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를 심문하는 데 예상보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르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이곳이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는 붉은 전갈 용병단이다. 그런 3류 쓰레기들이 자신들의 행적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놈들의 실력은 어젯밤부터 시작해서 오늘 아침까지 실컷 맛본 상태다. 부대 안에서 은신과 추적술이 가장 뛰어나다는 레인저들의 실력이 겨우 그 정도였던 것을 보면, 나머지 부대원들의 실력은 보나 마나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들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모라이어스였다. 그는 덤불 밑에 바짝 엎드린 채, 적들이 포로로 잡힌 라이에게 고문을 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저 등신은 왜 잡힌 거야?’
그렇다고 해서 동료인 라이를 구하겠답시고, 놈들을 향해 화살을 날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적병의 숫자는 모두 네 명. 한 명 한 명이 다 자신보다 실력이 높다고 보는 게 옳았다. 최악의 상황이다. 자신의 목숨조차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구한다니, 그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라이어스는 적들의 이목이 모두 라이에게 쏠려 있을 때, 전투를 벌이기에 가장 유리한 지형을 찾아 살며시 이동했다. 지형의 이점이라도 안고 있지 않는 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닌 것이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자리를 잡는 데 성공한 모라이어스는 속으로 라이를 향해 애도의 념을 표했다.
‘멍청한 놈이었지만 이럴 땐 도움이 되는군. 네 복수는 내가 확실하게 해 줄 테니 마음 편히 가거라.’
모라이어스는 화살통에서 4대의 화살들을 꺼내 옆에 가지런히 놨다. 속사(速射)를 할 때, 이렇게 땅에 놔둔 것을 잡는 편이 화살통에서 꺼내는 것보다 속도가 약간이나마 더 빠르기 때문이다. 이걸 다 쏜 다음 재빨리 옮겨 갈 다음 위치도 이미 정해 둔 상태다.
‘어떤 놈을 먼저 쏠까?’
첫 번째 화살을 시위에 건 상태로 어떤 순서로 화살을 날릴 것인지 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죽은 듯 쓰러져 있던 라이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는 게 보였다.
‘저놈 아직도 살아 있었나?’
비정상적일 정도로 좋은 시력 탓에 모라이어스는 라이의 얼굴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핏발이 곤두서 붉게 번들거리는 눈빛! 입가에는 허연 거품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야생의 짐승들처럼 거칠게 뿜어져 나오는 살기까지!
몬스터를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붙였을 때나 나오는 그런 광기 어린 모습이었다. 모라이어스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인간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질긴 목숨이로군.’
라이가 살기를 내뿜으며 일어서자 적들의 이목이 모두 그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은 습격 기회를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끝까지 나를 도와줘서 고맙군, 애송이. 잘 가라.’
드디어 네 명의 적들에게 어떤 순서로 화살을 날릴지를 정했다. 일단 화살을 쏘기 시작하면 최대한 빨리 네 발을 연사(連射)해야 했다. 천천히 호흡을 멈추고 막 시위를 당기려고 할 때였다. 이때, 그의 눈에 이상한 장면이 목격되었다. 라이의 손가락에 꽂혀 있던 송곳과 나뭇가지들이 손도 대지 않았는데 갑자기 쭈욱 뽑혀 나오더니 땅바닥에 툭툭 하고 떨어지는 것을.
‘헉!’
말도 안 되는 이 기괴한 상황에 모라이어스는 시위를 당기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건 라이 앞에 서 있던 적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이가 보여 주고 있는 괴기스런 모습에 모두들 기절초풍할 듯 놀랬지만, 그중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역시 털보였다. 사람 몸속 깊숙이 찔러 넣은 송곳이나 나뭇가지는 억지로 잡아 빼지 않는 한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결국 저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저건 말도 안 돼! 아무리 미쳤다고 해도 저럴 수는 없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저놈부터 잡아. 도망이라도 치면 곤란하니까.”
선임의 말에 털보는 라이를 제압하기 위해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라이의 손이 묘하게 움직이더니 갑자기 털보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털보는 세상이 한 바퀴 빙 도는 듯한 느낌과 함께 땅바닥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퍽!
