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전갈 용병단원들이 실전 경험이 풍부하기는 했지만, 이런 갑작스러운 기습에는 그런 경험조차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산골짜기의 좁은 길목에서 당한 기습이다. 그것도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반격은 고사하고 모두들 우왕좌왕하며 화살을 피해 몸을 숨기기에 바빴다. 하지만 딱히 몸을 감출 만한 곳도 없었다. 화살이 한 방향에서만 날아오고 있는 게 아니라, 사방에서 날아왔기 때문이다. 용병들은 당황해서 이리저리 몰려다니다가, 화살에 꿰여 헛되이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용병들의 상황이 이러한 데다, 움직임이 제어된 노예병들의 혼란은 더욱 극심했다. 그들은 발에 쇠사슬까지 채워져 있었다. 그것도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옆에 있는 다른 노예들의 발과 연결되어 있었다. 옆의 노예 두셋이 화살에 맞아 죽어 버리면, 시체 무게로 인해 어디로 도망조차 가지 못하고 그대로 화살밥이 되어야만 했다.
이때, 소수의 적 기마병들이 가파른 산길을 타고 맹렬히 돌진해 내려왔다. 일부는 말과 함께 구르기도 했고, 나무에 부딪치며 나뒹굴기도 했다. 하지만 당황한 그들의 눈에 그런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오로지 가장 선두에 서서 칼을 휘두르며 달려 내려오는 브로마네스의 광기 어린 모습뿐이었다.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는 순간, 순식간에 그들의 코앞에까지 들이닥친 브로마네스와 그의 부하들. 그들은 인정사정없이 닥치는 대로 용병들의 목을 베며 주위를 제압해 나가기 시작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일단의 기마병들이 적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워낙 좁은 산길인지라 아군 용병들에 가로막혀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침착하게 전황을 살피던 연대장은 그 모습에 감탄사를 터트렸다. 저런 가파른 산길을 맹렬한 속도로 말을 몰아 달려 내려오다니. 초개와도 같이 목숨을 내던질 정도의 각오가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더군다나 제일 앞에서 달려오며 용맹스럽게 길을 개척하는 자의 실력은 참으로 놀라웠다.
“허, 굉장하군. 설마 이런 촌구석에 저런 실력자가 숨어 있었을 줄이야…….”
연대장은 저들이 도렌 영지의 기마병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용병들의 경우 자신들이 어느 용병단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밝히는 문장을 갑옷에 달지 않는다.
정규군들이야 일부러 자신의 소속을 드러내어 그것을 과시하는 데 이용했지만, 용병들의 경우에는 문장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숨기는 쪽을 택했다. 의뢰를 수행하다 보면 감추는 쪽이 행동하기에 훨씬 편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야 할 때는, 용병단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을 이용했다.
하지만 저들은 깃발을 들고 있지 않았기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이때, 그의 부관이 칼을 뽑아 들며 연대장에게 외쳤다.
“어서 피하십시오, 연대장님.”
그리고 부관은 비장한 표정으로 호위병들을 향해 외쳤다.
“너희들은 나를 따르라!”
연대장이 피할 수 있는 시간 여유를 벌어 주기 위해 적들을 막아서려는 것이다. 하지만 연대장은 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돌진해 들어오는 적의 실력이 꽤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적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노쇠해 가던 자신의 육체에 기분 좋은 투지를 일깨워 주고 있었다. 지금은 연대장으로서 뒤에서 지휘를 하고 있지만, 이 자리에 올라오기 전까지 그는 붉은 전갈 용병단의 선봉을 지켜 왔던 강자였다. 그런 그가 몇 되지도 않는 적의 도발에 겁먹을 리가 없었다.
연대장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저 멀리서 아군 기마병들이 이쪽으로 오려고 애쓰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길이 좁아 아군 보병들에게 가로막혀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다.
“쯧, 칼밥을 먹고 산 게 하루 이틀이 아닌데, 겨우 이 정도 기습에 허둥대고 있다니…….”
