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기어가자 이윽고 수풀 위로 우뚝 솟아 있는 방어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방어벽 위에서라면 이 일대 전체를 한눈에 감시할 수 있을 듯했다. 라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뚫어져라 방어벽을 살펴봤지만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라이가 100여 미터쯤 더 앞쪽까지 기어가자 숲이 끝나며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는 요새의 방어벽까지 이어져 있었다. 덕분에 라이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목표로 삼아 거리를 좁혀 온 방어벽의 실체를.
그것은 요새를 감싸고 있는 방어벽이 아닌, 길을 가로막고 있는 굳건한 방벽(防壁)이었던 것이다.
방벽은 반대편에서 전진해 오는 적들을 막을 수 있도록 건설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성벽들이 그러하듯 방벽 위에는 병사들이 몸을 숨기고 적병들을 향해 화살을 쏘기에 용이하도록 요철(凹凸) 형태의 성가퀴가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성가퀴가 설치된 방향은 저 반대편 쪽을 향하고 있었지, 이쪽은 그냥 뻥 뚫려 있었다.
시선을 돌려 아래쪽을 살펴보니 작은 건물 두 채가 보였다. 한눈에 봐도 오랫동안 사람이 사용하지 않았음에 확실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여기까지 온 라이는 허탈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아무도… 없잖아?’
어쩌면 올란도 그놈은 이미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자신이 어떻게 나오는지 시험해 보려고 먼저 보낸 것이리라. 이런 망할 놈! 오크한테 붙잡혀서 죽을 때까지 노예 노릇이나 해라!
라이는 신경질적으로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큰 소리로 외쳤다.
“전방에 방벽 발견! 적병은 한 명도 없습니다.”
라이는 보고를 받은 올란도가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곧바로 나직하지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야, 이 새끼야. 적이 뒤쪽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디서 큰 소리야! 죽고 싶어 환장했어?!”
“…….”
“닥치고 다시 잘 살펴봐.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알겠냐?”
“옛.”
찔끔한 라이는 고개를 팍 숙인 채 눈알을 열심히 굴리며 주변을 꼼꼼히 살펴봤지만, 적의 모습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라이는 이번에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보고했다.
“중대장님~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요. 정말이라니까요.”
그러자 올란도가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잠복하고 있던 곳에서 벌떡 일어나 씩씩거리며 걸어나왔다. 그는 라이에게로 다가서며 짜증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 이 새끼! 이러다 적병이 한 놈이라도 발견되면, 네놈의 쓸모없는 눈깔을 둘 다 뽑아 버릴 줄 알아.”
“중대장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뒤에서 고참병들이 말리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올란도는 라이의 곁을 지나쳐 공터 밖으로 나가 버렸다. 공터로 나서자 방벽의 전체적인 모습이 한눈에 확 들어왔다. 방벽은 위로 솟아오른 왼쪽의 절벽과 오른쪽의 낭떠러지 사이로 나 있는 도로를 가로막을 목적으로 건설되어져 있었다. 방벽의 폭은 그다지 넓지 않았지만, 높이는 10미터는 족히 되고도 남을 것 같았다.
“뭐, 이런 무식한 방벽이 다 있어. 이런 산골짜기에다가…….”
올란도는 돌계단을 이용해 방벽 위로 올라갔다. 올라가 보니 방벽의 두께가 상상 이상으로 두껍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장 얇은 곳도 4미터는 족히 되었다. 이 정도라면 오우거라 하더라도 쉽사리 뚫지는 못하리라. 이런 엄청난 규모의 방벽을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에 건설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올란도의 놀라움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본 올란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방벽 아래쪽으로 쭉 펼쳐져 있는 놀라운 광경! 수직에 가까운 산비탈을 깎아 4명은 족히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도로를 뚫어놓은 것이다. 도로를 중심으로 한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요, 반대편은 낭떠러지다. 그 도로를 제외한다면 그 어디로도 움직일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이런 미친 짓을 해낸 영주가 있을 줄이야…….”
처음부터 산비탈이 저렇듯 수직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무수한 인력을 동원하여 절벽의 형태가 될 때까지 깎아 낸 것이겠지. 저 엄청난 중노동의 흔적을 보며, 올란도는 인간의 능력에 경외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 저 멀리 길 끝부분에 이쪽을 향해 건설되어 있는 관문이 보였다. 그걸 보자마자 올란도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성가퀴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이쪽이야 방어가 불가능하니 그냥 내버려 뒀다고 해도, 저쪽에는 적병이 주둔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올란도는 품속에서 망원경을 꺼내 저쪽 방벽을 세심하게 살펴봤다. 반대편 관문은 이곳에 비한다면 비교적 최근에 건설된 듯 깔끔하게 정비가 잘되어 있었다.
아마도 저 방벽은 메르헨의 침입을 염려한 도렌 영주가 비교적 최근에 건설한 것인 모양이다.
“젠장, 저쪽에 1개 소대라도 배치되어 있다면, 기습이고 나발이고 끝장이군. 대대장은 무슨 생각으로 이쪽으로 온 거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올란도는 망원경으로 방벽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펴봤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살펴봐도 적병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올란도는 씨익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흐흐, 우리 대대장은 꽤나 운이 좋으시단 말씀이야. 이번에도 손쉽게 공적을 올릴 수 있을 테니.”
올란도는 고개를 아래로 내밀어 라이를 찾았다.
“라이! 라이! 이 녀석 어디 있어?”
