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 오늘은 여기에서 야영한다!”
누군가의 외침 소리에 모두들 가던 길을 멈추고 야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라이는 재빨리 솥단지부터 걸었다. 하루 중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는 건 저녁뿐이다.
아침에는 날이 밝는 대로 출발하기 바빴기에 식사 준비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점심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빡세게 강행군을 하다 보니 모두들 걸으면서 딱딱한 비스킷 조각이나 육포 같은 건량을 물과 함께 씹어 먹으며 허기를 때워야 했다.
하루나 이틀 정도만 이동하면 마을에 도착할 수 있어서 필요한 물품들을 그때그때 보충할 수 있었던 평상시와 달리, 지금은 엄청난 장거리를 이동하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 준비해 뒀던 부드럽고 맛있는 음식물이 떨어진 것은 오래전이었다. 보관성이 형편없는 것은 둘째 치고, 부피가 너무 커서 많이 준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맛있는 식량이 떨어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딱딱한 건조 식량에 의존해야 했다. 이때 애용되는 게 잡화점에서 여행객들을 위해 판매하는 비스킷이다. 바짝 마른 것이 꼭 돌덩이처럼 딱딱했지만, 보관성 하나는 끝내줬기 때문이다. 1년을 처박아 둬도 괜찮을 정도다. 하지만 맛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살기 위해서 먹는다는 표현이 딱 맞는 음식이었다. 너무 딱딱해서 이빨로 씹을 수조차도 없어 침으로 살살 녹여 먹어야 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겨우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순간이니 라이로서는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물이 있는 곳 근처에 야영하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행군을 멈춘 곳 근처에는 냇물이 없었다.
그렇다고 식사 준비를 못하는 건 아니다. 라이는 먼저 자신의 물통에 들어 있는 물을 1/3 정도 솥 안에 따른 뒤, 불을 피울 나뭇가지들을 주우러 주위를 돌아다녔다.
라이가 나뭇가지를 한 아름 주워 들고 돌아왔을 때, 하리스는 불을 피워 물을 끓이고 있는 중이었다. 라이는 주워 온 나뭇가지들을 불 옆에 쌓아 둔 뒤 그중 몇 개를 불 속에 집어넣었다.
솥 옆에는 소대원들이 꺼내 둔 음식 재료들이 놓여 있었다. 육포, 소시지, 햄 등 여러 가지였는데, 그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건 비스킷 덩어리였다. 라이는 그것들을 끓는 물속에 집어넣었다. 대원들이 음식 재료들을 놔두고 가면서, 각자 개인 수통 속의 물도 솥에 조금씩 넣었기에 물의 양은 넉넉했다.
딱딱했던 음식 재료들이 끓는 물속에서 부드럽게 풀어지며 제법 먹을 만한 먹거리로 변해갔다. 라이는 소금을 넣어 간을 맞춘 뒤 조금 더 기다렸다.
구수한 음식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자, 소대원들은 각자의 식기를 들고 솥 근처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모두들 배가 고팠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어둠이 짙게 깔리더니 어느덧 모닥불 주위만 따스한 온기와 빛을 흘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라이가 건넨 죽을 받기 위해 식기를 내밀던 젠슨의 가슴에 화살촉이 삐죽 솟아올랐다. 등에 맞은 화살이 젠슨의 몸을 꿰뚫고 가슴으로 비집고 나온 것이다. 핏방울이 라이에게까지 튀어 그의 얼굴 여기저기에 붉은 점을 만들었다.
“으헉!”
바로 코앞에서 일어난 갑작스런 사태에 라이는 기절초풍할 듯 놀랐다. 지금껏 이런 경우를 당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죽음에 대한 공포로 머릿속이 하얗게 텅 비어 버렸다.
단 하나 느낄 수 있었던 건, 비릿한 피비린내만이 그의 후각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뿐.
이때, 라이의 머리통을 억지로 땅바닥에 처박아 엎드리게 만든 사람이 있었다.
“이 멍청한 녀석! 죽고 싶어? 멍청하게 서 있으면 어떻게 해!”
