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3화 (779/930)

‘혹시 저놈 혼자 온 게 아니었을까?’

있지도 않은 적을 있다고 오판하며 자신이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30여분 정도가 지난 후였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킨 것은 그로부터 또다시 30분 정도가 지난 후였다. 동료들과 합류하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괜히 있지도 않은 적을 찾는답시고 한 시간씩이나 숨죽이며 긴장했던 사실이 너무나도 억울했다. 차라리 적을 잡은 뒤 곧바로 또 다른 자리로 이동했더라면, 한 놈 더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젠장! 숲 속에서 움직일 때는 반드시 두 명이 1개 조로 움직인다는 기본 중의 기본조차 모르는 놈이 있었을 줄이야. 그러면서 어떻게 레인저가 될 수 있었지?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그러니까 네놈들이 삼류 용병단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거야.”

본대에서 출발할 때, 아스탄과 모라이어스는 따로 움직였다. 그러다가 새벽녘쯤에 모라이어스가 먼저 아스탄을 발견했다.

아마 아스탄이 모라이어스를 먼저 발견했다면 손이라도 흔들며 아는 척을 했겠지만, 모라이어스는 그런 성격의 사내가 아니었다. 대원들이 그를 왜 ‘새침데기’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겠는가.

주위가 밝아 오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숲 속을 혼자 돌아다니는 짓은 거의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특히 지금처럼 적들의 실력이 더 뛰어날지도 모르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모라이어스였기에 아스탄의 뒤를 몰래 뒤따르며 그를 호위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상대가 아무리 페가수스 용병단원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눈을 절대로 속이지 못할 것이라고. 적이 아스탄을 노리고 움직이는 그 순간이 바로 저승길로 직행하는 지름길일 것이라고 자신했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적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전혀 파악하지도 못했는데, 아스탄이 목숨을 잃는 모습을 봐야만 했으니까.

아스탄을 향해 화살이 날아왔을 때, 모라이어스는 그 화살의 궤적을 추적하여 적이 숨어 있는 곳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곳을 향해 화살을 날릴 뻔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전장에서 다져진 그의 본능이 경고를 발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놈은 처음부터 상대가 둘이라는 가정 하에 움직이고 있었다. 아스탄을 향해 화살을 쏘자마자 재빨리 자리를 옮긴 게 바로 그 증거다. 그리고 자리를 옮기는 시간을 이용하여 두 번째 화살을 장전한 다음, 방금 전 자신이 숨어 있던 곳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적을 찾아내어 그곳을 향해 화살을 날리려고 했다.

아마 모라이어스가 적을 향해 화살을 쐈다면 놈의 수법에 걸려들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렸으리라.

‘젠장, 정말 잘 훈련받은 놈이로군.’

모든 행동이 물 흐르듯 매끄러웠고 거침이 없었다. 곧이어 적은 모라이어스의 시야에서 그 모습을 감췄다. 물론 어딘가로 가 버린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저쪽 어딘가에 은신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직까지도 적이 있다고 생각하며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정말 조심성이 많은 놈이야. 내가 만약 저놈이었다면 30분씩이나 기다려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면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일어나 버렸을 텐데……. 저걸 보면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그로부터 모라이어스와 적과의 치열한 심리 싸움이 이어졌다. 하지만 모라이어스는 이 싸움에서 자신이 이길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적은 자신의 존재를 모르고 있지만, 그는 적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까.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놈은 죽은 목숨이었다.

10분, 20분……. 지루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동안 모라이어스의 머릿속은 갖가지 돌발 변수와 대처 방안으로 복잡하게 얽혀 갔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지금 저놈을 죽일 것이 아니라, 놈의 뒤를 추적해 적의 본거지를 알아내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저놈은 물론이고, 놈의 동료들까지 몽땅 다 죽여 버리자. 그게 한 놈을 죽이고, 또 다른 적을 찾아 하염없이 숲 속을 헤매는 것보다 더 나으리라. 적들을 확실히 제거해야 철수를 하는 동안 뒤통수가 간지럽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때였다. 덤불 밑 어두운 곳에서 한 사내가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주위를 둘러보다 서둘러 자리를 옮기는 것이 보였다. 결국 적과의 인내력 싸움에서 그가 이긴 것이다. 적의 뒤통수가 빤히 시야에 들어왔지만 모라이어스는 놈을 향해 화살을 날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은밀하게 그 뒤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불완전한 각성

사내가 접선 지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동료들이 모여 있었다. 있지도 않은 적을 상대로 씨름을 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것이다. 동료들 중에서 가장 먼저 사내의 접근을 눈치챈 털보가 짜증스런 말투로 말했다.