연대장은 다시금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부관은 호위병들과 함께 적의 돌격대를 저지하느라 사력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적장에게는 부관을 비롯해서 5명의 호위병이 집중공격을 가하고 있었지만 적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적장의 칼에 호위병들만 한 명, 두 명 목숨을 잃고 있었다. 정말이지 놀라운 솜씨를 지닌 인물이었다.
“아무래도 좀 도와줘야겠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손은 활을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덜렁거리지 않도록 말 등에 묶여 있었지만, 그는 놀라운 속도로 활을 끌러 들었다.
그가 안장에 매여 있는 화살통에서 꺼내 든 화살은 3발. 시위를 잔뜩 당긴다 싶은 순간, 화살은 맹렬한 속도로 적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의 속사(速射) 실력은 놀라웠다. 보통의 사수들은 시위를 끝까지 당긴 상태로 목표를 조준하는 데 반해, 그는 시위를 끝까지 당기는 순간 그냥 놔 버렸다. 그리고 숨 쉴 틈도 없이 다음 화살을 시위에 걸어 당기기 시작했다.
얼마나 빨리 쏴대는지 첫 번째 화살이 미처 목표물에 닿기도 전에 2번째 화살이 날아갔고, 적장이 놀라운 솜씨로 자신에게로 날아온 화살을 쳐 냈을 때쯤, 3번째 화살이 그의 손을 벗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순간 연대장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빈틈을 노리고 날아간 화살을 놈이 막아 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 적장의 실력이 자신의 예상보다 더 대단하다는 증거였다. 그 외에 다른 2명은 자신의 몸을 꿰뚫고 들어온 화살을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세상을 하직했으니까.
“허허, 참. 그 와중에 그걸 막다니! 그것도 방패도 아닌 칼로……. 쯧, 이럴 줄 알았으면 저놈에게 집중사격을 할 걸 그랬나…….”
연대장은 다시금 손을 뻗어 화살을 잡으려 했다. 그때였다. 적장의 칼이 번뜩이더니 부관과 2명의 호위병이 거의 동시에 피를 뿜으며 말에서 떨어져 나뒹굴었다.
갑작스런 부관의 죽음에 호위병들이 멈칫하는 그 순간을 노려 적장은 말에 박차를 가해 포위망을 돌파했다. 호위병 2명이 급히 그 뒤를 따라붙었지만, 적장과의 간격은 쉽사리 좁히지 못했다.
자신을 향해 육박해 들어오는 적장의 모습을 바라보며 연대장은 화살을 집는 대신 검을 뽑아 들었다. 서로 간의 거리가 워낙 가까워 화살 한두 대 정도는 날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장에게 타격을 주지 못하면 자신이 위험해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저런 멋진 적을 화살로 쏘아 죽이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핫!”
연대장이 짧은 기합성과 함께 발로 배를 툭 치자, 오랜 세월 그와 함께해 온 말은 주인의 의도를 읽고 맹렬히 앞으로 내달렸다. 돌진해 오는 적장을 향해 이쪽에서도 달려 나가자 순식간에 두 사람의 간격이 좁혀졌다.
챙!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연대장은 적장이 너무나도 젊다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갑옷이나 투구 틈 사이로 드러난 팽팽한 살갗을 그제서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산 위에서 아래로 달려 내려가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다. 경사가 심하게 진 데다가 아름드리나무는 물론이고, 바위까지 군데군데 솟아올라 앞을 가로막고 있다.
단 한순간만 실수해도 목숨이 날아간다.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린다고 해도, 산길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가는 것은 말이다. 당연히 말을 자신의 의지대로 능수능란하게 다뤄야 한다는 뜻이다. 그건 말과의 오랜 유대관계와 호흡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악조건을 뚫고 달려 내려온 다음에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치열한 접전이 이어졌다. 아마도 제일 앞에서 달려가며 용맹무쌍하게 아군의 방어를 뚫고 나간 적장이 없었다면, 그들은 아래쪽에 도착하는 즉시 전멸했으리라.