하리스였다. 하리스는 라이를 땅바닥에 패대기쳐 버린 다음, 자신도 납작 엎드렸다. 그런 뒤 발로 모닥불을 향해 흙을 밀어 넣었다. 어느새 주위에 있던 대원들 역시 땅바닥에 엎드린 채 모닥불을 향해 발로 흙을 밀어 넣고 있었다.
라이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쯤에는 이미 모닥불은 꺼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살 공격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아직 모닥불을 제대로 끄지 못한 곳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빨리 불을 끄라는 악쓰는 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이 연신 터져 나왔다. 급한 마음에 불 위로 올라가 발로 짓밟다가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사람, 환한 모닥불 근처를 벗어나겠다고 일어나 어두운 곳으로 달려가다 쓰러지는 사람……. 순식간에 사방에서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도대체 어디에서 쏘는 거야?”
론도 소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교들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몇몇 고참병들은 이미 무장을 챙긴 뒤 화살이 날아오는 곳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밤이 깊어 워낙 어두운 탓에 대략적인 방향만 짐작할 뿐, 어딘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모라이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원들이 쓰러지는 방향을 봐서는 서쪽인 것 같습니다.”
“적의 숫자는 어느 정도 되는 것 같나?”
“몇 명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첫 공격에 4명 정도가 동시에 쓰러진 것 같았는데…, 그걸 보면 적은 최소 4명 이상이고 많아 봐야 10명 이내인 것 같습니다.”
이런 갑작스런 상황에서도 그런 미세한 부분까지 파악해 적 병력의 수를 짐작해 낸다는 건 정말이지 대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라이처럼 실전 경험이 떨어지는 대원들은 모두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으니까.
어둠 속을 환히 밝히던 모닥불의 숫자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었다. 이윽고 모든 모닥불들이 다 꺼져 버리자 주위는 짙은 어둠에 잠겨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극심했던 혼란도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더 이상 화살이 날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처박고 있던 라이는 누군가가 자신의 등을 툭툭 치는 걸 느꼈다. 그리고 곧이어 들려오는 믿음직스런 목소리, 하리스였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이젠 일어나도 돼.”
그 말에도 라이가 살짝 고개만 치켜들고 일어서지 않자 하리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안심하고 일어서도 돼. 이런 어둠 속에서는 사격이 불가능하거든.”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니 모닥불이 꺼졌음에도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았다. 하늘에 달 하나가 떠올라 있어 어렴풋한 빛을 비춰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거리에서 목표를 겨냥하여 사격을 가하기에는 빛이 너무 부족했다.
이때, 라이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시커먼 그림자. 모라이어스였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자 하리스가 웃으며 말했다.
“녀석들을 잡으러 가는 거야.”
“모라이어스 혼자서요? 아무리 그가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이런 어둠 속에서 혼자 어떻게……?”
“누가 혼자 간다고 하든? 모라이어스만이 아니라 다른 소대에 배속되어 있는 저격수들도 모두 다 저 사냥에 동참하고 있을 걸.”
“아, 그렇구나.”
“잔말 말고 너는 배식 준비나 해. 배고파 죽겠다. 개새끼들!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모처럼 따끈한 음식 좀 먹으려니 화살을 퍼붓고 지랄이야.”
라이가 흙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솥을 바로 세우고 있는 동안 하리스는 옆의 동료들과 함께 젠슨의 시체를 멀찌감치 치우고 돌아왔다. 하리스가 일찍 불을 끈 덕분에 분대 내에 더 이상의 사상자는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체를 치우고 돌아온 하리스가 라이를 향해 말했다.
“자, 밥이나 먹자. 한 그릇 듬뿍 퍼 봐라.”
그런 하리스를 향해 라이가 풀이 죽은 어조로 말했다.
“별로 먹을 게 남아 있지 않아요.”
“그게 무슨 말이냐?”
라이는 솥이 엎어져 음식이 절반 이상 쏟아져 버렸다는 것을 설명했다. 아마 하리스를 비롯한 몇몇 대원들이 불을 끈다며 정신없이 발로 흙을 차 넣을 때 솥까지 함게 차 버린 것이리라.