“랜달! 왜 이렇게 늦었어?”

하지만 말투와는 달리 털보의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랜달은 알고 있었다. 그가 오지 않자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쩝, 뭐 어쩌다 보니…….”

그때 털보 옆에 앉아 육포를 우물거리고 있던 길게 찢어진 눈매의 사내가 물었다.

“그쪽으로는 몇 명이나 왔어?”

“한 놈. 워낙 조심성이 많은 놈이라 겨우 잡았어.”

랜달은 있지도 않은 적을 경계하느라 늦었다고 말하기엔 너무 창피했기에 적당히 둘러댔다.

“그래? 나도 한 명인데…….”

길게 찢어진 눈매의 사내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털보가 자랑스럽다는 듯 끼어들었다.

“흐흐, 나는 두 놈 잡았지. 내가 제일 많이 잡았구먼.”

하지만 길게 찢어진 눈매의 사내는 별 같잖은 소리를 한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깟 삼류 쓰레기 몇 놈 죽인 게 뭐가 그렇게 자랑이라고. 나처럼 하나를 잡아도 생포를 하는 게 어렵지.”

그 말에 랜달은 믿기 힘들다는 듯 길게 찢어진 눈매의 사내에게 물었다.

“생포라고? 헤먼, 그렇다면 저놈 아직 살아 있는 거야?”

랜달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갑옷이 벗겨진 사내 하나가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헤먼의 말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걸 시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랜달의 질문에 헤먼은 묘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진행될 일이 무척 기대가 된다는 듯.

“죽었다면 내가 왜 힘들게 저놈을 여기까지 끌고 왔겠어? 잡을 때 말에서 떨어져 충격을 심하게 받긴 했지만, 목이 부러진 건 아니니 기다리다 보면 깨어나겠지.”

헤먼은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용병패와 용병수첩, 그리고 약간의 푼돈이었다. 물론 그것은 헤먼의 것이 아니었다.

“저놈의 이름은 라이, 나이는 어리지만 벌써 6급 용병이야. 꽤 똘똘한 놈 같으니 족쳐 보면 제법 쏠쏠한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을지도 몰라.”

“다른 건 몰라도, 본대가 어떻게 된 건지 그것만이라도 알아냈으면 좋겠군.”

이때, 랜달은 죽은 듯 쓰러져 있던 포로의 머리가 살그머니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놈은 기절해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탈출할 기회를 노리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이 상황에서도 저렇게 침착하게 움직이고 있는 걸 보면 나이에 비해서는 제법 경험이 많은 놈이라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쓸 만한 정보를 약간은 캐낼 수 있을지도…….

랜달은 피식 웃으며 옆에 앉아 있던 털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놈 깨어 있는데?”

“정말이야?”

“머리통 움직이는 거 내가 분명히 봤어.”

랜달의 말에 털보는 심심한데 잘됐다는 듯 포로에게 다가갔다. 발로 밀어, 엎어져 있던 포로의 몸을 바로 눕혔다. 포로는 시체처럼 축 늘어진 채 굴러갔다. 6급 용병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앳된 얼굴이다.

“호오, 어린놈이 아주 능청스럽구만. 이렇게 기절한 척하고 있으면, 우리가 모를 줄 알았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자세히 살펴봤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다. 만약 랜달의 말이 아니었다면 아직까지 기절해 있는 줄로 착각했을 것이다.

털보는 히죽 웃더니 포로의 코를 꾹꾹 누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얌마, 깼지? 깬 거 다 알어. 얼라, 그래도 기절한 척하네. 이놈 아주 음흉스런 놈이잖아.”

“…….”

“흠, 랜달이 잘못 본 걸까? 에이, 귀찮긴 하지만 깼는지 아닌지 한번 알아보지 뭐. 발바닥을 모닥불로 지지면…….”

털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포로는 살짝 눈을 뜨고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신음성을 흘렸다. 이제 막 깨어났다는 듯…….

“으흐흐음.”

그걸 보자 털보는 가소롭다는 듯 입가를 이죽거렸다.

