확인한 후, 그는 칼을 뽑아 들어 하늘 위로 치켜들며 외쳤다.
“우리는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중대장의 선창에 부하들도 일제히 따라서 우렁차게 외쳤다.
“우리는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중대장은 비장한 표정으로 적군이 득실거리는 아래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아레스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선창을 끝낸 중대장은 칼을 앞으로 쭉 뻗으며 외쳤다.
“전원 돌격!”
중대장의 돌격 명령에 부하들은 일제히 산 밑으로 말을 몰아 돌격해 내려갔다.
“우와아아아!”
적을 향해 돌진할 때는 딴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이런 가파른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가야 할 때는. 하지만 중대장의 마음은 분노로 인해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 전투가 끝난 후에, 어디 두고 보자. 모가지를 아주 비틀어 주마.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