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바짝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자신도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흠칫하며 라이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주위가 훤하게 밝아 있었다. 저 아래쪽에 보이는 본대 대원들은 야영 장비를 걷고 한창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라이는 하리스를 흔들어 깨웠다.
“선배, 일어나세요.”
“음냐…, 또 뭐야?”
“본대가 곧 철수할 것 같습니다. 그럼 곧 적들이 습격해 올 거잖아요?”
하지만 하리스는 귀찮다는 듯 등을 돌려 누우며 투덜거렸다.
“상대는 페가수스 용병단의 레인저들이야. 이런 어설픈 매복에 걸려들 거라고 생각하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너도 좀 더 자 둬. 1시간 후에는 출발할 거니까.”
라이는 하리스가 입고 있는 양털로 짠 두꺼운 청회색 로브 자락이 아주 따뜻하게 보였다. 저걸로 몸을 감싸고 자면, 마치 방에서 자는 것처럼 푹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다시 하리스의 코 고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돌아누운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다니, 청회색 로브가 엄청 포근한 모양이라고 라이는 생각했다.
그런 하리스를 보다 보니 자신의 눈꺼풀도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어제 하루 종일 강행군을 한 데다가, 오밤중에 일어나 매복을 한답시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라이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으하아아암~.”
밀려오는 졸음에 하품을 하며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던 순간, 라이의 머릿속을 번쩍하고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지금이야말로 용병단에서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가장 껄끄러운 존재였던 모라이어스는 어젯밤 적을 사냥한답시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감시하던 올란도도 어딘가로 떠나 버린 상태.
평상시라면 탈영병이 생겼을 때 그놈을 잡기 위해 모두들 혈안이 되어 주변을 샅샅이 뒤지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기습 작전은 실패했고, 본대마저 전멸했다고 하니 최대한 빨리 후퇴하여 아군과 합류해야만 한다. 게다가 적의 레인저들이 암암리에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두 명이 사라진다 한들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설혹 탈영했다는 것을 알게 돼도, 그 한 명을 잡겠다고 주위를 수색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라이는 곁눈질로 살그머니 하리스를 훔쳐봤다. 아무리 봐도 잠자는 척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드르렁거리며 연신 코를 고는 것이 진짜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 보였다.
‘이대로 도망칠까?’
하지만 곧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은 소음에도 하리스가 금방 잠에서 깬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덤불 속에 매어 놓은 말을 끌고 나오는 기척을 그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동안 자신을 아껴 줬던 선배였지만, 그냥 이대로 놔두고 갈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라이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미안하긴 하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라이는 엉덩이를 땅에 붙인 채, 슬금슬금 하리스와의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꼭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다. 라이는 침을 꿀떡 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도 기분 탓인 모양이다. 그 어떤 인기척도 발견할 수가 없었으니까.
하리스에게 바싹 다가선 라이는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며 망설였다. 이대로 탈출을 실행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이 최고의 기회였다.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라이는 하리스의 몸을 살며시 건드리며 걱정스럽다는 어투로 나직하게 말했다.
“선배, 이왕 자려면 투구라도 벗고 주무세요. 그렇게 불편하게 자면 목이 뻐근해지잖아요.”
꿈틀하기는 했지만, 하리스는 더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금 잠에 빠져든 모양이다. 라이는 하리스의 투구를 살며시 위로 잡아당겼다. 턱 끈을 매지도 않은 상태인 데다, 하리스가 잠결에 고개를 위로 들어 줘 투구를 쉽게 벗길 수 있었다.
하리스의 뒤통수가 무방비 상태로 드러났다.
‘미안합니다, 선배.’
주변에 있던 커다란 돌덩어리 하나를 집어 들자마자 힘차게 휘둘렀다. 망설이면 도저히 선배의 뒤통수를 찍을 수 없을 것만 같았기에.
퍽!
하리스는 끽 소리도 내지 못하고 쭉 뻗어 버렸다.
‘설마 죽지는 않았겠지?’
급히 하리스의 코에 귀를 대보자, 쌕쌕 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리스의 뒤통수를 돌로 찍어 버린 이상, 이제 탈출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무 뒤편 덤불 안으로 들어가자 숨겨 놓은 말들이 투레질을 하며 라이를 반겼다.
라이는 재빨리 말들을 다독이며 속삭였다.
“워, 워, 조용히 해.”
라이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아무도 이쪽에서 벌어진 변고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자신의 말을 이끌고 막 도망치려던 라이의 눈에 하리스의 말안장에 매달려 있는 활과 화살이 보였다. 라이는 즉시 그걸 챙겨 자신의 말안장에 매달았다. 도망칠 때 가장 유용한 무기가 바로 활이었으니까. 그리고 말안장에 매달려 있는 불룩한 주머니도 챙겨 넣었다. 그것은 바로 하리스의 식량 주머니였다.
도망칠 준비가 끝나자 라이는 말을 끌고 조용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대대원들이 이동하는 곳의 반대 방향을 향해서…….