“흠, 아직 정신이 혼미한 거 같은데 이래서야 뭘 물어보기도 힘들잖아. 역시 모닥불로 발바닥을 지지는 게…….”

순간 라이는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뜬 뒤 소리쳤다.

“불로 지지실 필요 없어요. 깼어요. 완전히 깼다구요.”

털보는 라이의 머리통을 툭 친 뒤 동료들을 향해 외쳤다.

“헤먼! 이 녀석 깼어!”

모두들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털보의 위협이 있기 전까지 꿈쩍도 안 하고 주위를 살핀 걸 보면 아주 능청스런 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협박 몇 마디에 기겁을 해서는 눈을 번쩍 뜨다니. 그걸 보면 간뎅이는 아주 작은 놈이라고 봐야 했다.

‘젠장, 안 불겠다고 좀 버텨야 고문할 맛이 날 텐데, 이건 뭐 살짝만 위협해도 술술 불게 생겼단 말이지. 재미없게 말이야.’

헤먼은 털보를 옆으로 밀치고는 라이 앞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을 심문해 봤던 헤먼이다. 그렇다고 그가 고문 기술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길게 찢어진 눈매와 날카로운 매부리코, 거기에다가 얼굴을 가로질러 길게 이어져 있는 상흔까지. 그의 얼굴은 어딘지 독살스러운 맹금류를 연상시켰다. 그래서인지 그가 약간만 인상을 써도 포로들이 지레 겁을 먹고 술술 다 불었던 것이다.

라이를 바라보고 있는 헤먼이 미소를 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봤을 때는 저승에서 막 기어 올라온 마귀와도 같은 음산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당연히 이런 헤먼의 독살스러운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라이는 이미 잔뜩 주눅이 들어 버린 상태다.

“재수가 정말 좋군. 낙마(落馬)했을 때의 충격이 너무 커서, 그냥 죽어 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말이야.”

“다, 당신들은 누구죠? 뭐, 뭣 때문에 나를 이렇게…….”

“그건 알 필요 없고, 너는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돼.”

“그, 그럼 절 살려 주실 겁니까?”

헤먼은 포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짐짓 푸근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그게 라이의 눈에는 살기 어린 음산한 표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지만.

“당연하지. 성실하게 협조를 해 준다면 우리가 자네를 왜 죽이겠나. 안 그런가?”

“대체 뭘 알고 싶으십니까?”

“자네의 이름과 소속 부대는?”

“제 이름은 라이라고 합니다. 성은 없구요. 그리고 제가 소속된 부대는 붉은 전갈 용병단의 제7독립대대 휘하의 1중대, 3소대입니다.”

그밖에도 라이는 헤먼이 묻는 말에 자신이 아는 한 상세하게 대답했다. 중대장인 올란도가 홀로 방벽 너머의 적들을 헤치운 것까지도.

인상도 험악한 사내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을 담량도 없었을 뿐더러, 그깟 붉은 전갈 용병단에 대한 정보 따위야 라이에게는 손톱만큼도 감출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라이에게는 속셈이 따로 있었다. 그건 지금껏 그가 해 왔던 것처럼 최대한 협조하는 척하며 상대를 안심시킨 후, 상대가 방심하고 있을 때 탈출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 솔직하게 주저하지 않고 대답해 준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줄은 라이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알고 싶다는 건 다 말해 줬건만, 자신을 심문하고 있던 사내의 인상은 점점 더 일그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 동안 질문을 던지던 헤먼이 갑자기 짜증스럽다는 듯 외쳤다.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 순진하고 어리숙한 척하더니, 알고 보니 뱃속에 능구렁이가 대여섯 마리는 들어앉아 있는 놈이잖아.”

옆에 서 있던 랜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 내가 눈치채기 전까지만 해도, 죽은 척하고 누워서 눈치만 살살 보던 놈이잖아.”

“쥐새끼 같은 놈. 이런 놈은 처음부터 반쯤 죽여 놓고 시작하는 거였는데……. 시간 낭비만 했네! 이봐, 몽둥이 하나 가져와 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내들이 내뱉는 험악한 소리에 라이의 얼굴색은 빠른 속도로 새하얗게 탈색되고 있었다.

이때, 털보가 혀를 차며 두 사람을 말렸다.

“쯧쯧. 이봐, 이놈이 하는 짓은 얄밉지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보자고. 아직 어린 친구 같은데, 벌써부터 병신을 만들어 놓으면 쓰나.”