자신을 가로막는 아군 수십 명을 베며 여기까지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적장의 호흡은 단 한 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호오, 이거 예상보다 더 대단한 놈인지도 모르겠는걸?’
순간 연대장의 가슴에 호승심(好勝心)이 크게 일었다. 지금껏 전장에서 부상을 당한 것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았고, 그중에는 생사를 넘나들 정도의 치명상도 몇 번인가 입었다. 하지만 일대일 대결에서 패한 적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고는 하지만, 이런 애송이한테 질 리가 있겠는가.
미하엘은 결국 돌격 신호를 보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날카로운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자, 부하들이 일제히 숨어 있던 참호를 벗어나 적을 향해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흡사 사냥꾼 같은 너덜너덜한 갑옷을 걸친 도렌 영지군이 달려 내려갔다.
미하엘은 고개를 돌려 붉은 전갈 용병단을 뒤따르는 다른 용병단 쪽을 바라봤다. 예상대로 그들은 붉은 전갈 용병단의 치중대와 뒤엉켜 우왕좌왕하며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미하엘의 시선은 다시금 격전의 중심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작전을 엉망으로 망쳐 놓은 소대장놈을 찾아냈다. 그를 노려보며 미하엘은 이빨을 갈지 않을 수 없었다. 저놈 하나 때문에 자신이 계획했던 전투가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예정보다 너무 빠른 시간에 감행된 돌격이었다. 화살로 충분히 타격을 입힌 뒤 돌격을 했어야 했는데, 제대로 타격조차 주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 명령을 내려야 했다.
당연히 적은 거칠게 대응을 해 올 것이다. 즉, 저 한 놈 때문에 승리를 확신했던 이번 전투의 승패가 안개가 낀 것처럼 모호해져 버린 것이다.
“신이시여, 제발 저 녀석이 마지막까지 살아남게 해 주십시오. 제가 저놈의 목을 잘라, 적장의 목과 함께 장대 꼭대기에 매달 수 있도록!”
미하엘은 소대장 녀석이 어떻게든 살아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래야 전투가 끝난 후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한 죗값을 치르게 해 줄 수 있을 테니까.
아니, 죽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녀석의 목이 잘려 장대 꼭대기에 매달리는 것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미하엘은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부하들에게 단호하게 본보기를 보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때, 분노로 가득 찼던 미하엘의 두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호오, 제법인데?’
내려가는 도중에 다섯이 죽고, 아래쪽까지 도착한 것은 겨우 다섯 기. 하지만 소수의 기마병이 난입했을 뿐인데도, 적들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 버렸다. 그들이 치고 들어간 위치 때문이었다.
그들이 번개가 무색할 속도로 휘젓고 있는 곳은 붉은 전갈 용병단의 중군(中軍)이었다. 지휘부가 갑작스럽게 습격을 받게 되자, 명령 체계가 마비되었는지 적은 혼란에 빠져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더군다나 곧이어 중대장이 이끄는 후속 기마대까지 도착하여 그 뒤를 받쳐 주자, 적들은 더욱 극심하게 혼란에 빠져들었다.
전장 전체를 재빨리 훑어본 후, 다시금 소대장 쪽으로 시선을 돌린 미하엘. 지금껏 산전수전 다 겪어 온 그였지만, 지금처럼 놀라운 광경을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어느새 그 빌어먹을 소대장놈이 호위 병력을 뚫고 적의 지휘관에게로 바짝 다가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적장이 부딪치는 순간, 그들의 주위로 맹렬한 불똥이 튀기 시작했다. 그건 엄청난 속도로 검과 검이 부딪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놀라운 실력!”
미하엘은 다급히 옆에 대기하고 있던 전령에게 물었다.
“자네, 저 녀석이 누군지 아나? 저쪽에서 적 지휘관과 싸우고 있는 녀석 말이야.”
“아, 이번에 저희 대대로 새로 발령받아 온 소대장입니다.”
“소대장이라고? 확실해?”
