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그래듀에이트?
브로마네스는 시원한 맥주를 양껏 마시며 여유롭게 휴식을 취한 후에야 목적지를 향해 움직였다. 그것도 말을 몰아 산길로 움직인 게 아니라, 공간이동 마법으로 단숨에 이동했다.
소심한 아르티어스는 찌질한 성격 탓에 매사에 조심 또 조심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브로마네스는 이런 자잘한 것들까지 신경 쓰는 드래곤이 아니었다. 흰둥이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는 사막 지역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고작 마법 몇 번 쓴다고 해서 별일이야 있겠냐는 게 통 큰(?) 그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에 받은 임무는 어딘가로 계속 이동 중인 부대를 찾아내는 것이었기에 금방 끝날 일도 아니었다.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을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으니까.
물론 단서는 하나 있었다. 그건 소식이 끊기기 전, 페델 중대장이 대대장에게 올린 보고서였다. 페델 중대장은 적들이 악마의 골짜기 쪽으로 이동한다면 그곳에서 일망타진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적들이 악마의 골짜기가 아닌 다른 길로 북상해서 올라간다면 주도로와 합류하기 직전에 있는 험한 골짜기에서 기습을 하겠다고 했다.
브로마네스는 일단 악마의 골짜기로 들어가는 분기점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대가 이동한 듯한 많은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어지럽게 나 있는 수많은 발자국들……. 브로마네스는 그걸 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발자국들이 앞뒤로 겹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저 골짜기 쪽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되돌아 나왔음에 틀림없다. 그걸 보던 브로마네스는 혀를 찼다.
“뭐야, 이거? 악마의 골짜기로 끌어들여 일망타진한다더니, 오히려 당한 모양이군. 쯧쯧, 하여튼 멍청한 놈들은 이렇게 멋진 지형을 가지고도 활용을 할 줄 모른다니까.”
어쩌면 페델의 중대도 적의 뒤를 따라 나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페델이 일부러 놔줬다면 몰라도 저 안쪽 어딘가에서 적이 방향을 돌려 되돌아서는 순간, 뒤따르던 페델의 중대와 정면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흠, 어떻게 된 일인지 거 되게 궁금하네…….”
한참을 달려 올라가자 악마의 골짜기로 들어가는 방벽이 보였다. 적들이 남긴 흔적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은 방벽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적들의 뒤를 쫓던 페델 중대의 발자국은 관문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관문 여기저기에 뿌려져 있는 말라붙은 핏자국들.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그렇다면…, 이쪽인가?”
곧바로 절벽 쪽으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브로마네스. 그의 예상대로 절벽 아래쪽은 시체들로 가득했다.
“에이, 병신 같은 놈들. 오히려 적들에게 전멸을 당했잖아. 그나저나 제법 전투가 치열했던 모양이지?”
브로마네스는 일단 절벽 밑으로 내려가 시체를 살펴보기로 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시체를 살펴보면 제법 많은 것을 알 수 있으니까.
그는 비행마법을 사용하여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에 도착하자마자 브로마네스는 절벽 밑까지 내려와 시체를 확인해 보겠다는 자신의 결정이 탁월했음을 느꼈다. 군더더기 없이 갑옷째로 깔끔하게 토막 난 시체들. 그렇다면 답은 뻔했다.
“그래듀에이트? 하지만…, 이런 변두리 영지 싸움에 그런 놈이 참가할 리가 없잖아. 그렇다면……?”
브로마네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동족인가?”
만약 드래곤이 유희를 나온 것이라면 작금의 상황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유희랍시고 끼어들었는데 하필이면 패배하는 쪽에 속해 있었다면, 심술이 나서 깽판을 쳤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으니까.
물론 유희를 하면서 이렇듯 대놓고 능력을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왜냐하면 드래곤이 본신 능력을 쓰면 쓸수록 유희가 재미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감안해 본다면 용의자는 십중팔구 분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드래곤이리라.