살벌한 얼굴의 헤먼과는 달리 털보는 옆집 아저씨처럼 푸근한 인상에 말빨이 아주 좋았다. 어찌할까 망설이는 헤먼을 밀어낸 뒤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털보는 짐짓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봐, 어린 친구. 용병대를 위해 발버둥치는 자네의 노력은 가상하다만…, 이제 쓸데없는 거짓말은 그만두고 진실을 말해 보는 게 어떤가?”

“전 하늘에 맹세컨대 진실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흠, 그래서 방벽 위에 있던 우리 일행을 모두 처치한 게 단 한 명의 소행이라는 말을 우리보고 믿으란 말인가?”

“예. 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중대장님이 그랬습니다. 마치 새처럼 날아 단숨에 성벽 위로 뛰어오르더니 파파팍 하고…….”

그 말에 모두들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에이, 이 새끼가 진짜 우릴 대가리가 텅 빈 오크로 아나?”

결국 헤먼의 인내심이 바닥이 나 버린 모양이다.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라이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퍽!

“크흑!”

얼마나 강하게 얻어맞았는지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맞는 순간 재빨리 고개를 돌려 충격을 흘린다고 흘렸지만,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걸 보면 입 안이 터져 버린 모양이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건 이빨은 부러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진 무지막지한 구타.

퍽, 퍽, 퍽!!

“크윽! 악! 으악!”

처음 몇 번인가는 주먹으로 때리더니, 그것만으로는 성이 풀리지 않는지 발로 인정사정없이 걷어차기까지 했다. 라이는 몸을 최대한 동그랗게 웅크리고 팔로 얼굴 앞을 가로막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점잖게 말로 했더니, 이 새끼가 우릴 아주 가지고 놀려고 드네!”

헤먼이 한참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고 있을 때, 털보가 그를 말렸다.

“이봐, 그만해. 잘못하면 죽이겠어. 이렇게 소중한 포로를 심문도 제대로 못하고 죽여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숨기는 걸 보면, 뭔가 아는 게 있다는 뜻이겠지. 안 그래?”

“그건 그렇지.”

“이젠 내가 알아서 하지. 맡겨 주게.”

“콜록콜록!”

핏물을 내뱉으며 심하게 기침을 해대는 라이. 털보는 그런 라이 곁에 쭈그리고 앉아, 어깨를 토닥이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봐, 어린 친구. 실없는 농담은 이제 그만하고 알맹이가 있는 얘기를 좀 해 보라구. 만약 계속 이딴 식으로 나온다면, 내 인내심도 한계를 느낄 거야. 그러니 뜨거운 맛을 보기 전에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서로를 위해 좋지 않겠나?”

“묻는 대로 솔직하게 다 대답했는데, 대체 왜 이러세요?”

털보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삭이려는 듯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휴우~, 그러니까 네놈의 중대장이 그 높은 방벽을 한순간에 뛰어 올라가, 우리 동료 수십 명을 혼자서 모두 죽였다는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그, 그게 사실인 걸 어쩝니까? 중대장 혼자서 다 한 거라니까요.”

물론 그런 학살극을 혼자서도 저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레인저들이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실력자가 고작 이런 삼류 용병단에 배치되어 있을 리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결국 털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본색을 드러냈다.

“아, 정말 미치겠네. 거짓말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껏 해야 내가 믿는 척이라도 해 주지. 이 새끼, 완전 또라이 아냐? 얌마, 그럼 너네 용병단에는 그래듀에이트급의 실력자들이 득시글거린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너희 연대장은 왜 힘도 제대로 못써보고 모가지가 날아갔는데?”

“…….”

“고작 중대장 따위가 화살이 빗발치는 방벽을 혼자 뛰어넘어가 1개 중대 병력을 몰살시켰다고? 에라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새꺄!”

사실 미치고 팔딱 뛰고 싶은 심정은 털보보다 라이가 더했다. 솔직하게 다 털어놨는데도 왜 믿지를 않는단 말인가. 더군다나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에게 들어서 말해 준 것도 아니고,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실만을 말해 줬는데 말이다.

“흐흐, 네놈이 굳이 내 취미 생활을 도와주겠다며 이렇게까지 애를 쓰는데, 매정하게 그 청을 거절할 수는 없겠지. 알겠어. 그렇게 바란다면 내 흔쾌히 네게 은혜를 베풀어 주지.”