“그렇습니다. 얼마 전까지 훈련대 교관으로 있다가, 소대장으로 임관돼서 왔다고 들었습니다.”
저런 대단한 검술 실력을 지닌 자가 소대장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용병들의 세계는 강자존(强者尊)의 법칙이 존재한다. 나이나 예전 신분 따위는 한 푼의 가치조차 없는 게 용병들의 세계다. 강하면 강할수록 대우를 받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그런데 저런 놀라운 실력을 지닌 놈이 겨우 소대장이라니. 혹시 다른 용병단에서 보낸 첩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저렇게 대놓고 주위의 이목을 끄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어쨌거나 수상쩍은 놈인 건 사실이군.”
전장 전체를 통제하며 아군의 유기적인 움직임을 이끌어야 할 지휘관인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 미하엘은 자신의 임무를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전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둘의 검투는 격렬하면서도 장엄했다.
이걸 죽여? 살려?
영원히 지속되는 전투는 존재할 수 없는 법, 결국에는 승부가 갈리고 말았다. 물론 승자는 브로마네스였다. 아니, 브로마네스일 수밖에 없었다. 순수한 검술만의 대결이었다면 적장의 적수가 되기 힘들었겠지만, 그에게는 사기 아이템이 있었다. 이런 경우를 상정하고, 특별히 공을 들여 제작해 놓은.
“커억!”
연대장은 까마득해지려는 시선을 간신히 붙들어 적장을 바라봤다. 틀림없이 승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적장의 마지막 공격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급속히 생명력이 사라지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적장에게 말을 걸었다. 모든 힘을 다 끌어모은 것이었건만, 그의 목소리는 알아듣기조차 힘들 정도로 작았다.
“어, 얼굴을 보여 줄 수 있겠나?”
의외로 적장은 그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줬다. 투구를 벗자 드러나는 준수한 얼굴.
“허어, 젊군. 젊어…….”
투구 틈 사이로 보이는 탱탱한 피부 때문에 젊다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젊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이 저런 새파란 애송이에게 당했다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거친 용병의 삶을 살아왔던 자신이었기에, 전장에서의 죽음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하하네, 젊은이. 자네가 이겼…….”
연대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며 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축 늘어진 그는 이미 목숨이 끊어졌는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브로마네스는 검을 높이 치켜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적장이 죽었다!”
그러자 도렌 쪽 병사들이 이에 호응하며 우렁찬 함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
그 순간 도렌 쪽 병사들의 사기(士氣)가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간 반면, 메르헨 쪽 용병들은 싸울 의욕을 상실해 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붉은 전갈 용병단을 이끄는 최고위급 지휘관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것도 이름도 없는 애송이에게 말이다.
이후 벌어진 것은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적은 지휘부가 붕괴되자 혼란에 빠져 제각기 살길을 찾아 도망치기에 바빴다. 하지만 산길을 치중대가 가로막고 있다는 게 또 한 번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치중대에 막혀 우왕좌왕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적에게 죽임을 당한 병사보다 산길 아래쪽으로 추락사하거나, 동료에게 깔려 죽은 병사가 더 많았을 정도였다.
만약 도렌 쪽에서도 용병단을 끌어들였다는 정보만 입수했어도, 이렇게까지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록 페가수스 용병단보다는 급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붉은 전갈 용병단이지만, 이들 역시 전쟁이라면 신물이 나도록 겪은 정예병들이었다.
붉은 전갈 용병단은 적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승리를 낙관했고, 그에 비해 페가수스 용병단은 자신들이 상대해야 할 적들이 누군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전쟁의 승패는 갈려 버렸다고 봐야 했다.
포로로 잡힌 자들은 갑옷이나 무기는 물론이고, 가지고 있던 동전 한 푼까지도 모조리 다 뺏기게 된다. 포로들은 마을 인근에 마련된 임시 수용소에 갇히게 되는데, 이때 몸값을 지불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돈을 받고 풀어 주는 게 관례였다.
