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공불락의 요새
모라이어스가 숲 속에서 보여 준 신출귀몰한 움직임만으로도 라이가 탈출을 포기할 정도였는데, 붉은 전갈 용병단보다 훨씬 윗등급으로 평가받는 페가수스 용병단 소속 레인저들의 실력은 어떻겠는가.
제7독립대대원들은 자신들의 행적이 적에게 낱낱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만약 도렌 영주가 용병단을 끌어들였다는 정 보만 입수했어도 이렇게까지 어이없이 뒤를 잡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조심을 했을 테니까.
페가수스 용병단은 자신들이 상대해야 할 적이 누군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7독립대대원들은 페가수스 용병단의 참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전투의 승패는 갈려 버렸다고 봐야 했다.
자신들의 위치를 적이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제7독립대대 대대장은 지금까지 해왔듯 적을 기습하는 데 있어서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진격로를 택해 이동하고 있었다.
적을 기습하는 데 있어서 최우선 조건은 적에게 발각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그가 선택한 진격로는 험난하기 짝이 없는 산길이었다.
“이쪽 길로 가야 합니다요.”
갈림길에서 길잡이는 오른쪽을 가리키며 조언했다. 하지만 대대장은 그쪽 길로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도에 따른다면, 왼쪽 길이 요새를 공격하기에 훨씬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길잡이가 가야 한다고 말한 오른쪽 길은 요새지대와 도렌 영지의 중간 지점과 연결된다. 요새지대와 도렌 영지를 잇는 대로에 말이다. 따라서 오른쪽 길로 진격하면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대로를 따라 요새지대로 들어가야만 한다. 기습을 계획하는 대대장의 입장에서 그건 아주 문제가 많은 행로였다.
“오른쪽 길은 안 돼. 돌아가는 것도 문제지만, 적의 눈에 띌 가능성이 농후하단 말일세.”
“그쪽 길은 너무 험합니다요.”
길잡이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고 땅바닥에 주위 지형을 그려 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예전에 겨울에 식량을 구하기 위해 남하해 오던 몬스터 무리들 중 일부가 그쪽 길을 통해 내려왔던 적이 있었습죠. 여기에서 우리가 온 길을 되짚어 따라가면 영주님이 계신 성까지 곧바로 연결되지 않습니까요? 그때, 하마터면 영주성이 몬스터들에게 함락당하는 치욕을 당할 뻔했습죠.”
당시 화가 머리끝까지 난 메르헨 영주는 왼쪽 길로 다시는 몬스터들이 내려오지 못하도록 강력한 요새를 건설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1개 소대(10명)만 있어도 수천 마리의 몬스터를 막아 낼 수 있는 그런 난공불락의 요새를.
“그렇다면 더욱 그쪽으로 가야겠구먼. 그쪽 주둔군 지휘관에게 적정에 대한 정보도 듣고…….”
대대장의 말에 길잡이는 지금껏 감추고 있던 사실을 실토해야만 했다. 사실 이것 때문에 그쪽 길로 가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으니까.
“그 요새는 이미 오래전에 도렌에 빼앗겼습니다요.”
“빼앗겼다고?”
“예.”
대대장은 어이가 없었다. 길잡이의 말이 앞뒤가 안맞았으니까.
“난공불락이라면서 어떻게 도렌에 뺏긴 건가? 도렌군이 그렇게 강했나?”
“두 번에 걸친 대회전에서 도렌에 패배한 후, 영주님께서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을 철수시킨 탓입죠.”
지금까지 메르헨 영지군을 보며 대대장이 느낀 건 그야말로 오합지졸(烏合之卒)의 이미지뿐이다. 그런 허접한 놈들을 앞세워 요새화를 시켜 봐야 뭐가 그리 대단하겠는가. 어쩌면 적에게 점령당했다는 걸 숨기기 위해 병사들을 철수시켰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을 가능성도 있다고 대대장은 생각했다.
“돈이 넘쳐난다는 메르헨의 영주가 겨우 열 명의 병사를 주둔시킬 돈이 없어서 병사들을 철수시켰다는 건가? 자네 말대로라면, 열 명만 있어도 방어가 가능하다면서?”