사람 좋아 보이던 털보의 얼굴이 갑자기 스산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두 눈에서는 헤먼과는 또 다른 의미의 광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런 털보의 모습에 모두들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제, 제발 제 말을 좀 믿어 주세요.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했는데, 왜 안 믿으시는 겁니까?”

“좋아,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즐겁게 취미를 즐길 수 있도록 최대한 버텨 보라고.”

털보는 품속에서 뭔가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건 짧지만 아주 날카롭게 끝이 갈린 송곳이었다. 그는 송곳 끝을 자신의 손가락 끝으로 콕콕 누르며 으시시한 어조로 물었다.

“이게 뭔지 아나?”

“송곳이잖습니까. 갑옷을 수선하는 데 쓰는…….”

“흐흐, 맞아. 평상시에는 모두들 그런 용도로 쓰지. 하지만 이걸 또 다른 용도로도 쓸 수 있지. 지옥문을 여는 특급 열쇠로 말이야. 왜, 내 말이 믿기지 않나? 걱정하지 마. 내 말이 맞다는 걸 네놈도 금방 인정하게 될 테니 말이야.”

그 순간 라이는 알 수 있었다. 이 털보 자식은 완전히 미친놈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미친놈이 자신에게 지금부터 뭘 하려는지도. 겁에 질린 라이는 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소리쳤다.

“저, 전 알고 싶지 않아요!”

털보는 뒤를 돌아보며 주위에 있는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놈 팔 좀 꽉 잡아 줘. 움직일 수 없도록”

“뭘 하려고?”

헤먼의 질문에 털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 송곳을 손톱 밑에 찔러 넣으면 엄청나게 아프거든. 더군다나 죽을 염려도 없으니 얼마나 좋아.”

털보의 말에 랜달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란 사람은 헤먼이었다. 그도 냉막한 인상 덕분에 자주 차출이 되어 포로를 족치다 보니, 이런저런 고문 기술들을 제법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털보가 말한 이런 기괴한 짓거리는 지금껏 들어 본 적도 없는 아주 신선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털보는 라이의 엄지손가락을 꽉 움켜쥐고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걸로 여기를 찌르면 꽤나 아프다네, 어린 친구. 자, 어떤가?”

조금씩 손톱 밑을 파고드는 송곳.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라이는 몸을 거칠게 뒤틀며 처절한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윽! 으아아악!!”

송곳 하나를 엄지손톱 밑에 깊숙이 박아 넣은 다음, 털보는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흐흐, 표정을 보니 너도 무척 즐거운가 보군. 벌써 끝나 버렸다고 아쉬워 할 거 없어.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라이는 엄청난 고통에 몸부림을 치려 했지만 헤먼과 랜달이 꽉 붙잡고 있어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라이는 입에 거품까지 물며 악을 쓰듯 소리쳤다.

“뭐든 대답할 테니, 제발 그만해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긴 했지만, 털보는 능청스레 말했다.

“오우, 벌써 날 실망시키면 안 되지. 말을 하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 일단 열 손가락 밑에 송곳을 박아 넣은 뒤 네게 대답할 기회를 줄 테니까.”

그러면서 털보는 품속에서 송곳 하나를 더 꺼내 라이의 손가락에 가져다 댔다. 그때였다. 뒤에서 보다 못한 선임 레인저가 만류하며 나선 것은.

“잠깐! 일단 놈이 제대로 실토하나 들어 보자. 고문을 많이 한다고 해서 좋을 것도 없잖아.”

“쩝, 양쪽 엄지손가락에 송곳을 하나씩 쑤셔 박고 시작하는 게 최곤데……. 하여튼 알겠어.”

털보는 투덜거리며 라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 다시 한 번 더 묻겠다. 그때 상황을 자세히 말해 봐. 만약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또다시 늘어놓는다면 네놈의 모든 손가락과 발가락에도 송곳을 쑤셔 박아 줄 테다.”

라이는 두려움에 질린 눈빛으로 털보를 올려다보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봐.”