“흠, 이건 확인을 해 볼 필요가 있겠군. 만약 우리들이 이곳에서 유희를 하고 있다는 게 다른 드래곤들에게 알려지는 건 조금 곤란하니까 말이야.”
그리고 어쩌면 그 어린놈이 실버 드래곤일 수도 있는 만큼 확실하게 확인을 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 * *
멍하니 걸음을 옮기고 있던 라이는 갑자기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이…, 이게 도대체……?”
탈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적들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지 않았던가. 라이는 재빨리 손을 들어 손가락 끝을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상처라고는 전혀 없었다.
“내가 꿈을 꾼 건가? 아니면, 이게 꿈인가?”
이게 꿈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아얏!”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적들에게 사로잡혀 무자비하게 고문을 당했던 기억이 이토록 생생한데, 눈 씻고 살펴봐도 몸에는 그 어떤 상처도 남아 있지 않다니……. 이럴 수도 있는 것인가?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렇다면 그게 꿈이었나? 하지만 손톱 밑을 파고들던 송곳과 나뭇가지로 인한 끔찍했던 고통이 아직까지도 이렇게 생생한데…….’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하던 라이는 문득 자신의 몸이 너무 서늘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주위를 둘러보니 울창한 삼림이 우거져 있었고, 해가 지려는지 조금씩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아마 그 때문에 한기를 느낀 것이리라.
그런데 좀 이상했다.
‘지금 내가 껴입고 있는 옷이 몇 벌인데 한기가 느껴져?’
더군다나 가죽갑옷 위에는 두꺼운 로브까지 입고 있지 않던가. 로브자락을 여미려고 했지만 손에 잡히는 감각이 이상했다.
“어라?”
고개를 숙여 보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헉! 내 갑옷! 내 옷! 그러고 보니 말[馬]하고 식량! 이거 다 어디 갔어?”
자신이 입고 있는 것은 허름한 속옷 한 벌뿐, 그 외에 다른 것은 모두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그렇다면 그게 꿈이 아니었다는 건가?”
꿈이 아니라면 더 이상하다. 적들에게 포로로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탈출할 수 있었을까? 백번 양보해서 놈들이 그냥 놔줬다고 해도, 몸에 상처 하나 남아 있지 않다는 건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설마 자신이 기절해 있는 동안 친절하게 신관을 불러서 상처를 깨끗하게 치료해 줬다면 몰라도.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튀지 말고 그냥 있을 걸…….”
그동안 자신을 잘 보살펴 준 선배를 배신한 탓에 지금 천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왜 이렇게 집 떠난 이후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건지…….”
투덜거리던 라이는 곧,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한가하게 고민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이다. 속옷만 하나 달랑 입고 있을 뿐, 라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비상식량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물 한 방울조차 없다.
“우선 물부터 찾아야 해. 나머지는 그 이후에 생각하기로 하자.”
억지로 힘을 쥐어짜 터벅터벅 걸으며 라이는 중얼거렸다.
“그래, 어디 한번 갈 때까지 가 보자. 이 빌어먹을 운명이 이기는지, 내가 이기는지.”
하지만 그 음성에는 전혀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 * *
“이상하네……. 왜 이리로 왔지?”
브로마네스가 의아해 할 만했다. 그래듀에이트의 흔적을 쫓다 보니 자신이 출발했던 본대가 있는 지점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기왕에 관여한 거, 아예 끝장을 내려는 것인가?’
하지만 그건 곤란했다. 이곳에 파견된 페가수스 용병단이 붕괴되어 버리면, 그 피해가 고스란히 자신에게로 미치게 될 테니까. 혼자서만 유희를 즐기는 것이었다면 호비트 따위야 어떻게 되든지 알 바 아니었지만, 이걸 방관해 버렸다가는 자신이 그동안 쌓아 올린 공로가 물거품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아르티어스에게 무슨 잔소리를 듣게 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젠장! 콩알만 한 새끼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만들다니. 어디 걸리기만 해 봐라. 이쪽 방향으로는 아예 오줌도 싸고 싶지 않도록 만들어 주마.”
브로마네스는 추격의 속도를 더욱 높였다.