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마네스는 미하엘의 막사에서 나오자마자 급히 자신의 말을 찾아 진지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오랜만에 얻은 자유인데, 혹시 미하엘의 마음이 바뀌어 임무를 변경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럇!”
이번 임무를 끝마칠 때까지 주위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브로마네스는 신이 났다.
한참 말을 달리던 브로마네스는 검집 윗부분에 달려 있는 동그란 수정판을 들어 올렸다.
수정(水晶)은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검사들이 자신의 애검을 장식하는 데 즐겨 사용하는 재료였다. 하지만 브로마네스가 자신의 검집에 굳이 수정판을 붙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통신용이었던 것이다.
“흐흐, 아르티어스 나와라.”
잠시 후, 아르티어스의 모습이 수정판에 나타났다. 시큰둥한 얼굴만 봐도 현재 그의 심기가 어떠한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바쁘냐?”
“젠장, 지금 이동 중이다. 일거리가 생겼거든.”
“일거리? 어떤 건데?”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다는 듯한숨을 길게 내쉬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에효~ 고블린 잡으러 간다.”
“고블린? 그걸 왜 네가 잡으러 가?”
“호비트 놈들이 고블린을 잡는 데 얼마나 등신 짓을 하는지 너도 잘 알잖아. 1개 중대가 몇 달씩이나 매달려서 아등바등하고 있는 게 짜증나서 내가 한 방에 처리를 해 줬지. 그게 실수였어. 요즘은 고블린 의뢰만 들어왔다 하면 나보고 가란다, 젠장!”
수정판에 비친 아르티어스가 말을 하면서도 가끔씩 주위를 둘러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걸 보면 주위에 용병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대충 핑계 대고 잠깐 빠져나와. 오랜만에 한잔하자.”
그때 브로마네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아르티어스가 갑자기 인상을 확 찌푸리며 으르렁거렸다.
“그나저나 너 얼굴 꼴이 왜 그 모양이야? 설마 사고 친 건 아니겠지?”
브로마네스는 거만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면서도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그럴 리가 있나, 친구. 이건 사고 친 흔적이 아니라, 나의 용맹을 세상에 널리 알린 명백한 증거라네.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적진을 뚫고 들어가 적장의 목을 날려 버렸거든. 이걸 보게.”
브로마네스는 자신이 입고 있는 번쩍거리는 흉갑을 가리키며 짐짓 짜증 어린 말투로 투덜거렸다.
“연대장씩이나 된다는 놈이 겨우 이런 허접한 갑옷이나 입고 있다니…….”
하지만 브로마네스의 말과 달리 수정판에 비친 것은 아주 훌륭한 갑옷이었다. 그 순간 아르티어스는 깨달았다. 이놈이 왜 자신에게 연락을 한 것인지를.
자랑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이다.
순간 아르티어스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도저히 억제할 수가 없었다.
“이런 망할 녀석! 제발 얌전히 찌그러져 있으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쨔샤, 한눈에 척 봐도 엄청 비싸 보이는 갑옷을 너 같은 소대장이 입는다는 게 말이 돼! 그리고 왜 혼자서 미친놈처럼 적진에 뛰어들어? 아주 네 정체가 드래곤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싶은 게냐? 그러다 재수없게 흰둥이 놈들이 눈치라도 채면 어쩌려고 그래!”
브로마네스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크크크, 너 지금 배가 아파서 그러는 거지? 넌 겨우 고블린이나 잡으러 다니고 있는데, 난 연대장을 죽이고 그놈이 입던 갑옷을 노획했다고 하니까 말이야.”
돌대가리도 이런 돌대가리가 없었다. 아르티어스는 얼굴을 왈칵 일그러트리며 곧바로 노성을 터뜨렸다.
“이 빌어먹을 놈! 그딴 갑옷 때문에 연대장을 잡은 거야? 그럼 아예 본체로 현신해서 브레스라도 몇 방 내뿜지 그랬냐? 도대체 네 대가리에는 뭐가 들어 있는 거야? 그리고 우리가 뭣 때문에 이 짓을 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봐.”
“…….”
“좋게 말할 때 허름한 갑옷으로 바꿔 입어. 지금 네놈이 가지고 있는 검도 평범한 철검으로 바꾸라고 하기 전에! 알겠어? 만약 네놈 때문에 흰둥이들에게 들키기만 해 봐! 그때는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정판 위의 아르티어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르티어스가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어 버린 것이다. 꽤나 신경질적인 반응에 브로마네스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었다.
“킥킥킥. 짜식, 간뎅이가 저리 콩알만 해서 뭔 일을 같이 하누?”
용병단을 꿀꺽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공을 세워 지휘부로 진급해야 할 게 아닌가. 그걸 잘 알고 있을 아르티어스가 저렇게 화를 내는 건 브로마네스는 전장을 휘저으며 활약하는데, 자신은 고블린이나 잡으러 다니고 있으니 배가 아파 그런 것이 분명했다.
브로마네스는 피와 땀으로 얼룩진 자신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쓱 훑었다. 그와 동시에 드러나는 뽀송뽀송한 피부. 그 위로 찰랑거리는 길고 아름다운 금발이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아르티어스에게 자랑을 했으니 더 이상 더러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기에 청결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자, 일단 시원한 맥주나 한잔하러 가야겠군. 이렇게 더운 날씨에는 지하실에서 갓 꺼낸 차가운 맥주가 최고지!”
브로마네스는 콧노래를 부르며 주변에 있는 도시를 향해 공간이동했다. 고블린을 잡겠답시고 땀을 뻘뻘 흘리며 개고생을 할 아르티어스를 생각하면 맥주는 한층 더 시원하고 맛있으리라.
어둠 속의 기습
라이는 바보가 아니다. 아니, 일반적인 잣대로 평가한다면 아주 눈치가 빠른 편에 속했다. 하지만 그는 우직하고 순진하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래야만 감시의 눈길을 조금이라도 적게 받게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으니까.
요즘 들어 라이는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왠지 소대원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대놓고 따돌리는 건 아니었지만, 고참병들끼리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수군거리다 자신이 근처에만 가면 대화를 멈추고 딴청을 부리기 일쑤였다.
노골적으로 따돌리는 것도 아니었고, 게다가 소대에서 막내였기에 뭐라 불만을 토로하기도 그랬지만, 그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기분은 아주 더러웠다. 더군다나 그 고참병들 중에는 지금까지 믿고 의지해 왔던 하리스까지 끼어 있다는 게 그의 기분을 더욱 착잡하게 만들었다.
고참병들이 자신에게 뭔가 애써 숨기려 하는 것을 눈치 빠른 라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얼마 전에 적군이 ‘본대가 전멸했으니 어서 항복하라’며 떠들어대던 소리를 그도 직접 들었으니까. 그리고 그 후에 돌아가기 시작한 부대의 어색한 움직임. 그것만으로도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는 충분했다.
하지만 라이는 내심을 숨기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행동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가장 친하게 지냈던 하리스에게조차도…….
대원들이 자신에게 그런 중요한 사실을 숨기고 있는 그 저의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