진실을 말해도 상대가 믿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라이는 차라리 거짓말을 늘어놓기로 결심했다. 그의 머리는 그럴듯한 스토리를 생각해 내느라 맹렬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대대장님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항복하는 척했습니다. 포위를 당했으니 어쩔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무기를 버리고 방벽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더군요. 문을 아주 조금만 열어 놨기에 우리는 한 명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들어가자마자 철저히 몸수색을 당했고 말입니다. 우리가 비무장 상태라고 생각했는지 적들이 안심하고 있을 때, 대대장님이 슬쩍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어쩌고저쩌고……. 없는 말을 지어내려고 하니, 라이로서는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그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에는 송곳이 깊숙하게 박혀 있는 상황. 엄청난 고통에 기절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불가사의할 정도인데, 그런 상태에서 그럴듯한 거짓말까지 지어내야만 하다니.

포로를 잡으면 왜 고문을 하는지 그 이유를 라이는 오늘에야 깨달았다.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되면 논리 정연한 거짓말을 꾸며낸다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그런데 웃긴 건 털보의 반응이었다.

“흠, 그럭저럭 납득이 가긴 하는데, 몇 군데 미심쩍은 부분이 있단 말씀이야. 아무래도 이 짜식이 은근슬쩍 거짓을 섞은 것 같거든.”

“무, 무슨 말씀을. 단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순수한 사실만 말한 겁니다! 제발, 고문만은…….”

라이는 이제 더 이상 말을 지어낼 여력도 없었다. 그저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 외에는…….

털보는 슬쩍 고개를 돌려 선임 레인저의 눈치부터 살폈다. 선임 레인저 역시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는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털보는 다른 두 동료들을 향해 말했다.

“이놈 왼손 좀 잡아 줘.”

두 사내가 자신의 왼손을 덥석 붙잡자, 라이의 얼굴은 극심한 공포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시끄럿! 한 번 기회를 줬음에도 또다시 거짓말을 늘어놓다니. 이젠 용서할 수 없다.”

신경질적으로 외친 털보는 송곳을 왼쪽 엄지손가락 밑에 깊숙이 쑤셔 넣었다. 그러고도 성이 안 차는지 주변의 나뭇가지를 꺾어 끝을 뾰족하게 다듬기 시작했다. 송곳 대용으로 쓰려는 심산인 것이다.

“으아아악! 야이, 미친놈아! 말해 달라는 대로 다 말했는데, 왜 이 지랄이야. 아니, 아니, 제가 미쳐서 말이 헛나왔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쇼, 엉엉. 이번엔 정말 다 말할게요, 제발!”

하지만 털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뾰족한 나뭇가지 여덟 개를 라이의 손톱 밑에 하나씩 쑤셔 박았다. 그러고도 모자라는지 열 개의 나뭇가지를 더 가져와 끝을 날카롭게 깎기 시작했다. 휘파람까지 룰루랄라 불면서…….

나뭇가지를 깎아 어디에 쓰려는지는 뻔한 사실. 그것이 고통에 몸부림치던 라이를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크아아악! 차라리 날 죽여. 죽여 줘!”

“크크, 네놈이 자초한 일이니 어쩔 수가 없지. 자, 이번에는 네놈 발가락에 이 예쁜이들을 밀어 넣을 차례인가?”

처절하게 비명을 질러대던 라이는 결국 게거품을 뿜어내며 기절하고야 말았다.

“어쭈구리, 거짓말이 안 통하니 이번엔 기절한 척하시겠다 이거지?”

평소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고 다니던 털보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모두들 경악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바로 헤먼이었다. 냉막한 인상 때문에 평소 악역이란 악역은 그가 도맡아 왔었으니까.

그때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선임 레인저가 털보를 향해 말했다.

“이봐, 사람이 저 상태가 될 때까지 버틴다는 게 가능할까? 나는 저놈이 한 말이 어느 정도는 진실이라고 생각되는데…….”

“물론 대부분은 사실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몇 가지 숨기는 게 있어.”

“그걸 발가락에 쑤셔 박으면 진실을 실토할까?”

털보는 스산한 눈빛으로 손에 든 나뭇가지를 흔들며 자신 있게 말했다.

“내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거 20개를 손발톱 밑에 박히고도 거짓말하는 놈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아주 교활한 놈인 거 같은데, 그러고도 통하지 않으면?”

“흐흐, 그렇다면 내 비장의 수법을 몇 가지 더 보여 주지. 눈알을 뽑든지, 아니면 가죽을 벗기고 소금을 치든지…….”

라이가 거짓으로 기절한 척하고 있다면, 들으라고 하는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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