예를 들어 소속이 있는 용병들의 경우, 그들이 소속된 용병단에서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간다. 하지만 떠돌이 용병들처럼 몸값을 지불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경우에는, 노예로 팔아 버리는 것이 오랜 옛날부터 행해지는 관례였다.
부하들이 포로들을 임시 수용소에 가두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 미하엘은 자신의 명령을 위반한 소대장 녀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처음 생각대로라면 가차 없이 목을 베어 적장의 목과 함께 장대 꼭대기에 매달아 놨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죽여 버리기에는, 그의 실력이 너무 아까웠다. 더군다나 적장의 목을 베는 크나큰 공까지 세우지 않았던가.
“처형해야 마땅합니다.”
한 중대장이 이렇게 말하자, 브로마네스를 이끌고 있는 중대장이 발끈해서 반박했다.
“적장의 목을 벴습니다. 그것도 혈혈단신으로 호위대를 뚫고 들어가서 말입니다. 그런 영웅을 치하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목을 베다니요. 그걸 병사들이 납득할 것 같습니까? 무엇보다 우리들은 용병이 아닙니까.”
“옳습니다. 명령을 위반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가장 큰 공을 세운 것 또한 사실이니까요.”
그러자 처음에 처형해야 한다며 주장한 중대장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용병이라고 해서 군율을 허술하게 적용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들만으로 작전을 진행하고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그 녀석을 풀어 주신다면, 영주 쪽 장교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맞습니다. 용병단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일벌백계(一罰百戒)로 다스려야 합니다.”
휘하 중대장들의 의견조차 첨예하게 둘로 나누어져 있었기에,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미하엘의 고민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이때, 경비병이 들어와 보고했다.
“그렉 크레스터 소대장이 도착했습니다.”
미하엘은 중대장들에게로 고개를 돌려 양해를 구했다.
“자네들의 의견은 충분히 참고하겠네. 일단은 이 말썽꾼과 단 둘이 얘기를 나눠 보고 싶네만…….”
그 말에 중대장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거나 상벌의 모든 권한은 지휘관인 미하엘에게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렉 크레스터, 대대장님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빼어난 외모를 지닌 젊은이가 서 있었다. 얼굴 여기저기에는 핏물이 잔뜩 말라붙어 있었고, 머리카락은 땀에 푹 절어 있는 데다가 투구의 무게에 눌려 떡이 되어 엉켜 있었다.
격전을 치른 후에도 씻지 못해 엉망인 차림새를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빛이 났다. 외모만으로 따진다면 어딘가의 귀족의 아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그런 외모에 실력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정말이지 앞날이 기대되는 젊은이였다.
그렉 크레스터의 출중한 외모에 미하엘은 당혹스런 눈빛을 비쳤다. 이건 분명 미하엘의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그가 오기 전에 읽어 본 그에 대한 보고서에는 화려한 경력들만 쓰여 있을 뿐, 외모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미하엘은 그렉 크레스터가 자제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무식하고 험악하게 생긴 놈일 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렉 크레스터의 고귀하게 생긴 외모를 본 것만으로도 미하엘의 마음이 크게 누그러졌지만, 그는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아니, 그렉 크레스터의 군례에 답도 하지 않은 채 싸늘한 어조로 질책부터 쏟아 냈다.
“내가 왜 귀관을 호출했는지 알겠나?”
물론 브로마네스 역시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예전에 한창 유희에 빠져 있었을 때는, 나라를 다스려 본 적도 있었던 그가 작금의 사태를 모를 리 없다. 그렇기에 최대한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마도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제가 적진으로 돌진을 감행했기 때문이겠지요.”
“알긴 아는군. 그럼 그것이 명령불복종에 해당하는 중죄라는 것 또한 알고 있겠지?”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대대장님께서 계셨던 그쪽에서는 잘 안 보이셨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있는 위치에서는 보였습니다. 적진에 나 있는 커다란 빈틈이 말입니다. 대대장님께서도 보셨을 거 아닙니까. 허둥대는 보병들에 막혀 저희 쪽으로 달려온 기마병이 몇 기 되지도 않았다는 것을요.”