햇빛을 피해 건물 안에서 쉬고 있던 라이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왜 그러십니까? 중대장님.”
“너 빨리 가서 대대장님께 보고해라. 적병이 없다고 말이야.”
동료들이 모두 쉬고 있을 때, 대대장에게 달려가 보고하고 돌아오라니. 그것도 자기 혼자서. 불만에 가득 찬 라이의 입이 앞으로 쑤욱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올란도의 보고를 받은 대대장은 본대를 이끌고 진격해 왔다. 도착하자마자 대대장은 중대장들을 거느리고 방벽 위로 올라왔다. 주위를 둘러보던 대대장의 얼굴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방어선을 만들어 놨을 줄이야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적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는 한쪽 면이 낭떠러지인 저 도로밖에 없다. 그리고 그 도로를 틀어막고 있는 이 튼튼한 방벽. 이 정도라면 정말로 길잡이의 말대로 1개 소대만 있어도 몬스터의 대부대를 막아 내고도 남을 것 같았다.
“반대편에도 이런 관문이 있다고?”
“예, 대대장님. 다행스럽게도 그쪽에도 적병은 없는 것 같습니다.”
품속에서 망원경을 꺼내 반대편 관문을 직접 살펴보고 있는 대대장을 향해 올란도가 조언했다.
“흩어져 있는 레인저들을 불러 모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 틈을 이용하여 정찰대를 보내는 건 어떻겠습니까. 저 아래쪽을 보십시오.”
올란도는 관문 아래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경사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관문의 바로 앞부분의 길은 경사가 아주 가팔랐다. 적이 관문을 공격하기 힘들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해 놓았으리라.
“경사가 워낙 급한 데다가 몸을 숨길 만한 곳도 전혀 없습니다. 만에 하나 저쪽 관문에 적병이 매복해 있다면 엄청난 피해를 입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만큼 확실하게 해 놓고 움직이는 게 좋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대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찬동했다.
“그건 자네 말이 맞아. 조심해서 나쁠 게 없으니, 말 꺼낸 김에 자네가 한 번 더 수고해 주게.”
설마 두 번씩이나 일을 시킬 줄이야. 그가 그 말을 꺼낸 건 지금껏 고생하지 않고 띵가거리고 있던 다른 중대장 놈들이 고생하라고 한 거였지, 자신이 고생하겠다는 뜻은 전혀 아니었다. 올란도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찰나,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제2중대장 루니엘이 끼어들었다.
“계속 1중대에게만 임무를 맡기시는 건 불공평하죠. 이번에는 저희 중대가 정찰 임무를 맡고 싶습니다.”
대대장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올란도를 쳐다봤다. 올란도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듯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전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2중대가 수고해 주게.”
“알겠습니다.”
“루니엘이 정찰하고 있는 동안, 주변에 흩어져 있는 레인저들을 불러들이도록 하게.”
“옛.”
루니엘이 자기 중대에서 정찰 임무를 맡겠다고 선뜻 나선 것은, 올란도의 1중대만 계속 공적을 거저먹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반대편에선 적군의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방벽 밑으로 내려온 루니엘 중대장은 부하 10여 명을 선발해 경사로를 내려갔다. 관문과 관문 사이를 연결하는 도로는 U자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내리막길의 길이는 거의 500여 미터였고, 내리막이 끝난 다음에 50~60미터 정도 평평한 길이 이어지다 곧바로 400여 미터에 달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화살의 사거리 밖인 만큼, 내려갈 때는 마음 편히 내려갈 수 있었다.
오르막길로 접어들자마자 루니엘 중대장은 일렬로 길게 늘어선 대형(隊形)으로 진형을 바꿨다. 그리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적의 화살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방패로 몸의 전면을 가린 채 조심스럽게 전진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 루니엘 중대장과 대원들의 모습을 모두 손에 땀을 쥐고 지켜봤다. 작전의 성패가 달려 있는 것이다. 만약 반대편에 적병이 주둔해 있다면 이번 기습 작전은 실패라고 봐야 했다. 저런 난공불락의 요새를 겨우 이 정도 병력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니까.
그렇다고 후퇴해서 다른 길로 이동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적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상부에 보고할 게 뻔했으니까. 그렇다면 철수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고생이 완전히 헛것이 된다고 봐야 했다.
다행히도 정찰대가 방벽 근처에 접근할 때까지 아무런 이상 징후도 일어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방벽에 설치된 문조차 잠겨 있지 않았다. 루니엘의 대원들이 힘을 주어 밀자 ‘끼이이익!’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냥 열려 버렸던 것이다.
루니엘과 대원들은 신속히 문 안으로 뛰쳐들어간 뒤 주위를 살펴봤다. 사람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짙은 정적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다. 루니엘 중대장의 손짓에 따라 대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수색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떤 인기척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루니엘 중대장은 방벽 위로 올라가 맞은편 방벽을 향해 양손을 엑스자로 휘저으며 적이 없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것을 본 대대장은 주위의 부하들을 둘러보며 힘찬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전원 이동! 악마의 골짜기만 건너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지긋지긋한 산행도 끝이다. 모두들 힘내라!”
적병이 없는 게 확실했기에, 대대장은 아직까지 연락이 안 된 레인저들에게 연기 신호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행방불명인 레인저는 2개 조, 4명이었다. 그들을 기다리기 위해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연기 신호를 보면 본대를 뒤쫓아 올 것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