“그, 그건…….”
대대장의 말에 길잡이의 안색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대대장이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생각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그로서는 뭐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가 없었다.
“뭐, 그 얘기는 그만두세. 나는 그쪽으로 가기로 이미 마음을 정했으니 말이야. 그건 그렇고, 그 요새는 어떤 식으로 만들어져 있던가? 자세하게 설명 좀 해 주게.”
요새의 빈틈을 미리 알고 있다면 공략하기가 쉬워지기에 물어본 것이었다. 하지만 길잡이의 대답은 대대장을 더욱 황당하게 만들었다. 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그, 그게 직접 보지는 못했습죠. 그곳은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거든요.”
길잡이의 대답에 대대장의 비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직접 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길잡이의 말을 100% 믿을 수 없다는 게 확실해진 셈이었으니까.
“자네가 모른다니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겠구먼.”
진격로상에 요새가 건설되어 있고, 또 그게 도렌군의 수중에 넘어가 있다는 건 썩 유쾌하지 못한 상황이다. 아무리 형편없이 건설되어 있는 요새라 해도, 그게 건설되어 있는 지형이 어떠하냐에 따라 방어력이 몇 배나 상승하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지금은 그곳 요새에 얼마나 많은 적병이 주둔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대장은 우선 각 중대장들에게 통보하여 대대 내의 모든 레인저들을 끌어모았다. 그는 지도를 보여 주며 레인저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렸다.
“길잡이의 말로는 이 일대에 요새가 건설되어 있다고 한다. 자네들은 마음에 맞는 사람을 골라 두 명씩 짝을 지어 이 일대를 샅샅이 훑으며 적의 순찰대나 보초들을 없애 버려라. 적들의 눈과 귀를 틀어막아 우리들이 자신들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막아라. 알겠나?”
“옛.”
“각 조들은 각자 유기적으로 이동하며 빠뜨린 곳이 없도록 샅샅이 훑고 나가도록. 본대는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 후, 30분 후부터 이동을 재개하겠다.”
30분 후, 대대는 진격을 재개했다.
앞쪽에 적의 요새가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대대장이 진격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요새를 건설한 당사자가 메르헨 쪽이었기 때문이다.
요새는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건설하는 방어 거점이다. 튼튼하게 건설하면 건설할수록 좋겠지만, 문제는 비용이다. 특히 이런 깊은 산속에 건설하는 요새의 경우 평지에 건설하는 것에 비해 몇 배의 자금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적이 쳐들어올 방향을 위주로 방어선을 건설하게 된다.
남하하는 몬스터를 저지하기 위한 요새인 만큼 북쪽을 향한 방어는 아주 치밀하게 만들어 놨겠지만, 남쪽을 향해서도 과연 그렇게 해 놨을까? 뒤쪽에서 오는 건 아군뿐이니, 굳이 비싼 돈을 들여 후방 쪽에서의 공격에 대한 대비까지 해 놓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도렌에서 그 요새를 점령했다고 하니, 남쪽에서 쳐들어오는 적에 대한 대비를 해 놓긴 해 놨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북쪽을 향한 것처럼 그렇게 막강한 방어선일 리는 없었다. 기습만 제대로 가할 수 있다면, 최소한의 피해만으로도 점령이 가능할 거라는 게 대대장의 생각이었다.
왼쪽 길로 접어든 지 20여 분쯤 지났을 때였다. 산속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폭넓은 대로가 나타났다. 아마도 채석장에서 채취한 석재를 요새 건설현장으로 운반하기 위해 만든 배후 도로일 것이다.
대대장의 기분을 좋게 만든 것은 도로의 상태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는지 도로 위는 잡초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도렌 쪽에서 이쪽 도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였다.
대대장은 생각했다.
‘나 같으면 요새를 점령하는 즉시 이쪽으로 병력을 투입하여 영주성을 기습했을 텐데……. 참, 그럴 필요도 없었나? 두 번의 대회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는데, 굳이 무리를 해가면서 기습작전을 펼칠 이유가 없었던 거겠지.’