애송이의 변명에 미하엘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자네 상관이 뒤를 받쳐 줬으니 자네가 적장에게까지 다가갈 수 있었던 거지, 겨우 1개 소대 병력만으로 적장 근처에나 다가갈 수 있었을 거 같나?”
“…….”
순간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는 그렉 크레스터를 보며 미하엘의 마음은 조금 더 풀어졌다. 끝까지 우기며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고 하지 않는 순진함까지 가지고 있다니.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던 화려한 경력만 생각한다면,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미하엘은 무심코 손을 뻗어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이미 읽어 봤기에 내용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한 번 더 그렉 크레스터의 경력을 새삼스럽다는 듯 바라봤다. 여러 용병대에서 세운 크고 작은 공훈들……. 그 공로의 댓가로 저 젊은 나이에 중대장까지 진급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나이에 비해서는 꽤나 화려한 경력이로군. 이 정도만 해도 상관들은 자네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을 걸세. 그런데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해서 자기 무덤을 파는 겐가? 이게 자네 출세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나?”
“…….”
그렉 크레스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런 독단적인 행위는 자네를 성공으로 이끄는 게 아니라 파멸로 이끌 걸세. 그것도 아무런 잘못도 없는 자네 동료들까지 함께!”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잠시 그렉 크레스터를 바라보던 미하엘은 무뚝뚝한 어조로 물었다.
“어디 한 번 솔직히 말해 보게. 설마하니 이런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로 공을 세운다고 해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모두가 다 자네같이 생각하고 제멋대로 행동을 한다면, 어떻게 부하들을 통솔할 수 있겠나. 자네도 장교이니 그 점은 잘 알고 있을 게 아닌가.”
잠시 미하엘의 눈치를 살피던 브로마네스는 머리를 맹렬히 굴린 뒤, 주저주저 하다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공을 세우겠다고 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고 미하엘은 생각했다. 차라리 전공에 눈이 어두워 그랬노라고 말했다면, 젊은 혈기에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받아들였을 텐데. 미하엘은 내심 콧방귀를 뀌며 냉랭하게 물었다.
“공을 세우는 것 외에, 무슨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말인가?”
브로마네스는 짐짓 한탄하듯 구슬프게 말했다.
“개인적인 복수였습니다.”
황당한 답변에 미하엘은 순간 기가 막혔다.
“보, 복수?”
“예, 적장은 붉은 전갈 용병단을 이끄는 고위급 지휘관이었습니다. 그가 그 위치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겠습니까?”
‘그러면 그렇지…….’
말도 안 되는 변명짓거리에 미하엘의 기분이 극도로 언짢아졌다. 혈기가 넘치기는 해도, 꽤나 괜찮은 놈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더니 얄팍한 변명이나 늘어놓는 한심한 놈일 줄이야…….
“그래, 그래서 그가 자네 아버지라도 죽였다는 말인가?”
“예.”
이죽거리기 위해 그냥 해 본 소리였는데 예, 라고 대답을 하자 미하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모습을 본 브로마네스는 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 아니, 그가 제 아버지를 직접 죽인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죽였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난전(亂戰)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름 없는 용병을 누가 죽였는지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와중에 그가 상대편 부대를 지휘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흠, 자네 선친께서도 용병이셨나?”
“예…….”
만약 적장이 자기 아버지를 직접 죽였다고 말했다면, 거짓말로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었다면 미하엘로서도 충분히 납득이 갔다. 치열한 전장에서 죽었는데, 어느 놈이 죽인 줄 알고 복수를 하겠는가. 그러다 적장이 유명한 놈인 걸 알게 되고, 그를 향해 복수의 칼을 간다? 말이 되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을 그냥 용서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하엘은 표정을 굳히고 매섭게 질책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지휘관이 이성을 잃어 버리다니!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지. 이번에는 운이 좋아 적장의 목을 벨 수 있었지만, 만약 귀관이 적장의 목을 베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나? 자네 하나 죽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란 말이야. 알겠나?”