매복해 있던 장소에서 충분히 벗어났다고 판단한 순간, 라이는 번개처럼 말 등에 올라탔다.
“끼럇! 핫!”
라이의 채찍질에 말은 미친 듯이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라이는 재빨리 등 뒤를 살펴봤다. 다행히도 뒤따라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입가에서 자신도 모르게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 곧이어 그 웃음은 입가가 찢어질 만큼 커다랗게 터져 나왔다.
“크하하핫!!”
드디어 지옥 같은 곳에서 탈출했다. 이젠 자유다!
아직 고향땅에 도착하지도 않았지만, 라이는 탈출했다는 기쁨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 * *
‘꿀꺽!’
너무 긴장한 탓일까? 제2소대 저격수 아스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어딘가에 적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행동은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아스탄은 나름 자신이 붉은 전갈 용병단에서 손꼽히는 레인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적이 페가수스 용병단 소속의 레인저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조금씩 자신감이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냥 돌아가는 게 좋을까? 아니면 괜찮은 자리를 골라, 매복을 하는 게 좋을까?’
아스탄이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아직까지도 적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의 기습을 받자마자 재빨리 숲 속으로 스며든 이후, 밤새도록 주위를 샅샅이 수색하고 있었지만 적의 흔적을 찾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이 이상 혼자 숲 속을 뒤지는 건 위험해. 이럴 줄 알았으면 모라이어스 녀석과 함께 보조를 맞추는 거였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숲을 뒤졌는데도 적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적이 어딘가에 매복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계속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다. 자신도 모르게 적의 사거리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곧바로 사망이니까.
이때였다. 그의 눈에 뭔가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낙엽이 떨어져 있는 모양이 조금 이상했던 것이다. 마치 뭔가에 밀쳐진 듯한……. 그는 낙엽 사이를 헤쳐 그 아래쪽을 확인했다. 긴장감 가득하던 그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어린다. 드디어 꼬리를 잡은 것이다.
‘한 명이군. 이리로 갔나?’
발걸음에 눌린 이끼가 아직 원상태로 복구되지 않은 걸로 봐서 지나간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은 듯했다.
적의 숫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놈들을 먼저 찾아낼 수만 있다면, 붉은 전갈 용병단이 페가수스 용병단에 비해 실력이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놈들에게 뼈저리게 알려 줄 수 있으리라. 레인저들끼리의 싸움에 있어서 먼저 본 쪽이 이긴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였으니까.
아스탄은 미세하게 남아 있는 흔적들을 하나하나 찾아내며 추적을 시작했다. 물론 주변을 샅샅이 살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살금살금 이동하던 그의 눈에 또 다른 흔적이 눈에 띄었다. 그는 재빨리 쭈그리고 앉아 그 흔적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읽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모든 오감이 흔적을 읽는 것에 집중된 그 순간, 어딘가에서 슛-!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아스탄은 가슴을 찢는 듯한 무시무시한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터뜨려야만 했다.
“크윽!”
이미 적이 쏜 화살이 가죽갑옷을 꿰뚫고 들어와 심장에 구멍을 뚫어 버린 상태. 혹 주변에 있을지도 모를 동료들을 향해 경고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이미 비명을 지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빌어먹을! 어쩐지 너무 쉽게 꼬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더니…….’
그 순간, 저 멀리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듯 수풀이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정말 용의주도한 놈이었다. 한 발 쏜 다음 곧바로 위치를 바꾸고 있는 것을 보면, 놈은 주변에 혹시 있을지도 모를 또 다른 적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페가수스 용병단의 명성이 거저 만들어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아스탄은 점차 시야가 검게 물들어 가는 것을 느끼며 숨을 거두었다.
페가수스 용병단의 레인저는 적병을 사살하자마자 왼손에 활과 함께 잡고 있던 두 번째 화살을 재빨리 장전했다. 정찰조의 경우 2명이 한 조를 이뤄 움직인다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다. 그런 만큼 적의 동료가 공격해 올 것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쪽 어딘가에 숨어 있을 놈의 동료는 화살이 날아온 곳을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으리라. 활시위를 팽팽히 당긴 자세로 적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훑어봤지만, 맥 빠지게도 그 어떤 움직임조차 찾아낼 수가 없었다.
‘설마…, 저놈 혼자 온 건가?’
그는 애써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심은 곧 죽음! 저쪽 어딘가에 적병이 숨어 있다고 가정하는 게 옳다. 이런 조심성 덕분에 그가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는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뒤 살금살금 기어 또다시 자리를 옮겼다. 방금 전에 그가 숨어들었던 장소는 최초 사격 지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너무 오랫동안 머무르는 것은 위험하다. 이럴 땐 위치를 옮기는 게 안전하다고 봐야 했다.
자리를 옮긴 후, 그는 주변을 다시금 세밀히 관찰했다.
‘아주 조심성이 많은 놈이야. 보통 동료가 죽는 그 순간에 움직였을 텐데…….’
만약 그랬다면 놈의 존재는 물론이고 그 위치까지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적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