메르헨이나 도렌, 양쪽 다 이쪽 도로가 지니고 있는 전술적 중요성을 외면하고 있다면, 그건 요새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그런 분위기라면, 요새에 병사들이 다수 주둔하고 있다고 해도 경비 태세가 소홀할 가능성이 컸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의 병력만 배치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제발 그랬으면…….’
주변에 흩어져 있을 레인저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대대는 천천히 진격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올란도가 거느리는 중대는 다른 대대들보다 100여 미터 앞서 나가며 정찰 임무를 수행해 나갔다.
마침내 올란도의 부대는 저 멀리 수풀 위로 요새의 윗부분이 살짝 보이는 지점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올란도는 즉시 대대장에게 전령을 보내 그 사실을 알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령이 되돌아와 대대장의 지시를 전해 줬다.
“대대장님께서 적진을 정찰하시랍니다. 아주 중요한 임무니 부하들만 보낼 생각 하지 말고, 중대장님께서도 함께 가시랍니다. 적들의 대비 상태를 살펴보고, 그 헛점을 파악하는 데는 사병들보다는 장교가 훨씬 더 나을 거라면서요.”
“이런 빌어먹을!! 정 가서 살펴보고 싶다면 자기가 직접 할 일이지…….”
올란도의 얼굴은 완전 똥 씹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도중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중대원들 앞에 서서 지시를 내릴 무렵 그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올란도는 대원들을 쭉 둘러보며 신 난다는 듯 말했다.
“제군들! 적진에 대한 공격에 앞서 잠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라는 대대장님의 명령이다.”
올란도의 말에 모두들 여기저기에 주저앉았다. 안 그래도 날도 더운 데다가 바람도 잘 통하지 않는 묵직한 갑옷까지 몸에 걸치고 있으니 모두들 죽을 맛이었던 것이다.
“모두들 쉬고 있는데 안됐지만, 지금 호명하는 대원들은 앞쪽으로 가서 정찰 좀 하고 와야겠다.”
“우~~.”
인상을 왈칵 찡그리며 중대원들이 야유를 퍼붓자, 올란도는 그쯤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도 갈 테니까 말이야.”
중대장인 올란도 역시 함께 정찰 임무를 수행한다는 말에 대원들의 야유는 뚝 그쳤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대원은 자신의 말을 다른 동료에게 맡기고 앞으로 나오도록. 우선 쟈코!”
이런 임무는 모라이어스처럼 레인저 교육을 받은 사람을 보내는 게 최고였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대대장이 차출해서 데려 가 버린 상태. 그렇기에 올란도는 쟈코를 필두로 4명의 고참병들을 차례로 호명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가 마지막으로 호명한 대원은 중대에서도 가장 막내인 라이였다.
정찰은 평상시에 행해지던 것과 똑같이 진행되었다. 올란도를 선두로 대원들은 각자 그 뒤를 10미터 정도씩 거리를 두고 일렬로 도로를 따라 걸어갔다. 대대장이 진로를 바꾼 이래, 산길치고는 꽤나 널찍한 도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마차 한 대는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이다.
얼마나 전진했을까, 길이 굽어지는 지점이 나오자 올란도는 조용히 손을 들어 대원들을 멈춰 세웠다.
“우리들의 임무는 적들의 경계 태세가 어떤지 몰래 살펴만 보고 오는 거다.”
그때 궁금하다는 듯 라이가 질문을 던졌다.
“경계 태세라면 적병의 숫자나 배치, 뭐 그런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흐흠, 이왕에 말 꺼낸 김에 네가 가서 살펴보고 와라.”
라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급히 되물었다.
“제가…, 말씀이십니까?”
“너무 가까이 접근할 필요는 없다. 보초의 숫자는 몇 명인지, 또 요새의 구조는 대략 어떤 형태인지, 뭐 그런 정도만 파악하면 돼. 알겠냐?”
“그러다 발각돼서 적들이 화살이라도 날리면요?”
지시를 내리면 입 닥치고 따를 것이지, 라이가 겁먹은 표정으로 자꾸 질문을 던져대자 올란도는 눈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 거 짜식.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뭔 말이 그리 많아! 그리고 설혹 적군이 활을 쏜다고 치자. 너한테 응사할 활이라도 있냐?”