“그가 적군의 지휘관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도저히 제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명령 위반…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멍청함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된 부하들에게도 미안하고 말입니다.”
한순간의 격동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면 충분히 용서할 여지가 있었다. 더군다나 이번 기회에 원수를 갚아 버린 이상, 그가 눈이 뒤집혀서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일은 이제 두 번 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싸늘했던 미하엘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번만은 용서해 주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적장과 싸우는 모습을 보니, 자네 정도의 실력을 지닌 인물이 무명(無名)이었을 리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 여기에 오기 전에는 뭘 했었나?”
이때를 위해서 정보 단체에서 준비해 준 게 바로 그렉 크레스터라는 인물에 대한 상세한 정보였다. 브로마네스는 그 정보를 바탕으로 대충 살을 붙여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미하엘에게 들려줬다.
드래곤의 가공스런 기억력에 기초하고 있는 것인 만큼, 그의 말은 단 1초도 막힘이 없이 술술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로 아귀가 척척 들어맞았다.
물론 의심하려고 든다면 그 점이 조금 수상쩍긴 했지만, 미하엘은 좋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원래 사람이라는 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할 때면 약간의 과장도 들어가고, 한편의 옛날이야기처럼 드라마틱하게 설명하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그것은 용병 녀석들에게 술 한잔 먹여 보면 언제나 되풀이되는 일이기도 했다.
미하엘은 브로마네스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자네가 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충분히 이해는 가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네의 잘못이 덮어질 수는 없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대대장님께서 어떤 벌을 내리신다고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자 미하엘은 짐짓 냉정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귀관의 목을 베어 장대 꼭대기에 매단다고 해도?”
약간의 장난기를 내포한 미하엘의 질문에, 브로마네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건 좀 심하신 거 같고…….”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브로마네스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기더니,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애교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아르티어스에게 하던 행동이 무심결에 튀어나온 것이다.
“감봉! 예, 감봉 정도가 딱 적당하지 않을까요? 어쨌거나 적장의 목을 벤 공도 있고 한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곤란해. 안 그러면 네놈을 세뇌하든지, 아니면 죽여 버리고 다른 데 가서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거든. 그러자면 그 지랄같은 아르티어스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 녀석에게 뭐라고 변명하지?
이런 뒷말이 생략된 것이었지만, 그것을 미하엘이 알 리가 없었다. 사실 미하엘도 실력이 뛰어난 부하의 목을 베어, 장대 꼭대기에 매달 생각까지는 없었으니까.
짐짓 고민하는 척하던 미하엘은 느릿한 목소리로, 위엄을 가득 담아 판결을 내렸다.
“특별히…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 주도록 하겠다. 추후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살아남지 못할 거야. 알겠나?”
순간 확 밝아지는 브로마네스의 얼굴. 미하엘은 결코 모를 것이다. 방금 전의 대화로 인해 목숨이 왔다 갔다 했던 사람은 브로마네스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을.
“감사합니다, 대대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분명히 말하는데,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은 바라지도 말게. 목이 날아가지 않은 것만 해도 행운이라고 생각하라는 말이야.”
“서운하게 생각할 리가 있겠습니까.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브로마네스는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전공이 그냥 허공으로 날아갈 리 없다는 것을. 자신이 이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윗사람들에게 과시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번 전투는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좋아. 그럼 나가 보게.”
“옛!”
힘차게 군례를 올린 후, 활기찬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가는 브로마네스. 그런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하엘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렇게 뛰어난 부하가 자신의 밑에 들어왔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행운이었다.
더군다나 이번 기회를 통해 녀석에게 지워지지 않을 빚까지 지게 만들지 않았던가. 녀석은 자신에게 생명을 빚진 거나 다름없었다. 이런 인연을 이용해서 살며시 끌어당긴다면, 어렵지 않게 녀석을 자신의 심복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묵향> 3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