“크아악!”
처절한 털보의 비명 소리에 분위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모두들 허겁지겁 칼을 뽑아 들고 라이를 포위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으윽! 내, 내 팔.”
털보는 힘없이 덜렁거리는 오른팔을 붙잡고 땅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그의 얼굴만 봐도,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대충 짐작이 갈 정도다.
헤먼은 칼을 겨눠 라이를 위협하면서도 털보를 향해 걱정스런 시선을 보냈다.
“이봐, 괜찮아?”
“팔이 빠진 거 같은데, 빨리 끼워 줘.”
선임은 재빨리 털보 옆에 앉아 힘없이 덜렁거리는 팔을 붙잡았다.
“이를 악물어라. 그럼 시작한다.”
빠진 팔을 다시 끼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힘껏 팔을 잡아당긴 후, 제자리에 맞춰 주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음에도 팔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덜렁거리기만 했다.
“이거…, 빠진 게 아니라 완전히 꺾여 버린 거 같은데?”
“꺾여 버렸다고?”
나약해 보이는 닭다리 관절도 비틀어서 꺾으려면 꽤나 힘이 들어간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두꺼운 사람의 팔이다. 게다가 털보의 팔은 일반인과 달리 오랜 훈련으로 다져져 강철과도 같이 튼튼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 팔을 비틀어 관절을 박살내 버린다는 게 과연 가능이나 한 일일까? 물론 트롤 같은 몬스터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이런 젠장!”
털보는 선임을 왈칵 밀쳐 버리고는 라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분기탱천한 그의 눈에는 이제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고문이고 나발이고, 자신의 오른팔을 못 쓰게 만든 저놈을 처참하게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의 왼손에는 어느새 뽑아 들었는지 시퍼런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이, 이봐. 아무리 신경질이 난다고 해도, 죽여 버리면 안…….”
하지만 선임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라이가 자신을 향해 찔러 오는 단검을 묘하게 움직여 피하더니 털보의 팔을 덥석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털보의 팔이 으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통째로 뽑혀져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저, 저럴 수가!”
“으아아악!”
털보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방금 전까지 팔이 붙어 있었던 그의 왼쪽 어깨에서는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사람의 팔을 잡아 뽑아 버리다니! 몬스터라면 몰라도 사람이 저런 괴력을 발휘하는 것은 본 적조차 없었다.
라이의 얼굴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기괴하게 변하고 있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핏발 선 눈동자. 그리고 온몸의 혈관과 근육은 한껏 부풀어 올라 터지기 일보 직전인 것처럼 보였다. 마치 무슨 괴이한 약물이라도 삼킨 듯한 모습이다.
현재 라이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금단의 마법에 의한 자기 보호 기능이었다. 각성을 하기 전에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신체가 지닌 잠재력을 폭발시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전생의 비술을 통해 태어난 어린 생명체에게는 꼭 필요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달리 일찍부터 내공에 눈을 떠버린 라이에게 있어서, 이 자기 보호 기능으로 파급된 여파가 너무나도 컸다. 그가 무의식중에 익히고 있는 내공심법이 무림에서도 최고의 안정성을 자랑한다는 태허무령심법(太虛無靈心法)이 아니었다면, 갑자기 폭주하기 시작한 내공에 의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걸리고도 남았으리라.
태허무령심법의 효능으로 인해 간신히 주화입마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지금 라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크크크…….”
기절초풍할 일이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레인저들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런 일이야 중대형 몬스터들을 상대하다 보면 흔히 겪게 되는 일이었으니까.
선임 레인저는 침착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모두들 침착해라. 저놈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트롤이라고 생각해라. 헤먼, 넌 우리들이 앞에서 막고 있는 동안 석궁부터 확보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헤먼은 자신의 석궁을 놔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동료들이 저 괴물 같은 놈을 막아 줄 거라고 굳게 믿으며.
헤먼의 석궁은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300미터 안쪽이라면 철판갑옷까지도 꿰뚫어 버릴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장전하는 데 필요로 하는 시간이 그만큼 길다는 사실이었다.