“아뇨.”
활은 믿을 수 있는 고참병들에게만 소지가 허가될 뿐, 라이와 같은 신병은 사용할 수 없는 무기였다.
“그럼 답은 뻔한 거 아냐. 들켰다 싶으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토껴야지.”
올란도의 질책에 라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또다시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저…, 혼자…, 가는 겁니까?”
그러자 올란도는 악마처럼 음흉한 미소를 얼굴 가득 지으며 이죽거렸다.
“그래, 너 혼자서. 하지만 뒤에서 우리들이 지원을 해 줄 테니 걱정 말고 갔다 와. 지금 당장!”
길 앞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단호하게 명령하는 올란도. 라이의 인상이 왈칵 일그러졌다. 이제야 놈의 속셈이 뭔지 확실히 안 것이다.
‘이번에는 적병의 손을 빌려 나를 죽이려고 하는군. 이런 개자식!!’
그렇다고 중대장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평소 올란도가 자신을 삐딱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라이도 눈치채고 있었다. 거부한다면 그걸 핑계로 명령불복종이라며 곧장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뎅강 날려 버릴 게 뻔했다.
“젠장, 갑니다. 가! 그러니까 경계병의 숫자만 알면 된다, 이거죠?”
투덜거리던 라이는 대원들 사이를 빠져나와 앞쪽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길 옆으로 붙은 뒤 납작 엎드려서 수풀을 헤치며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적의 요새가 있다는데 길 한복판으로 멍청하게 걸어가다 죽기는 싫었으니까. 그런 라이를 바라보며 올란도는 씨익 미소 지었다.
‘흠, 이젠 제법 용병티가 나긴 하는군. 과연 이번에는 또 어떤 놀라움을 나에게 선사할지 기대가 되네.’
라이가 자신의 휘하에 들어온 이후,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올란도가 아니다. 그는 알고 싶었다. 적에게 발각이 되어 화살이 날아올 때, 라이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물론 그렇다고 해서 라이를 맥없이 죽게 놔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일상생활 속에서, 살고자 악착같이 발버둥치는 라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으니까.
올란도는 4명의 고참병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라이를 향해 화살을 날리는 적병이 있는지 주위를 잘 살펴보도록! 적병이 매복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주의를 게을리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만약 라이가 단 한 발이라도 화살을 맞는 날에는 어떻게 될지 잘 알지? 앞으로 1년 동안 네놈들 입에서 곡소리가 나오도록 만들어 줄 테다.”
뒤에서 올란도가 나머지 대원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렸는지 전혀 알 리 없는 라이는 앞으로 박박 기어가면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욕이란 욕은 몽땅 다 떠올리며 올란도를 열심히 씹어대고 있었다. 물론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머릿속으로 말이다. 원래 나쁜 놈들은 귀가 밝은 법이니까.
‘이런 나쁜 놈의 새끼! 나한테 뭔 원수를 졌다고 이렇게까지 못살게 굴어! 오크보다 더 악랄한 놈의 새끼. 오크들도 너보다는 나았어. 어디 두고 보자. 언젠가 네놈 등에다가 칼을 깊숙이 박아 줄 테니까.’
숨이 턱에 차도록 땅바닥을 박박 기면서 앞으로 전진하던 라이는 잠시 쉬면서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뒤를 따라오며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버려진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덜컥 들었다.
‘젠장. 안 걸리면 좋겠지만, 적에게 발각되면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심산인가?’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며 주위의 동태를 살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이렇게 꾸물거리고 있다 보면 악독한 올란도가 언제 뒤통수에 화살을 날릴지도 모르니까.
라이는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그래, 이렇게 된 바에야, 내가 살려면 적병에게 발각되자마자 항복하는 수밖에. 노예로 팔려 와 어쩔 수 없이 여기로 끌려왔다고 하면 혹 살려 줄지 알아? 게다가 우리 용병단에 대한 정보까지 모두 알려 준다고 하면 그 가능성이 더 커지겠지?’
마음을 굳힌 라이의 움직임이 보다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