하리스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젠장, 할 수 없지.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게 조금씩 나눠 봐.”
“모두들 그릇 내놓으세요. 양이 그다지 많지 않아 넉넉하게는 못 드립니다.”
각자의 그릇에 조금씩 덜어 준 다음, 라이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배가 등가죽에 붙을 정도로 배가 고팠던 라이는 스프를 한숫가락 듬뿍 퍼서 입에 밀어 넣었다.
우드득!
흙을 차는 와중에 솥 안에까지 흙이 들어간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아까운 음식을 버릴 수는 없었다. 적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모닥불을 다시 피울 수도 없는 데다가, 무엇보다 지금 배가 너무 고팠으니까.
돌덩이처럼 딱딱한 비스킷을 씹어 먹느니, 흙을 골라내며 먹는 게 훨씬 나았다. 다른 대원들도 돌을 씹었는지 여기저기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무도 먹는 걸 멈추지는 않았다.
이런 음식조차 건지지 못한 주변의 다른 소대원들은 부러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귀에는 우두둑 거리는 소리 따위는 전혀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쩝쩝 거리며 먹는 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구수한 음식 냄새! 모두들 말은 안 했지만, 먹고 싶어 환장할 지경이었으리라.
정신없이 곯아떨어져 자고 있던 라이는 누군가가 자신을 툭툭 치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뜨려고 애썼다.
‘벌써 아침이 됐나?’
억지로 눈을 떠보니 아직 주위가 시커먼 어둠에 잠겨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라이는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자신을 깨운 게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라이는 다시 자리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나 오늘 불침번 아니에요.”
“그건 나도 알아, 새꺄. 빨리 일어나! 매복하러 가야 해.”
하리스의 목소리였다. 라이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요 며칠 동안 강행군을 한 탓인지, 그의 몸은 흡사 쇳덩이라도 매달아 놓은 것처럼 무겁게만 느껴졌다.
“매복이라니요?”
“이 근처에 자리 잡고 매복하라는 대대장님의 명령이란다. 시간이 없어. 빨리 짐 챙겨.”
다른 부대원들이 잠에서 깨기도 전에 올란도의 중대는 적당한 자리를 골라 매복에 들어갔다.
하리스가 라이를 이끌고 자리를 잡은 곳은 커다란 나무 아래였다. 울창한 나뭇가지로 인해 달빛이 가로막혀서인지 나무 아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하리스는 뒷편 덤풀 속에 말들을 묶어 놓은 후, 나무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라이도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놈들이 또 올까요?”
라이는 긴장된 어조로 물었지만 하리스는 태평스럽기 그지없었다.
“우리가 잔뜩 독이 올라 있다는 걸 뻔히 알 텐데, 너 같으면 또 오겠냐?”
그래도 긴장감에 라이가 주위를 열심히 살피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 드르릉 거리는 코 고는 소리가 옆 자리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본대를 습격하려는 적이 나타나면 즉시 공격하라는 대대장의 명령을 받고 이곳에 은밀히 매복 중인데, 느닷없이 코 고는 소리라니. 라이로서는 하리스의 저 엄청난 간뎅이에 할 말을 잊을 정도였다.
라이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하리스를 흔들어 깨웠다.
“무슨 일이냐?”
“적이 나타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하리스는 짜증 어린 말투로 대꾸했다.
“아, 짜식.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날이 밝기 시작하면 본대가 후퇴할 거야. 적들이 움직이는 건 그 이후가 되겠지. 그러니 그동안만이라도 너도 좀 자 둬.”
또다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뒤로 돌아눕는 모양이다.
하리스의 말이 옳다는 것은 알겠지만, 라이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저 어둠 속 어딘가에서 금방이라도 적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어제 놈들이 쏴 댄 화살에 얼마나 많은 동료들이 목숨을 잃었던가. 게다가 젠슨은 그의 코앞에서 화살에 맞아 죽기까지 했다.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방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 같은데, 잠을 자라니. 그건 너무 무리한 주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