모두들 긴장해서 라이의 눈치만 살필 뿐, 공격할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그들은 사격술에 능통한 레인저였지, 단병(短兵)을 이용한 직접적인 몸싸움은 그리 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이를 향해 단검을 겨누고 있는 그들의 손에 식은땀이 흐른다. 저런 괴물을 이런 단검으로 저지해야 한다는 게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라이는 멀뚱히 서 있기만 할뿐, 공격해 오지 않았다. 지금이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최고의 기회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레인저들은 애가 탔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힐끔힐끔 헤먼을 훔쳐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석궁을 장전시키지 못했나? 저러다가 놈이 공격해 오면 엿 되는데…….’
‘헤먼, 이 새끼, 왜 이렇게 미적거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나도 활을 드는 거였는데…….’
적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헤먼의 석궁이 장전되는 것을 훔쳐보는 긴장감. 이런 것에 정신이 팔려 그들은 라이가 보이는 행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저 미치광이 포로가 자신을 향해 살기를 드러낸 사람만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윽고 헤먼이 석궁의 장전을 완료했다. 헤먼이 석궁을 들어 라이를 조준하는 것을 보고서야 모라이어스는 아차 싶었다. 자신이 정신을 놓고 있는 동안에 라이의 목숨이 경각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재빨리 시위를 뒤로 힘껏 당겼다. 하지만 헤먼이 한발 빨랐다.
텅!
강한 반동과 함께 화살은 엄청난 속도로 라이를 향해 날아갔다. 그런데 레인저들은 곧이어 벌어진 놀라운 광경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떠야만 했다.
툭!
철판갑옷도 꿰뚫는 화살이 맨몸인 라이의 몸통을 꿰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 것이다. 땅바닥에 떨어진 화살의 날카로운 살촉은 마치 해머로 두들긴 듯 뭉툭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으악! 괴물이다!”
이런 모습을 보고도 전의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화살이 라이의 몸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오는 순간, 레인저들은 공포에 찬 비명을 질러대며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쳐 버렸다.
하지만 도망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바로 헤먼이었다. 석궁을 발사한 직후 모라이어스가 날린 화살에 맞아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모라이어스는 재빨리 화살을 재장전한 뒤 두 번째 목표물을 찾았지만, 적 레인저들의 발이 워낙에 빨라 한 놈도 조준할 수가 없었다.
이때, 그는 볼 수 있었다. 라이가 핏발선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아마 라이는 모라이어스가 자신을 쏘려고 한다고 착각한 모양이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섭게 자신을 노려보는 라이의 모습에 모라이어스는 본능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저…, 저게 대체……?”
몸이 위축되자 시위를 당기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갈 리 만무하다. 모라이어스는 자신도 모르게 활을 내려 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살렸다. 더 이상 살기가 감지되지 않자, 라이는 몸을 돌려 어디론가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점점 작아지는 라이의 뒷모습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던 모라이어스는 갑자기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정신이라도 차리려는 듯. 그리고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이미 이 근처에서는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라이어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금 전에 적들이 모여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땅바닥에는 적 레인저의 사체 두 구가 쓰러져 있었다. 하나는 헤먼의 시체였고, 다른 하나는 과다 출혈로 인해 사망한 털보의 시체였다.
하지만 모라이어스는 적의 시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급히 헤먼이 쐈던 화살이 떨어져 있는 곳으로 가 그것부터 집어 들었다. 석궁용으로 제작된 짧으면서도 굵은 화살이다. 그것도 보통 물건이 아니라 중심에 철심까지 박아 파괴력을 극대화해 놓은 화살이었다.
그런데 그의 얼을 빼놓은 것은 화살의 촉 부분이었다. 뭉툭하게 찌그러진 모습! 이건 두터운 철판에 맞고 튕겨 나왔을 때에나 볼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 이게 대체 가능한 일일까? 아니, 무엇보다 아까 그놈이, 정말 내가 알고 있던 라이가 맞기는 한 걸까? 아니면 비슷하게 생긴 놈이었나?”
시력이 좋은 모라이어스가 사람을 잘못 볼 리 만무했다. 모라이어스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